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품은 이상은 자주 우리를 배반할 테고, 세상을 살면서 한 점 부끄러움 없이만 사는 건 어려울 것이다.
동학농민항쟁을 다룬 SBS 〈녹두꽃〉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캐릭터는 조정석이 연기한 백이강이었고, 가장 가슴이 뜨거워지게 만드는 캐릭터는 최무성이 연기한 전봉준이었다. 그러는 동안 가장 어찌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던 캐릭터는, 윤시윤이 연기한 백이현이었다. 백이강의 이복동생이자 고부 관아 아전 백가(박혁권)의 적장자로 태어난 백이현은, 일찍이 일본 유학을 통해 문명이 백성들의 삶을 구제할 것이라는 믿음을 품은 청년이었다. 밀려드는 문명을 향해 나라의 문을 열면 그를 통해 새로운 나라를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백이현의 마음도, 출발만큼은 백성에 대한 사랑과 제 죄에 대한 염치였던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순간마다 백이현은 잘못된 선택을 했다. 관군에 강제 징집되어 동학군 토벌대가 된 것은 그가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고통과 악몽을 ‘동비 잡는 도채비’가 되는 것으로 마주한 건 씻을 수 없는 백이현의 죄였다. 다른 이도 아니라 스승인 황석주(최원영)가 자신을 사지로 몰아넣었다는 것을, 그것도 중인인 자신을 매제로 받는 걸 치욕으로 여겼기 때문이란 걸 알게 된 백이현은 신분제가 공고한 조선에 깊은 환멸을 느꼈다. 그러나 그 구체제를 조선 내부의 힘으로 타파해야 한다는 믿음 대신 외세를 끌어들여 외부의 충격으로 박살내는 게 맞다고 믿은 건 백이현의 판단착오였다. 그런 잘못된 선택들이 쌓이고 쌓인 끝에, 백이현은 어느덧 망국의 주범인 친일파가 되었다.
분명 출발한 자리는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자리였던 것 같은데, 정신 차려보니 항쟁은 끝났고, 임금과 신분제가 사라진 자리에 일본의 내정간섭과 착취가 들어와 있으며, 자신은 손에 피를 잔뜩 묻힌 민족의 배신자가 되어 있는 상황. 하지만 그 모든 게 자신의 선택이 낳은 결과였으니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 고부 군수 임명장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온 백이현은, 자신의 부임을 기념하는 잔치가 열리던 날 고부 관아 마당에서 일본어로 울부짖는다. 일본의 개라고 욕을 하는 것이 정상일 텐데, 너희는 도대체 뭐가 그렇게 좋다고 나를 위해 잔치를 열어주는가? 물론 백이현을 위해 울어줄 생각은 없다. 핑계 없는 무덤 없다고, 친일파치고 그만한 핑계 한 자락 없는 사람은 또 어디 있겠나. 다만 뭐가 어디서부터 꼬이기 시작했는지 생각할 때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자신이 공들여 쌓아 올린 문학적 성과를 친일행적으로 다 무너뜨린 소설가 김동인(1900~1951)은, 1939년 자신이 그토록 멸시했던 통속소설을 써서 생계를 꾸리게 된 이후로 절개를 잃었노라는 내용의 칼럼을 《조광》에 실은 적이 있다. 이른바 ‘흰 담비’ 이야기인데, 흰 담비는 제 털의 순백을 너무도 사랑하는 나머지 사람에게 잡혀 죽을지언정 진흙탕은 밟지 않는 동물이나, 실수로라도 털이 더럽혀지면 그만 자포자기한 채 더러운 곳에 온통 굴러 스스로 더럽히려 한다는 이야기다. 자신의 처세가 그와 같았다는 변명은, 직후 이어진 친일의 행보에 대한 설명으로도 읽히곤 한다.
백이현의 파란만장한 행보 또한 어떤 면에선 흰 담비처럼 보인다. 그는 한 차례 제 이상이 꺾이면, 자신의 죄를 반성하고 죄값을 치르고 돌아올 수 있는 지점을 가볍게 가로질러 죄의 끝까지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누가 그러라고 시킨 적도 없는데, 제 한계를 인정하고 그걸 갚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 백이현은 한번 뜻이 꺾이는 순간, 그 반대편의 극단으로 달려간다. 마치 지금의 자신을 정당화하려면 허무맹랑한 이상을 지녔던 과거의 자신을 철저히 비웃어야 한다고 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고부 군민들의 피고름을 짜내던 ‘백가의 개 거시기’로 살던 백이강은 제 과거를 반성하고 백성의 편에 선 동학군이 되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려던 유학파 청년 백이현은 제 과거를 부정하고 일본 낭인들과 함께 조선을 도모하는 친일파가 되었으니, 둘 다 제 과거로부터 정 반대편으로 달려간 건 매한가지가 아니냐 물을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백이강은 죄를 반성하고 그 값을 치르면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 이상향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반면 백이현은 완전무결하지 않은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놓아버리는 것으로, 자신을 구하고 거듭날 기회를 포기해버렸다. 얼핏 제 과거를 배반한다는 점은 같아 보여도, 제 과오의 무게를 인정하고 견뎌낼 수 있었는가 하는 지점에서 두 이복형제는 그 행보가 정반대였던 셈이다.
이게 100여년 전 역사 속의 이야기에만 국한되는 건 아닐 것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 중에도, 한번 추구하던 이상향이 꺾였다고, 제 소매에 오물이 묻었다고, 더는 예전처럼 깨끗한 마음으로 세상 앞에 설 수 없다고, 정 반대편으로 달려가 자포자기한 사람처럼 구는 이들은 많으니까. 그래서 나는 모든 게 다 부질없다고 느껴질 때면, 잠시 멈춰 서서 숨을 고르고 갑오년의 백이강과 백이현을 생각한다. 우리가 품은 이상은 자주 우리를 배반할 테고, 세상을 살면서 한 점 부끄러움 없이만 사는 건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털에 묻은 진흙 얼룩도 언젠가는 빠질 날이 있을 것이고, 얼룩을 견디기 어렵다 해서 진흙탕에 구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승한 TV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