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시즌이 돌아왔다. 사상 초유 코로나19로 비록 한 달 늦게 개막했고, 아직까지는 무관중 경기이긴 하지만, 그래도 전 세계 스포츠 이벤트가 거의 모두 중단된 상황에서 대만에 이어 정규 시즌을 모두 소화하는 국내 프로야구의 시작은 많은 화제를 낳았다.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과 야구의 본고장인 미국의 ESPN에서도 중계를 결정하며, 낯설고 생소한 동방의 리그지만 그동안 스포츠 이벤트에 목말랐던 갈증을 조금이나마 해소시켜주고 있다. 아울러 메이저리그에선 금기시되던 ‘빠던’의 통렬한 맛에 매료(?) 돼 컬트적인 응원 팬덤마저 생겨나며 BTS와 <기생충>에 이어 KBO 리그의 강제(!) 해외 진출까지 성공적으로 이뤄냈다.

이런 강력하고 오래된 팬덤을 갖춘 야구의 나라 미국답게 할리우드는 일찌감치부터 꾸준히 야구 영화들을 만들어왔다. 메이저리그뿐만 아니라 마이너 구단이나 리틀 야구를 다룬 작품들도 꽤 많다. 국내에서도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하며 <이장호의 외인구단>을 필두로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슈퍼스타 감사용>, <퍼펙트 게임>, <글로브>, <스카우트>, <투혼> 등 하나둘 야구영화들이 제작되기 시작했고, <파울볼>, <나는 갈매기>, <굿바이 홈런>, <그라운드의 이방인>과 같은 다양한 장편 다큐멘터리도 소개됐다. 세상에 너무나 많은 야구 영화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야구의 재미와 그 영화음악의 매력을 동시에 맛볼 수 있는, 고전 아닌 고전 5편을 골라보았다.


내츄럴 (1984)

음악 : 랜디 뉴먼

각본가 출신의 배리 레빈슨의 두 번째 연출작으로, 로버트 레드포드와 글렌 클로스. 로버트 듀발, 킴 베이싱어 등 좋은 배우들의 효과적인 앙상블과 퓰리처상을 수상한 작가 버나드 맬러머드의 탄탄한 원작, 기본기 충실한 연출력이 맞물려 야구영화의 고전이 되었다.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지만 각종 역경을 겪고 돌고 돌아 야구로 돌아온 노장 선수의 집념과 열정을 가슴 벅차게 담아낸다. 짜릿한 승부의 세계에 대한 흥분과 뜨거운 휴머니즘의 감동을 드라마틱 하게 표출하는 건 무엇보다 랜디 뉴먼이 맡은 음악의 힘도 무시할 수 없는데, 특히나 엔딩에서 경기장 조명등이 불꽃놀이하듯 터져나가며 홈런 장면을 연출하는 시퀀스에서 흐르는 장엄한 스코어는 가히 번개에 맞듯 전율을 일으킨다.

<내츄럴> 사운드트랙 표지

할리우드의 영화음악 명문가 뉴먼 패밀리에서 태어난 그는 이미 17살 때부터 곡을 쓰기 시작해 60년대 팻 분이나 더스티 스프링필드, 재키 드샤논 등과 작업했고, 70년대 자신의 앨범을 발표하며 싱어송라이터로 이름을 떨쳤다. 가업과도 같은 영화음악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인 건 조금 늦은 80년대 초부터로 <랙타임>과 본 작품 <내츄럴>이 오스카 음악상에 후보로 오르며 핏줄의 내력을 증명해 보였다. 1930년대가 영화의 배경인 만큼 빈티지한 재즈 스타일과 아론 코플랜드로 대표되는 미국 교향곡의 정신을 이어받은 고전적이고도 영웅적인 팡파르는 스포츠가 가진 불가항력적인 매력과 환희, 설렘 그리고 승리를 향한 숭고한 정신을 담아내는데 모자람이 없다. 야구영화를 대표하는 영화음악.


메이저 리그 (1989)

음악 : 제임스 뉴턴 하워드

야구영화하면 제일 먼저 떠올리는 바로 그 작품, <스팅>의 각본가로 유명한 데이빗 S. 워드가 연출한 <메이저리그>다. 야구단 연고지를 옮기기 위해 꼼수로 전국 각지에서 오합지졸의 선수단을 구성해 인기를 떨어뜨리려는 구단주에 맞서 우승을 차지한다는 만화적인 상상력의 코미디로, 흥행에 성공하며 94년과 98년에 2편과 3편까지 만들어졌다. 음악을 담당한 건 현재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독식하는 최정상급의 영화음악가 제임스 뉴턴 하워드로, 엘튼 존의 키보디스트로 활약하던 초기작 시절의 재기 발랄한 사운드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80년대 특유의 신디 음색이 현란하고 흥겹게 펼쳐지는 그의 테마곡은 스포츠 프로에 자주 사용되며 익숙한 기시감을 남긴다.

<메이저 리그> 사운드트랙 표지

제임스 뉴턴 하워드는 스코어 외에 팝계에서 활약하던 솜씨를 발휘해 삽입곡에도 직접 참여했는데, 거친 음색의 빌 메들리가 따스하게 부르는 엔딩크레딧의 러브 테마 ‘Most of All You’에선 최고의 작사가 부부인 알란과 마릴린 버그만과, 그리고 활력 넘치는 스포츠 물답게 락킹한 사운드가 인상적인 베케트의 ‘How Can The Girl Refuse’에선 글렌 발라드와 함께 작업했다. 영화의 시작을 장식하는 건 야구 영화와 질긴 인연(?)을 자랑하는 랜디 뉴먼이 부른 ‘Burn On’이고, 찰리 쉰이 등장할 때마다 흥겹게 관중들이 따라 부르던 X의 ‘Wild Thing’이나 컨트리한 매력이 일품인 라일 리벳의 ‘Cryin' Shame’과 블루지한 론섬 로미오스의 ‘U.S. Male’, ‘Oh You Angel’도 빼놓을 수 없다.


꿈의 구장 (1991)

음악 : 제임스 호너

블랙삭스 스캔들에 연루된 ‘맨발의’ 조 잭슨을 소재로 가져온 필 알덴 로빈슨 감독의 <꿈의 구장>은 단순히 야구를 넘어 인생 전반에 걸친 목표와 희망, 그리고 화해와 추억을 소중히 담아낸 작품이다. 필모 중 야구와 관련된 영화가 다섯 편이나 될 만큼 야구를 좋아하는 배우 케빈 코스트너는 실제 독립 야구팀 구단주로 활약하며 팀 로고를 이 영화에 나오는 옥수수밭에 선 야구선수로 삼을 만큼 <꿈의 구장>에 대한 애정이 깊다. 음악을 담당한 건 2015년 비행기 사고로 타계한 영화음악가 제임스 호너다. 당시 스케줄이 겹쳐 작업에 대한 확신이 없던 그였지만, 가편집본을 보고 감동받아 참여를 결정했다. 말없이 나간 호너를 보며 영화가 맘에 안 들었다고 로빈슨 감독은 오해했는데, 호너는 감동을 추스르느라 시간이 필요한 것뿐이었다.

<꿈의 구장> 사운드트랙 표지

유니버셜 관계자들은 영화음악으로 호너가 결정되자 큰 규모의 관현악 사운드로 감동을 자아낼 거라 생각하며 반겼지만, 그 예상과 달리 호너는 피아노와 신디, 팬플루트 그리고 기타 등을 활용한 작은 편성의 오케스트레이션으로 정적이고 섬세한 사운드를 활용해 영화에 보다 집중하게 만든다. 아이리쉬 음색과 일렉트릭 효과, 특유의 화음 진행 등 호너만의 특징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몇몇 인장들은 마술처럼 나타나 감동을 극대화하고, 재즈와 모던한 락 사운드도 일부 품어낸 다양한 질감은 조용하고 착한 소리들에 악센트를 가미한다. <꿈의 구장>은 야구를 잘 모르는 호너에게 세 번째 오스카 음악상 후보라는 영광을 선사했으며, 강렬하지 않아도 가슴속에 각인되는 은은하고도 신비한 스코어의 마력이 어떤 것인지 직접 들려준다.


그들만의 리그 (1992)

음악 : 한스 짐머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선수들이 전쟁에 참전하자 메이저리그가 잠시 중단되는데, 이에 대한 고육지책으로 1943년부터 1954년까지 여자 프로야구 리그가 운영됐다. <그들만의 리그>는 이를 배경으로 톰 행크스와 지나 데이비스, 로리 페티, 마돈나, 빌 풀만, 데이빗 스트라탄 등 탄탄한 배우들과 <빅>으로 유명한 페니 마샬이 연출해 성공한 작품이다. 음악을 담당한 건 따로 설명이 필요 없는 한스 짐머로, 그의 필모 중 가장 이질적인 빅밴드 스타일과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서정성 넘치는 스코어를 교배시킨 변화무쌍한 모습으로 관객들을 녹다운 시킨다. 랜디 뉴먼과 마크 샤이먼의 활력을 품어낸 채 베토벤과 여러 팝 컬처 사운드를 믹스시켜 코미디의 유쾌함과 승부의 긴장을 모두 잡아낸 재기 발랄한 솜씨는 이마를 탁 치게 만든다.

<그들만의 리그> 사운드트랙 표지

이는 편곡을 맡은 셜리 워커와 브루스 파울러의 공도 무시할 수 없다. 아쉽게도 이후 짐머의 스타일이 변해가며 이런 음악을 두 번 다시 맛볼 수 없게 됐다. 개성 넘치는 스코어만큼이나 인상적인 건 바로 영화에 쓰인 여러 삽입곡들로, 마돈나가 부르는 마이너한 곡조의 주제가 ‘This Used to Be My Playground’를 비롯해, 원래 주제가로 내정됐지만 마돈나의 참여로 쓰이지 못할 뻔하다가 추가 촬영으로 새로 생긴 오프닝에 깔린 캐롤 킹의 ‘Now and Forever’, 빌리 조엘이 부르는 듀크 엘링톤의 ‘In a Sentimental Mood’와 아트 가펑클이 소화해낸 ‘Two Sleepy People’ 그리고 퓨전 보컬 그룹 맨해튼 트랜스퍼가 해석한 스탠다드 넘버 ‘Choo Choo Ch'Boogie’와 ‘On the Sunny Side of the Street’ 등 명곡들이 수두룩하다.


머니볼 (2011)

음악 : 마이클 다나

대기업이 프로를 운영하는 국내에선 다소 생소할 수 있지만, 미국에서 야구는 단장의 스포츠라 할 만큼 그 영향력이 크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단장 빌리 빈의 실화를 바탕으로 베넷 밀러가 연출한 작품으로, 브래드 피드와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 조나 힐 등 검증된 스타들과 아론 소킨과 스티븐 자일리언이란 일급 각본가가 붙어 야구 경기가 나오지 않는 최상의 야구영화를 만들어냈다. 음악을 담당한 건 감독과 전작 <카포티>를 함께 한 마이클 다나다. 관중들이 바라보는 드라마틱한 승부의 세계, 그 이면의 스토브리그를 다루고 있는 만큼 흥분과 감동의 뜨거운 음악이 자리 잡고 있지 않지만, 서서히 고조되는 스트링과 서늘한 피아노 위주의 서정적이고 미니멀한 스타일은 세이버 메트릭스를 도입해 야구 본질에 새롭게 접근해가는 철학과 도전을 다루는데 손색이 없다.

<머니볼> 사운드트랙 표지

캐나다 출신에 아톰 에고이안 감독과 협업으로 유명하고, 종종 동생 제프 다나와 함께 공동 작업도 하는 그는 인도를 비롯한 제3세계 월드뮤직에 미니멀한 일렉트릭 사운드를 결합시켜 독특한 아우라를 조성해내곤 한다. 오스카를 수상한 <라이프 오브 파이>를 비롯해 <카마수트라>나 <아쉬람>, <몬순 웨딩> 등이 이런 특징들이 잘 드러나는 작품들로, 기존의 익숙한 할리우드 영화음악과는 조금 다른 작법을 제시한다. <머니볼> 역시 귀에 착 붙는 멜로디 대신 짧지만 절제되고 담백한 분위기로 템포를 조절해가며 데이터 기반으로 승리를 쟁취해내는 변화의 조짐을 묘사해간다. 여백과 울림을 강조하고, 리듬과 반복을 통해 드라마를 쌓아가는 다나의 노련한 조율은 선수들이 가진 OPS 스탯처럼 정확하고 세밀하게 들어맞는다. 이런 무색무취 느낌의 스코어에 숨통을 틔워주는 건 딸 역으로 나온 케리스 도시가 불러주는 ‘The Show’다.


사운드트랙스 영화음악 애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