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 우먼 1984>

날씨가 추워짐에 따라 다시 기승인 코로나19를 앞두고 개봉 연기냐 강행이냐를 따졌던 <원더우먼 1984>는 결국 극장과 자사의 OTT서비스인 HBO 맥스에서 동시 공개라는 특단의 조취를 택했다. 지난 늦여름 블록버스터 중 홀로 개봉해 실패한 <테넷>의 쓰디쓴 경험을 교훈 삼아 나름 절충안을 택한 모양새다. 문제는 이후 디즈니의 <뮬란>이나 다른 메이저 스튜디오의 개봉작들이 극장과 VOD 동시 공개를 택해서 별로 좋은 성적을 기록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너브러더스는 지난 12월 4일, 2021년 개봉 대기 중인 모든 신작들까지도 이런 방식으로 극장과 HBO 맥스로 동시에 공개하겠다는 정책을 고수하겠다고 밝혔다. 여기에는 최고 기대작인 드니 빌뇌브의 <듄>을 비롯해, <매트릭스 4>, <컨저링 3>,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 <스페이스 잼 2>, <고질라 대 콩>, <모탈 캠뱃>, <톰과 제리> 실사판 등 다수의 화제작들이 포함되었다.

AMC를 위시한 여러 미국의 극장체인들과 레전더리 픽쳐스 같은 제작사, 그리고 드니 빌뇌브와 크리스토퍼 놀란을 필두로 한 감독들과 배우들이 즉각적으로 반발하고 나섰다. 코로나19의 위협으로 인한 어려움은 인정하지만 현재 워너의 방식은 새로 런칭한 자사의 OTT 플랫폼을 밀어주기 위한 방편에 불과하다, 제작사와 극장 체인들과는 협의가 없는 독단의 정책이다, 블록버스터가 지닌 산업적인 측면의 붕괴와 극장 관람이란 문화 자체를 무너뜨리는 행위라는 등 여러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의견들이 쏟아져 나왔다. 일단 워너는 2021년에만 해당하는 한시적인 계획이라며 선을 그었지만 그럼에도 이 동시 공개 방침을 당장 굽히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2020년의 마지막 블록버스터가 될 <원더우먼 1984>의 흥행은 코로나19 상황의 영화시장에서 중요한 잣대와 경험으로 남을 확률이 커졌다.


<원더 우먼 1984>

코로나 속의 위기 <원더우먼 1984>

자신감이 넘치던 사전 시사 반응과 달리 출발은 그리 좋지 못하다. 유출본을 경계해 HBO 맥스가 서비스되지 않는 지역들부터 우선적으로 개봉했지만, 예상치였던 전 세계 수익 6000만 달러에 한참 못 미치는 3800만 달러로 시작했다. 무엇보다 유럽에서 맹위를 떨치는 팬데믹으로 인해 극장이 거의 폐쇄 수준에 이른 탓도 크고, 가장 큰 영화 시장이 된 중국에서도 2위라는 떨떠름한 성적표를 받은 점도 무시할 수 없다. 모처럼 이른 개봉을 한 일본에서는 괴력을 떨치는 <괴멸의 칼날>과 <도라에몽: 스탠바이미 2>, <약속의 네버랜드> 실사판, <가면라이더> 극장판 등에 밀려 6위로 데뷔하는 수모도 겪기도 했다. 대만과 태국, 브라질, 멕시코 등에서 선전했지만, 이번 주 개봉될 국내와 북미에서 어떤 성적을 기록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다만 전편에 이어 DC세계관에 희망의 등불이 되어주었던 작품답게 영화에 대한 반응은 호의적이다.

<원더 우먼 1984>

1980년대라는 레트로 분위기 속에 애잔한 로맨스와 순수할 정도로 올곧은 영웅담이란 두 마리 토끼를 쫓은 패티 젠킨스 감독의 이 프랜차이즈 속편은 욕심 부리지 않고 ‘원더우먼’만의 미덕이 무엇인지 분명히 자각하고 집중한다. 희망찬 낙관론과 긍정의 힘이 가득한 영화는 팬데믹으로 힘든 세상에 작은 위로와 격려를 선사하며 슈퍼히어로물이 가진 고전적인 미덕을 다시금 깨닫게 만든다. 150분이라는 러닝 타임에 비해 적은 액션 비중과 낯간지러울 만큼 순진한 메시지는 조금 아쉬울 수 있지만, 전편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DC세계관에 짓눌리지 않고 성장하는 영웅의 모습을 보며 응원하는 묘미는 위험(!)을 무릅쓰고 큰 스크린에서 볼 가치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라이온 킹> 실사판 이후 1년 5개월여 만에 만나는 한스 짐머의 이 끝내주는 사운드트랙은 단연 극장 스피커의 ‘파워 만땅’ 고출력으로 온몸으로 전율하며 맛봐야 한다!


한스 짐머

DC로의 화려한 귀환, 한스 짐머

사실 예정대로였다면 한스 짐머의 2020년 스케줄은 젊었던 때만큼이나 살인적인 일정이었다. 아무리 공동 작업을 한다지만 대기 중인 작품만 8편에 달했고, 거기에 젊었을 땐 하지 않았던 세계 라이브 투어까지 잡혀있었다. 여섯 작품을 함께한 놀란의 <테넷>을 고사했지만, 급하게 음악이 교체돼 떠맡은 25번째 <007> 영화 <007 노 타임 투 타이>를 포함해 작업의 면면도 블록버스터와 애니메이션, 드라마, TV다큐시리즈 등 다양하게 걸쳐 있었다. 그야말로 죽을 시간조차 없는 건 제임스 본드가 아닌 한스 짐머였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인해 모든 스케줄이 엉켜 개봉은 뒤로 밀렸고, 공연은 취소됐으며, OTT로 공개된 <힐빌리의 노래>와 <스폰지밥 무비: 핑핑이 구출대작전>에서만 그의 선율을 접할 수 있게 됐다. 가장 바빴던 짐머의 음악을 올해 큰 극장에서 만나는 건 아이러니하게 여러 번 개봉이 밀렸던 <원더우먼 1984>에서 처음이다.

(왼쪽부터) <엑스맨: 다크 피닉스> <원더 우먼 1984>

2016년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을 끝으로 모든 슈퍼히어로 음악에서 물러나겠다던 한스 짐머는 작년에 개봉한 <엑스맨: 다크 피닉스>로 은퇴를 번복했다. 작품이 워낙 지독한(!) 평가를 받아 그의 복귀도 유야무야 묻히고 말았지만, 시종일관 압도적인 다크함과 진중한 사운드를 구사하며 그야말로 엑스맨의 종말(!)에 어울리는 음악을 만들었던 짐머의 솜씨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영화의 실패로 모든 음원을 공개하지 못했던 그는 자비를 들여 추가 사운드트랙을 선보일 만큼 음악에 공을 들였다. 이로서 슈퍼히어로 음악을 예열한 짐머는 다시 DC에 복귀해 자신이 직접 만들었던 사이키델릭한 원더우먼 테마를 화려하고 레트로한 감각으로 변형해 펼쳐 보인다. 전편에서 음악을 담당했던 루퍼트 글렉슨 윌리엄스의 음악도 만족스러웠지만, 짐머는 가히 원저작자다운 감각과 솜씨라고 감탄할 수준으로 극대화해 발휘해냈다.


<원더 우먼 1984>

낭만적이고 희망적인 가슴 벅찬 팡파르

짐머는 이번 원더우먼 속편의 음악을 재정립하는 데 별 시간을 들이지 않는다. 한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단순하면서 강력한 원더우먼 테마 리프를 시작하자마자 흘리고, 곧바로 새로운 테마로 돌입하는데 거침이 없다. 상승감의 스트링 오스티나토와 영웅적인 느낌의 혼이 결합되고, 웅장한 코러스를 가세시켜 다이애나의 새로운 모험담으로 관객들을 쉽게 끌어들이는 경제적이면서 효율적인 짐머의 작법은 그간 DC에서 크리스토퍼 놀란과 잭 스나이더를 거치며 어둡고 묵직하며 혼돈스럽던 미니멀한 사운드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드와 존 윌리엄스 같은 고전적인 심포닉 스코어로의 귀환만큼은 아니지만, 1990년대 통통 튀는 멜로디 감각으로 중무장한 시절의 한스 짐머와 탁월한 지휘자이자 오케스트레이터였던 셜리 워커가 결합해 만들어냈던 음악들(대표적으로 <분노의 역류>나 <하늘에서 온 엽서>, <폭풍의 질주> 등)을 언뜻 떠올리게 할 만큼 밝고 화려한 사운드를 들려준다.

<원더 우먼 1984>

그리고 이 기조는 바로 전작과 <아쿠아맨>의 음악을 맡았던 루퍼스 글렉슨 윌리엄스과 <샤잠>의 음악을 맡았던 벤자민 월피쉬의 작풍과 이어지며 최근 변화된 DCEU(The DC Extended Universe)의 색채를 감지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낭만적인 짐머의 사운드는 영화가 가진 희망적인 낙관주의와 잘 어울리며, 아울러 판데믹에 지친 관객들을 위로하고 격려해내기에 손색없다. 1980년대 한참 대중음악에 매진하던 자신의 색채가 여실히 녹아나기도 하고, 유독 2020년에 80년대와 관련 있는 프로젝트들(해롤드 펠터마이어와 음악을 공동으로 맡은 <탑건 2: 매버릭>과 데이빗 린치의 <듄> 리메이크)을 진행하던 것과 어울려 색다른 의미를 선사하기도 한다. 무려 90여분에 이르는 다채로운 짐머의 호쾌하면서도 감각적인 스코어는 근래 그가 들려준 가장 압도적이면서도 최상위의 결과물이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원더 우먼 1984>

꾸준히 계속될 시그니처 사운드, 원더우먼

티나 구오가 파워풀하게 연주하는 일렉트릭 첼로의 사이키델릭한 테마도 여전히 중용되고 있으며, <블랙 레인>과 <고공침투>, <더 록>, <브로큰 애로우>, <피스메이커>, <글래디에이터>,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 등 액션 시퀀스에서 빛을 발휘하는 짐머의 전매특허와 같은 신디와 오케스트라의 조화 신공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청각의 스펙터클이라 할 만큼 압도적으로 휘몰아치는 비주얼화 된 역동적인 스코어의 서사는 눈을 감고도 장면을 그려낼 수 있게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번 <원더우먼 1984>의 백미는 가슴 아리게 다가오는 사랑이란 감정과 인류에 대한 이타심, 그리고 희망과 위안에 대해 짐머가 표출한 찬가다. 이는 그간 우리가 잊고 있던 지난 시절 영웅담들의 음악을 회고하고 복기하게 만든다.

<원더 우먼 1984>

최종 흥행 결과를 봐서 결정되겠지만 (코로나 상황임에도) 3번째 원더우먼의 제작에 대한 분위기는 나쁘지 않다. 패티 젠킨스 감독은 여러 아이디어가 있고, 3편의 연출도 직접 맡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다만 앞서 언급한 워너 사태를 언급하며 우선적으로 OTT서비스가 아닌 극장 개봉이 계약의 전제 조건이라고 못을 박았다. 아울러 현재 2023년 개봉을 목표로 디즈니에서 기획 중인 새로운 <스타워즈> 프랜차이즈 영화 <스타워즈: 로그 스쿼드론> 연출로 정해진 터라, 그녀가 진두지휘하기까지는 시간이 더 걸릴지 모른다. 혹은 연출자가 교체될 지도 모른다. 너무나 바쁜 한스 짐머의 복귀도 당연히 미지수지만, 원더우먼만의 시그니처와 상징이 되어버린 이 락킹하고 파워풀한 테마 만큼은 살아남아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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