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만 되면 야구팬들의 마음은 들뜬다. 물론 좋아하는 팀이 포스트시즌 리그에 진출하지 못해 일찍 응원 레이스를 멈춰야 했던 이들도 있겠지만, 가을 야구는 가을 야구다. 야구팬이라면 그 어느 때보다도 치열한 경기에 몰입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도 KBO 코리안시리즈가 한창이다. 오늘은 실제 야구 경기만큼이나, 어쩌면 경기보다 더 드라매틱한 야구 이야기를 담은 한국 영화·드라마 5편을 소개한다.


YMCA 야구단

감독 김현석 │ 출연 송강호, 김혜수, 황정민, 김주혁, 조승우 │ 104분 전체 관람가

한복과 야구 방망이, 독특한 조합이다. <YMCA 야구단>은 조선 최초 야구단에 대한 이야기다. YMCA 야구단의 창단 시기는 과거제가 막 폐지된 개화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KBO 리그가 출범하기는커녕 '야구'라는 명칭이 생기기도 전이다. 야구보다 조금 먼저 조선에 알려진 축구를 즐기던 선비 호창(송강호). 절친 광태(황정민)와 축구를 하다가 공을 YMCA 회관 담벼락 너머로 차버렸다. 회관 앞마당에서 발견한 건 축구공보다 훨씬 자그마한 야구공이었다.

야구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허공을 날아가는 것을 보자마자 호창은 하릴없이 야구에 마음을 빼앗긴다. 그 공에 대해 더 알고 싶은 호창은 실수인 척 축구공을 또 한 번 회관 쪽으로 찬다. 공을 차며 마당을 배회하는 호창의 모습은 첫사랑에 빠진 소년의 모습 같기도 하다. 어떻게든 이유를 만들어서 좋아하는 사람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려고 온종일 주변을 서성이는 소년. 헬멧 대신 탈을 쓰고 타석에 선 타자. 빼어날 수, 던질 투, 즐거울 락, '수투락'으로 치환되는 스트라이크. 영화는 '베쓰볼'을 기가 막히게 조선화했다. 구단의 계급 차별 없는 선수 기용 시스템은 처음에는 먹히지 않는가 싶었다. 자고로 양반은 뛰지 않기에 진루해야 할 때마저도 베이스와 베이스 사이를 걸어서 넘어간다거나, 양반 선수가 노비 선수가 송구한 공을 받지 않는 식이었다. 점점 그 틀이 결렬되고 스포츠로서의 모양새를 갖춰가는 과정에 함께하는 것은 재미 이상의 경험이다. 광태 황정민의 덜 떨어진 표정들과, 후반부에 등장해 마지막 장면을 책임진 마부 조승우는 영화를 더 귀엽게 만들었다.


퍼펙트 게임

감독 박희곤 │ 출연 조승우, 양동근, 조진웅, 최정원, 김영민, 손병호 │ 127분 12세 관람가

퍼펙트 게임, 노히트 노런, 사이클링 히트. 야구에서 진기한 기록을 이르는 말이 몇 있다. 그 중 퍼펙트 게임은 선발 투수가 한 명의 타자도 진루시키지 않고 끝낸 게임을 말한다. <퍼펙트 게임>은 1987년 5월 16일 있었던 영원한 롯데 자이언츠 No. 11 최동원(조승우)과 해태 타이거즈 No. 18 선동열(양동근)의 명승부를 담는다. 그 시대에 살지 않았더라도 야구를 조금이라도 아는 이들이라면 들어봤을 이름이다. 이 경기가 실제로 퍼펙트 게임이었던 것은 아니다. 영화는 완벽에 가까웠던 둘의 호투를 완벽하게 재연해냈다.

강 기자(김영민)의 말을 빌려보자. "선동열한테 최동원은 꼭 넘어야 할 산, 아니면 피해서 돌아가야 할 산"이었다. 구단, 미디어, 정치권, 대중 모두가 두 선수를 라이벌 구도로 몰아세웠다. 두 시간이 조금 넘는 러닝 타임 중 초반 반절이 구도가 형성되는 과정을 보여준다면, 나머지 한 시간은 그날의 경기로 채웠다. 긴 호흡으로 한 이닝 한 이닝 따라가는 동안에도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이유는, 영화가 실제 경기 사이사이에 있을 법한 선택의 순간을 디테일하게 그려냈기 때문 아닐까. 타자가 배트를 돌릴지 말지 선택하는 순간, 투수가 구질을 선택하는 순간. 찰나의 집합이 만들어낸 박진감이다. 9년 전 개봉한 이 영화를 지금 다시 본다면 달리 보일 것이 있다. 조연, 단역으로 활약한 배우들의 얼굴이다. 두 선수를 자극해 미묘한 감정을 끌어내던 강 기자는 훗날 <부부의 세계> 손제혁이 되었고, 김용철(조진웅)의 수비 실책에 경기장 안으로 바지를 벗어 던지던 관중석 취객은 <반도> 황 중사(김민재)가 되었다. 골든글러브 취재 기자 태인호, 스포츠 해설가 오정세, 최동원 팬 박서준도 있다.


슈퍼스타 감사용

감독 김종현 │ 출연 이범수, 윤진서, 류승수, 이혁재, 공유 │ 115분 전체 관람가

철강 회사 삼미특수강 구매관리부 직원 감사용(이범수), 어느 날 다른 부서로 발령을 받는다. 그런데 부서 이름이 좀 독특하다. 삼미 슈퍼스타즈. 감사용의 새 직책은 삼미 프로야구팀 투수다. 지금이야 선수 자체도 많고 신인 드래프트다, FA다, 트레이드다 뭐다 영입 창구가 다양하지만 1982년 KBO 출범 때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좌완 투수가 필요했던 구단은 선수를 공개 모집했고 사용은 오디션에 합격해 입단했다. 야구를 사랑하던 그, 이상에 다가간 듯했지만 프로의 세계는 녹록지 않았다. 구단의 부진에 개막 후에도 덕아웃 신세를 면할 수 없었고 등판 기회를 얻어 봐야 패전 처리 담당이다. 그런 모습을 집에 들키고 싶지 않아 가족 앞에서 허풍을 떠는 사용을 보면 더 짠하다.

최동원, 선동열, 그리고 박철순은 들어봤어도 감사용이 누구인지 알 사람은 많지 않다. <슈퍼스타 감사용>은 승자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슈퍼스타 감사용>을 애정하는 이유가 '주인공이 지는 영화'이기 때문이라고. 사용의 목표는 1위도 아니고 단 한 번의 승리다. 영화적으로 극적인 순간에 다다랐을 때 한 번쯤은 봐줄 만도 한데, 사용에게 1승을 안기고 해피 엔딩을 맞게 내버려 둘 만도 한데 그러지 않았다. 감동 성공 신화는 없었다. 아무리 간절해도 세상을 내 손아귀에 구겨 넣을 수 없다. 세상은 승리를 목전에 둔 투수를 상대로 가차 없이 홈런을 쳐버리는 4번 타자 같기도 하다. 졌기에 사용의 노력이 가치를 잃었냐고? 전혀 그렇지 않다. 꼭 그 끝에 승리가 있어야 하나. 몸부림 하나하나가 제값을 하는걸.


글러브

감독 강우석 │ 출연 정재영, 유선, 조진웅, 장기범, 김혜성, 이현우 │ 144분 전체 관람가

1승만을 향해 달리는 이들이 여기 또 있다. 농아인 학교 충주성심고교 야구단이다. LG 간판투수 상남(정재영)은 음주 후 난동을 부려 구단에서 쫓겨날 위기에 놓인다. 징계위원회가 열리는 동안 충주성심학교 야구단 코치직을 맡게 된 상남. 공 맞는 소리 못 들어서 방향도 못 잡고, 말 못해서 팀플레이도 못하는 청각장애인 선수단의 목표는 전국 대회 1승이다. 이리저리 각을 재봐도 상남이 보기에는 희망이 없다.

그가 변한 것은 명태(장기범)가 한밤중에 혼자 땀을 흘리며 공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보고 나서부터였다. 변했다기보다 되찾았다고 해야 하나. 꿈꾸던 때의 열의는 오랜 선수 생활을 거치며 옅어졌다. 상남은 자신의 어린 시절 모습이 투영된 명태의 투구를 보고 지금까지 무얼 향해 달려왔는지 되돌아본다. 성심고의 대회 출전에도 회의적이던 그는 이제 누구보다 팀의 승리를 기원한다. 단원들의 성장기이자 상남의 성장기이기도 했던 <글러브>. 이들이 잘 되기를 바란 이가 한 명 더 있었다. 상남의 매니저이자 죽마고우 철수(조진웅)는, 마음이 앞선 나머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러 상남을 KBO 영구제명에 이르게 한다. 이때 상남은 철수를 욕하지 않았다. 비난하는 대신 꼭 안아줬다. 진짜 프로야구선수로 빙의한 정재영의 호연과 선수 못지않은 야구 사랑으로 수차례 ‘롯데 환자’ 인증한 조진웅의 덕업일치가 실현되는 순간을 실컷 볼 수 있는 작품.


스토브리그

연출 정동윤 │ 출연 남궁민, 박은빈, 조병규, 오정세, 이준혁 │ 16부작

포스터 뒤편으로 야구장이 대문짝만하게 보이는데 야구 이야기가 아니라고? 앞서 소개한 네 작품의 하이라이트에 항상 경기가 있었다면 <스토브리그>에는 경기 자체도 많이 나오지 않는다. 스토브리그는 겨울 비시즌 팬들이 스토브(난로)를 둘러싸고 선수 영입 등 다음 시즌 운영 동향을 열띠게 점치는 모습이 마치 경기하는 것 같아서 비롯된 말이다. <스토브리그>는 구단을 운영하는 프런트의 오피스물이다.

백승수(남궁민)를 재송 드림즈의 단장으로 영입한 이유는 매년 적자만 남기는 구단을 해체하기 위해서였다. 타 종목 팀 해체 이력이 세 번이나 있는 그의 징크스를 이용한 것이다. 그런데 승수는 사장의 뜻대로 해줄 수가 없다. 그는 간판선수 임동규(조한선) 트레이드, 비리 스카우터 고세혁(이준혁) 해고, 비선수 로버트길(이용우) 용병 기용 등, 이유 있는 파격적 구단 운영으로 만년 꼴찌 드림즈의 소생을 도모한다. <스토브리그>는 병역 기피, 승부 조작, 도박, 금지약물 복용 등 39년 한국 프로야구 역사에 있었던 사건 사고를 그럴듯하게 녹여냈다. 선수, 감독, 코치진 정도로 대표되는 경기장 그 뒤편을 그렸다. 야구를 몰라도 상관없다. 세상 사는 이야기를 그림으로써 진입장벽을 낮춘 <스토브리그>는 흥행하기 어려운 스포츠 드라마임에도 최고 시청률 19.1%를 기록하며 큰 사랑을 받았다.


씨네플레이 인턴기자 이지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