해외의 유명 감독들은 어떤 영화를 볼까. 막연하게 생각하기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예술영화나 고리타분한 고전영화만 볼 것 같다. 정말 그럴까.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으로 제90회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한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경우를 살펴보자. 그는 영화팬들 사이에서 유명한 시네필 가운데 한 명이다. 그런 그가 코로나19 여파로 자가격리 중이다. 델 토로 감독은 트위터에 자가격리 중 자신이 본 영화 리스트를 공유했다. 그리고 트위터 친구들에게 볼만한 책이나 영화 등을 추천해달라고 했다. 이 트위터에 유명 감독들이 답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거대한 추천작 리스트가 만들어졌다. 이 리스트 가운데 왓챠플레이에서 볼 수 있는 5편의 영화를 소개한다. 감독들이 어떤 영화를 봤는지 살펴보자.
기예르모 델 토로가 본 영화, <이창>
감독 알프레드 히치콕 출연 제임스 스튜어트, 그레이스 켈리
델 토로 감독의 리스트에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이창>이 있다. 영화 마니아라면 누구나 봤을 법한 영화다. <이창>의 주인공은 사진작가 제프(제임스 스튜어트)다. 그는 자가격리 중이다. 전염병에 걸린 건 아니고 카레이싱 촬영 도중 다리를 다쳐 휠체어 신세가 됐다. 무료한 시간들이 그에게 펼쳐진다. 그러다 그는 맞은편 아파트에 사는 이웃들을 훔쳐보기 시작한다. 어느 날, 제프는 살인사건으로 의심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이창>은 히치콕 감독 특유의 서스펜스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영화 초반부에 중요한 것처럼 등장해 관객의 기대 심리를 자극하다가 후반부에 슬그머니 사라지는 서사적 장치인 맥거핀(macguffin)을 볼 수도 있다. 평론가들은 사각 프레임의 창문을 통해 이웃을 보는 제프의 시선, 훔쳐보는 행동 등이 관객이 영화를 보는 행위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고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이렇게 <이창>에 대해 설명해놓으면 뭔가 어려운 영화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거의 모든 히치콕 감독의 영화는 지금 봐도 그냥 재밌는 상업영화에 가깝다. 참고로 델 토로 감독은 이 영화를 자녀들과 함께 봤다고 썼다. 그러니 히치콕 감독의 영화를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부담 없이 플레이 버튼을 눌러보도록 하자.
대런 아로노프스키가 본 영화, <아멜리에>
감독 장 피에로 주네 출연 오드리 토투, 마티유 카소비츠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과 <아멜리에>는 뭔가 이상한 조합처럼 보인다. 우선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살펴보자. <파이>, <레퀴엠>, <더 레슬러>, <블랙 스완>, <노아>, <마더!> 등을 대표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대부분의 작품이 어둡고 사이코드라마(psychodrama)스럽고 가끔은 난해하기까지 한 영화들이다. 나탈리 포트만이 연기한 발레니나 니나가 주인공인 <블랙 스완>은 관객들도 신경 쇠약에 걸릴 정도로 날카로운 에너지가 가득한 영화다. 그런 아로노프스키가 어딘가 사랑스럽고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아멜리에>를 봤다니. 아로노프스키의 트위터에는 <아멜리에> 말고도 코엔 형제의 <바톤 핑크>,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도 언급된다. 3편의 영화 가운데서도 <아멜리에>가 유독 튀는 느낌이다. 아로노프스키의 팬이라면 그가 <아멜리에>를 보면서 어떤 걸 눈여겨 봤을지 추측하면서, 아로노프스키의 영화를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이번 기회에 <레퀴엠> 같이 속칭 ‘센 영화’를 보고 난 뒤 이어서 <아멜리에>로 치유의 시간을 가지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아리 애스터 감독이 본 TV시리즈, <소프라노스> 시즌 3
제작 데이빗 체이스 출연 제임스 갠돌피니, 로레인 브라코
<유전>, <미드소마>의 아리 애스터 감독도 델 토로 감독의 트윗에 답을 했다. 그는 <소프라노스> 시즌3를 다시 봤다고 했다. 그러면서 “시즌3가 최고”라고 말했다. 1999년부터 2007년까지 총 86부작으로 HBO에서 방영한 <소프라노스>는 시대를 풍미한 작품이다. 대중성과 작품성을 모두 갖췄다고 평가받는다. 지금 HBO를 대표하는 드라마는 분명 <왕좌의 게임>이겠지만 그 이전에는 <소프라노스>였다. 먼 미래, 이를테면 HBO가 100년을 돌아봤을 때 <왕좌의 게임>보다 <소프라노스>가 더 높은 자리에 위치할 수도 있다. 이유는? 뉴저지의 마피아 보스 토니 소프라노(제임스 갠돌피니)의 삶이 당시 미국 사회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에피소드의 제목이 ‘메이드 인 아메리카’(Made in America)일 정도다. <소프라노스>의 명성을 익히 들었지만 쉽게 도전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면 이번이 좋은 기회다. 왓챠플레이에 <소프라노스>의 전편이 서비스되고 있다는 건 진정한 축복이다.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받는 마피아 보스 토니를 만나보자. 참고로 현재 <소프라노스>의 프리퀄 <뉴워크의 성인>(The Many Saints of Newark)이 영화로 제작되고 있다. 2021년 개봉 예정이다. 제임스 갠돌피니의 아들 마이클 갠돌피니가 토니 소프라노를 연기한다.
에바 두버네이 감독이 본 영화, <노팅 힐>
감독 로저 미첼 출연 줄리아 로버츠, 휴 그랜트
어쩌면 이미 봤던 영화를 다시 보는 게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에 적절할 수 있다. 에바 두버네이 감독의 경우가 그런 것 같다.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을 다룬 <셀마>로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오른 두버네이 감독은 달달한 로맨틱 코미디 <노팅 힐>을 자가격리 관람 영화로 소개했다. 그는 “<노팅 힐>에 대해서 무슨 말을 더 해야 할까 (…) 내가 사랑했던 이미지와 말들로 위로를 얻는다”고 말했다. 할리우드의 흑인, 여성을 대표하는 감독이라고 해서 꼭 심각한 영화만 보라는 법은 없다. <노팅 힐>이라면 그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다. <노팅 힐>을 7~8번 이상 본 사람이라면 10번 봐도 좋다. 10번 이상 본 사람이라면? 두버네이 감독의 <셀마>를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두버네이 감독은 델 토로 감독에게 보낸 트윗에서 국내 개봉하지 않은 영화 <벨리>(1998)도 언급했다. 이 영화는 정식 채널을 통해서 볼 가능성이 희박해보인다. <벨리>는 힙합그룹 DMX, NAS, T-BOZ 등의 멤버들이 연기하고, 마돈나, 아이스 큐브, 윌 스미스의 뮤직비디오를 만든 하이프 윌리엄스가 연출한 갱스터 영화다.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이 본 영화 <스탈린이 죽었다!>
감독 아만도 이아누치 출연 스티브 부세미, 사이몬 러셀 빈
<토르: 라그나로크> 이후 할리우드에서 잘나가는 감독으로 당당히 이름을 올린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도 자가격리 리스트 공유 행렬에 동참했다. 그가 본 영화는 아만도 이아누치 감독의 <스탈린이 죽었다!>다. 이오시프 스탈린이라는 실존 인물을 소재로 한다는 점에서, 스탈린의 죽음을 풍자와 코미디로 다룬다는 점에서 와이티티 감독의 최근작 <조조 래빗>이 연상되기도 한다. <조조 래빗>에는 독일 소년단에 입단한 조조(로만 그리핀 데이비스)가 만들어낸 상상 속의 친구 히틀러(타이카 와이티티)가 등장한다. <스탈린이 죽었다!>은 <조조 래빗>에 비해 좀더 현실에 가까운 영화다. 러시아에서 상영금지가 내려진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영화는 제목처럼 구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이 사망한 1953년의 이야기를 다룬다. 권력을 풍자한 고전인 찰리 채플린의 <위대한 독재자>(1940)나 스탠리 큐브릭의 <닥터 스트레인지러브>(1964) 만큼 위대한 영화는 아니지만 분명 재밌게 볼 수 있는 블랙 코미디다. 권력에 반기를 드는 게 아니라 조금만 실수를 해도 숙청이 될 수도 있는 상황, 그 안에서 벌어지는 무능력한 권력가들이 만들어내는 어이없는 일들. <스탈린이 죽었다!>를 보고 나면, 역시나 구 소련을 배경으로 한 걸작 TV 시리즈 <체르노빌>이 다시 보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체르노빌>에도 진실을 은폐하는 무능력한 권력가들이 잔뜩 나오기 때문이다.
씨네플레이 신두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