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해본다. <미쓰 홍당무> 양미숙(공효진>, <비밀은 없다> 김연홍(손예진), <보건교사 안은영>의 안은영(정유미)을 한자리에 모으면 어떨까 하고. 생각만 해도 입가에 미소가 고인다. 이거 참 골 때리겠는데! 엄청 스펙터클 하겠는데! 아니, 누가 이런 조합의 영화 안 만드나요? 짐작하겠지만, 미숙과 연홍과 은영은 이경미 감독의 분신들이다. 범상치 않은 캐릭터 꼽는 대회가 있다면 본선까지 무난하게 진출할 인물들이기도 하다. 지난해 여성 감독들의 활약과 그들이 창조한 여성 캐릭터들의 매력이 대대적으로 평가받으며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기류가 형성되기까지 정형화되지 않은 여성 캐릭터들에게 영화적 놀이터를 꾸준히 제공해 온 이경미 감독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정말이지, 귀한 재능이고 더 자주 언급되어야 할 행보다. 물론 이는 공효진, 손예진, 정유미라는 든든한 영화적 동지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이경미의 여자들에겐 뭔가 특별한 게 있다.


<미쓰 홍당무> 공효진

내가 뭐 어때서!?” <미쓰 홍당무> 티저 포스터를 처음 봤을 때의 놀라움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입을 삐죽 닫은 채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거대 사이즈의 공효진. , 국내에서도 이런 대담한 포스터가 나올 수 있구나. 제작자인 박찬욱 감독이 공효진에게 포스터 보고 너무 상심하지 말라는 미안함(?)을 전했다는 후일담도 전해지는데, 그럴 만하다. 배우 얼굴에 난 잡티 하나 포토샵으로 한 땀 한 땀 지우는 마당에, 되려 안면홍조가 더 돋보이게 질감 처리하다니. 어쨌든 양미숙의 거침없는 삽질행각을 확실하게 예고한 포스터 덕분에 영화는 개봉 전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그리고 공효진은 전무후무한 삽질 연기로 관객을 안드로메다에 태운다.

공효진이 연기한 양미숙은 수시로 얼굴이 빨개지는 안면홍조증에 걸린 러시아어 교사다. 이게 다가 아니다. “예쁜 것들 다 묻어버리고 싶다는 열등감, 옷깃 하나 스친 것도 운명이라 믿는 과대망상증, 신경질적인 말투와 공격적 성향, 화병에 건강염려증까지. 한마디로 현대인의 정신적 질병을 줄줄이 사탕처럼 달고 있는 비호감 캐릭터다. 그런데 이상하지. 삽질의 연속인데 미워할 수 없고, 헛발짚기의 대가인데 뭔가 귀엽고, 조울증과 소심증을 넘나드는데 이상하게 응원하게 된다. 이게 가능하냐고? 놀랍게도 공효진은 양미숙에 사랑스러움이라는 묘약을 섞어낸다.

알려진 대로 <미쓰 홍당무> 1순위 캐스팅은 공효진이 아니었다. 여러 배우에게 시나리오가 들어갔지만 퇴짜를 맞았고, 돌고 돌아 공효진의 손에 쥐어졌다. 배우들이 양미숙을 고사한 이유? 양미숙이 지닌 괴랄함이 자칫 배우 이미지로 들러붙을 위험이 있다고 판단했으리라. 공효진 역시 이러한 우려가 없었던 건 아니다. 지난 7<방구석1> 출연 당시 공효진은 양미숙에 대해 “(내가) 평범한 캐릭터가 돼가고 있는데, 이 영화가 다시 날 제자리(마이너 개성)로 돌려보낼까 봐 두려움이 컸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안전함 대신 도전에 몸을 맡길 줄 아는 대담한 기질은 이 배우를 양미숙으로 이끌었다. 결과는 아시는 대로. 공효진은 기상천외한 인물에 놀랄 만한 생명력을 불어넣으며 한국 영화사에 잊혀지지 않을 기념비적인 캐릭터를 탄생시켰다. 그녀의 도전은 이후에도 계속됐는데, 겨드랑이털을 기르는 설정이 엽기적이라는 이유로 많은 배우가 고사한 <러브픽션>의 희진 역할을 맡아 또 한 번 캐릭터를 호감 있게 매만졌다. 안면홍조와 겨드랑이털마저도 귀엽게 만드는 이 배우의 재능은 훗날 공블리로 거듭났다는 사실.

<비밀은 없다> 손예진

<비밀은 없다>는 관객이 당황스러워할 만한 지점들을 기어코 밟고 가는 박력의 영화다. 빤한 기획 영화의 홍수 속에서 자기만의 개성을 우렁차게 외치는 작품. 그런 영화에서 김연홍을 연기한 손예진 또한 놀라울 정도로 박력 넘치고 낯설었다. 퍼스트레이디를 꿈꾸는 조신한(줄 알았던) 연홍이 딸의 실종과 함께 히스테릭한 모습으로 변해가는 모습은 그 자체로 강렬한 드라마였다. 영화에서 손예진은 모성의 신화를 표정만으로 깨부수고 뒤집었다. 손예진에게 저런 얼굴이 있었던가.

징후가 없었던 건 건 아니었다. 데뷔 초 청순가련의 대명사로 군림하던 손예진은 언제부터인가 반달 눈웃음 너머에 있는 얼굴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작업의 정석>에서 손예진은 관능적인 물 쇼를 선보이는 능청스런 작업녀였고, <아내가 결혼했다>에서 일처다부제를 주장하는 대찬 유부녀였고, <백야행>에서 모래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미스터리한 여인이었으며, <해적: 다로 간 산적>에선 카리스마 넘치는 해적단 두목이었다. 드라마 <연애시대>에선 연애의 끝에서 다시 사랑을 시작하는 이혼녀 유은호를 맡아 가장 보편의 감정을 짙게 드러내며 공감을 샀다. 데뷔 초 파랗게 기억되던 손예진은 그렇게 장르와 캐릭터를 도장 깨기 하며 빨갛고, 하얗고, 노랗고, 알록달록한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입었다.

그래서 손예진의 모든 걸 봤다고 생각했다. 그런 찰나에 <비밀이 없다>가 나왔다. 오랜 시간 대중 가까이에 있었던 배우의 180도 다른 얼굴을 맞닥뜨리는 건 짜릿한 일이다. 지문이 표현해내지 못하는 감정, 문장으로 규정할 수 없는 표정, 그 끝을 감지할 수 없는 표현력이 <비밀은 없다> 연홍에게 있었다. 비록 영화는 호불호를 타며 흥행에서는 실패했지만, 손예진은 이 작품으로 양립 불가능한 이미지를 절묘하게 공유하는 배우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했다. 손예진은 이후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와, 최악의 인질극을 막아야 하는 협상가와, 대한 제국의 마지막 황녀와, ‘츤데레재벌녀를 자유자재로 오갔다. 아마, 또 보여줄 것이다. 새로운 얼굴을. 그것이 <비밀은 없다>를 통해 그녀가 획득한 신뢰다. 이 배우의 잠재력은 아직 마르지 않았다.

<보건교사 안은영> 정유미

공효진의 <미쓰 홍당무>와 손예진의 <비밀은 없다>가 배우의 이미지를 역전하고 발굴해서 놀라움을 안긴 경우라면, <보건교사 안은영>은 정유미라는 배우가 지니고 있던 본래의 매력이 극에 깊게 침투해 빛을 발한 작품이다. 어떤 매력? 이상한 나라에서 온 앨리스 같은 매력. 플라스틱 마법봉과 비비탄 총을 이렇게도 이질감 없이 소화해 낼 수 있는 배우는 정유미 외에는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한문교사 홍인표(남주혁)의 손을 덥석 잡아 기를 충전~!’ 할 때 포착되는 그녀의 표정을 보라. 기이하고 사랑스럽고 독창적이어서 보는 이들마저 충만하게 만든다. , 정말이지 당 떨어졌을 때 꺼내 보면 기운 솟게 해 줄 표정이다.

안은영은 이경미 감독의 100% 창조물이었던 양미숙이나 김연홍과 달리 정세랑 작가의 소설에서 잉태된 인물이다. 하지만 출생지와 상관없이 안은영은 이경미 감독의 세계 안에서 이질감 없이 어울린다. 그러니까 뭐랄까. 정세랑 작가의 소설을 이경미만큼 잘 살려낼 감독은 없으며, 정세랑과 이경미의 세계에 정유미만큼 최적인 배우는 또 없다는 생각이다. <보건교사 안은영>은 만나야 할 인연들이, 운명의 장난으로 만나지 못하지 아니하고, 절묘하게 만나서 시너지를 낸 경우다.

우린 정유미의 얼굴을 2004<폴라로이드 작동법>에서 처음 만났다. 러닝타임 620. 첫 만남에 허락된 시간은 고작 6분 남짓이었지만, 그 얼굴은 16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 속에 생생하게 저장돼 있다.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이다. 단편영화 하나로 감독과 배우에 대한 대중의 호기심이 폭발한 사례는 흔하지 않으니까. 그건 아마도, 짝사랑에 빠진 이가 응당마주하는 정체불명의 감정을 감독과 배우가 섬세하게 포착해낸 덕분일 테다. 이후 <사랑니>, <가족의 탄생> 같은 흥미로운 영화들에 정유미가 있었다. 뭔가 불안하고 엉뚱한, 청량함을 지닌 정유미의 어디에도 고여 있지 않은 무정형의 연기는 어떤 캐릭터든 지루함에서 멀어지게 하는 마법을 빚어냈다.

<보건교사 안은영>은 정유미의 그런 기질이 최극단에서 발휘된 영화다. “아무도 모르게 남을 돕는 운명을 지닌 안은영은 동서양 통틀어 가장 기이한 히어로. 그래서일까. 국회의사당 돔이 열리면 태권브이가 빠라빠빠빰충동한다는데, 고등학교 양호실에 가면 안은영이 진짜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보건~보건교사다. 나를 아느냐~ 나는 안은영!”


글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