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셀러 소설 <아몬드>의 손원평 작가의 영화감독 입봉작 <침입자>가 개봉 2주차에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소설가, 시인에서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사례들을 소개한다.


<무진기행>

김승옥

김승옥은 1960년대 중반 <무진기행>, <차나 한잔>, <서울, 1964년 겨울> 등 단편소설을 발표하며 파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한국문학 수퍼 루키 역시 생계의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던 차, '문예영화'의 대표주자로 정평이 난 김수용 감독이 <무진기행>을 원작 삼아 <안개>(1968)를 연출하고 김승옥이 직접 각색을 맡으면서 영화계에 발 들이게 됐다. 연출 기회는 빨리 찾아왔다. 그 이듬해, <안개>의 제작자 김태수와 김수용 감독의 제안으로 김동인의 단편소설 <감자> 영화화를 맡게 된 것. 공교롭게도 김승옥은 <서울, 1964년 겨울>로 동인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원작과 달리 주인공 복녀(윤정희)의 고통스러운 삶을 보여주는 데에 무게를 둔 <감자>는 로카르노 영화제에 초청돼 호평받았다. 흥행엔 실패했던 탓일까, 이후엔 감독이 아닌 각본/각색만 담당하면서 <장군의 수염>(1968), <충녀>(1972), <어제 내린 비>(1974), <영자의 전성시대>(1975), <겨울여자>(1977) 등 한국영화사를 대표하는 작품들에 이름을 올렸다. <겨울여자>는 <장군의 아들>(1990) 이전까지 13년간 최고 흥행작의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별들의 고향>

최인호

독재 정치를 고스란히 통과해야만 했던 1970년대는 청년문화의 시대였다. 음악엔 송창식, 양희은, 이장희 등이 있었다면, 문학에선 단연 소설가 최인호가 그 중심에 우뚝 섰다. 최인호의 소설은 당시 문학으로 먹고살 수 있는 유일한 작가로 손꼽힐 정도로 대중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김승옥과 마찬가지로, 최인호 역시 영화계에 입문한 지 1년 만에 감독을 맡게 됐고 그게 유일한 연출작으로 남아 있다. 1976년에 개봉된 <걷지말고 뛰어라>가 바로 그것. 오랜 노력 끝에 성공한 한 남자가 7년 전 우연히 길에서 만나 친구가 됐던 이를 수소문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그의 삶은 지극히 피폐해져 있다. 최인호 소설을 각색한 영화 중 최고작으로 추앙받는 <바보들의 행진>(1975)에서 주인공 영철을 연기한 하재영이 주연을 맡았고, 그 영화의 주제가 '왜 불러'와 '날이 갈수록'을 부른 송창식이 음악감독을 만들었다. <별들의 고향>(1974) 이래 근 30여년간 영화화된 최인호의 소설은 23개에 달한다.


<바람부는 날에는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유하

유하 감독은 이번 기획에서 소개하는 유일한 시인이자 가장 많은 연출작을 내놓았다. 대학원에서 영화를 공부한 그는 1991년 발표한 두 번째 시집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의 표제작을 바탕으로 장편영화를 연출했다. 압구정동이라는 부촌을 둘러싼 소비사회를 비판하기 위해 썼던 시를 통해 유하는 '오렌지족'이 대두되던 90년대 초 대중문화의 총아로 떠오른 상황이라 충무로 연출부 생활을 거치지 않고 곧장 감독으로 데뷔할 수 있었다. 인기스타였던 최민수가 주연을 맡았지만 흥행 성적은 신통치 않았고, 이후 그의 행보는 오랫동안 문학에 한정됐다. 복귀작은 문학상에서 심사를 보다가 발견한 이만교의 소설을 영화로 옮긴 <결혼은, 미친 짓이다>(2002)였다. <바람부는...>을 통해 데뷔한 엄정화와 TV드라마에서만 활동해오던 감우성이 호흡을 맞춘 <결혼은, 미친 짓이다>가 준수한 성적을 거둔 덕분에 유하는 <말죽거리 잔혹사>(2004), <비열한 거리>(2006), <쌍화점>(2008) 등 꾸준히 영화 연출에 매진할 수 있었다. 강남이라는 공간, 두 남자 주인공의 애증에 가까운 관계 등 감독의 오랜 관심이 겹쳐진 <강남 1970>(2015) 이후 오랜만에 이수혁-서인국 주연의 <파이프라인>을 작업 중이다.


<녹천에는 똥이 많다>

이창동

국어 교사로 재직하던 1983년 등단한 이창동은 분단, 산업화, 도시화 등에 천착해 사회를 바라보는 날선 시선으로 그려낸 이야기로 1980년대 한국 소설의 중요한 이름으로 자리잡았다. 문학의 한계를 느낀 그는 1990년대 초를 평정한 작가주의 감독인 박광수의 <그 섬에 가고 싶다>(1993)에 조감독과 각본가로 참여하면서 영화계에 입문했다. 박광수의 다음 작품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의 시나리오도 썼던 이창동은 2년 뒤 <초록물고기>(1997)를 연출해 성공적인 감독 신고식을 치렀다. <박하사탕>(1999)과 <오아시스>(2002) 등 탄탄한 필모그래피를 구축하던 중 노무현 정권 초대 문화부 장관에 재임했다. 네 번째 영화 <밀양>(2007)과 다섯 번째 영화 <시>(2010)가 연이어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돼 굵직한 상을 받으면서 세계적인 명장으로 발돋움했다. 8년간의 침묵 끝에 내놓은 최근작 <버닝>(2018)은 국내외 수많은 영화인들의 2018년 최고작에 손꼽혔다.


<아몬드>

손원평

지난 6월 4일 개봉한 <침입자>의 감독 손원평의 이름은 소설가로 더 익숙할 것이다. 창비 청소년문학상을 받은 첫 장편소설 <아몬드>는 2017년 초 출간돼 지난 3년 사이 40만 부가 넘는 판매고를 올렸고, 또 다른 장편 <서른의 반격>은제주 4·3평화문학상의 영예를 안았다. 하지만 '소설가 출신' 감독이라고 부르기엔 그가 영화계에서 거쳐온 경력이 꽤나 화려하다. 학부 4학년 때 <씨네21> 영화평론상에서 수상하며 평론가로 등단한 그는, 4년 뒤 한국영화아카데미 졸업작품 <인간적으로 정이 안 가는 인간>(2005)으로 미장센 단편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을 받았다. 입봉작을 준비하는 사이 단편 <너의 의미>(2007), <좋은 이웃>(2011), <두 유 리멤버 미>(2012) 등을 연출해온 손원평은 지금까지 영화나 소설을 통해 만든 이야기와는 전혀 딴판인 스릴러 <침입자>를 발표해 코로나 시국으로 한산한 극장가에 다시금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고래>

천명관

천명관 역시 소설가로 보다 폭넓게 알려졌지만, 그의 창작은 사실 영화에서 비롯됐다. 훈련소 동기였던 <파업전야>의 장동홍 감독을 오랜만에 만나 영화 일에 흥미를 느낀 그는 차승재 프로듀서의 제안으로 양귀자의 소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1994)의 각색을 맡았고, <결혼이야기>(1992)의 김의석 감독이 연출한 <총잡이>(1995)과 <북경반점>(1999)의 시나리오를 썼다. 오랫동안 영화계에 몸담았지만 감독 데뷔는 묘연해지던 때, 소설을 써보면 어떻겠냐는 동생의 말을 듣고 소설 집필을 시작했다. 반응은 빨랐고, 뜨거웠다. 첫 단편 <프랭크와 나>가 문학동네 신인상을, 첫 장편 <고래>가 만장일치로 문학동네 소설상을 받았다. 소설가로서 저변을 넓히는 사이, 장동홍 감독의 <이웃집 남자>(2009)의 시나리오를 썼고 2010년 발표한 소설 <고령화 가족>이 영화화됐다. 그리고 드디어 감독 데뷔의 꿈이 이루어질 전망이다. 김언수의 소설을 바탕으로 정우, 김갑수, 최무성을 캐스팅해 부산 변두리에서 나고 자라 조직에서 생존에서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그린 누아르 <뜨거운 피>가 올해 중에 개봉된다.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