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팬데믹이 지구를 할퀴고 지나간 2020년, 개봉 예정이었던 수많은 영화들이 줄줄이 개봉이 미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영화는 여전히 관객을 찾아왔다. 2020년에 공개된 영화 포스터들 가운데 인상적인 것들을 소개한다.


이제 그만 끝낼까 해

I'm Thinking of Ending Things

<이제 그만 끝낼까 해>는 <존 말코비치 되기>(1999), <이터널 선샤인>(2004) 등의 시나리오를 쓴 찰리 코프먼의 세 번째 연출작이다. 제이크(제시 플레먼스)는 7주 사귄 여자친구(제시 버클리)를 외딴 농장에 사는 부모님 집으로 데려가고, 그녀는 그곳에서 이상한 일들을 경험한다. 포스터는 한 여자가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는 형상이 가운데에 크게 배치됐다. 작중의 배경이 한겨울이라는 걸 강조하듯 새하얀 눈이 여자를 뒤덮고 있는데, 그 모습 자체로도 왠지 멜랑콜리한 느낌을 주는 한편 그 눈이 머리, 두 눈, 두 팔, 두 발을 포박하고 있음을 발견하면 <이제 그만 끝낼까 해>의 장르가 왜 공포와 스릴러로 분류된 걸 얼마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 회화 버전 포스터를 만든 아키코 슈테렌베르거의 작품이다.


암모나이트

Ammonite

게이 로맨스 <신의 나라>(2017)로 극찬 받은 프란시스 리 감독이 각 세대를 대표하는 여성 배우 케이트 윈슬렛과 시얼샤 로넌과 함께 레즈비언 로맨스 <암모나이트>를 만들었다. 1840년, 영국 최남단 바닷마을에서 만난 두 여자의 사랑을 그린다.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는 메리(케이트 윈슬렛)와 샬롯(시얼샤 로넌)의 얼굴이 포개어져 결국 또렷한 하나가 되는 모습과 그리고 뒤에 희미하게 비치는 바다의 물결까지, 이 영화가 온전히 두 여자의 사랑 이야기임을 묵직하게 전한다.


군다

Gunda

새까만 배경 위에 새겨진 하얀 선들. 러시아 감독 빅토르 코싸코프스키의 다큐멘터리 <군다>의 포스터는 지극히 단순하다. 눈썰미가 좋은 이들은 이 하얀 선들이 돼지의 실루엣이라는 걸 알아봤을 것이다. <군다>는 색채도, 사람의 말 소리도 없이, 그저 돼지, 소, 닭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은 <군다>를 두고 이미지와 소리가 최고의 앙상블을 이룬 영화 그 이상의 묘약 같은 작품이라고 평했다. 포스터 속 돼지의 실루엣은 가공의 이미지가 아닌, 실제로 우리 안에서 먹이를 먹는 영화 속 한 장면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맹크

Mank

데이빗 핀처 감독의 최신작 <맹크> 역시 흑백 영화다. 1930~40년대 할리우드를 배경으로, 작가 허먼 맹키위츠(게리 올드만)가 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 중 하나로 손꼽히는 <시민 케인>(1941)의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을 그렸다. 포스터 속 이미지는 맹크가 영화 관계자들이 모인 식사 자리에서 일장연설을 늘어놓는 후반부의 명장면을 포착한 것. 숯을 소재삼아 독보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한국계 아티스트 안나 팍의 솜씨다. 감정이 격양된 순간을 한 프레임에 포착해 숯의 격한 터치가 돋보이는 가운데, 기쁜 듯 슬픈 듯 복잡한 표정을 하고 있는 게리 올드만의 얼굴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프렌치 디스패치

The French Dispatch

모두가 사랑하는 비주얼 마스터 웨스 앤더슨의 신작 <프렌치 디스패치> 역시 어김없이 작품을 둘러싼 갖가지 아트워크들이 기대를 북돋았다. "갖고 싶다"는 말을 중얼거리게 만드는 포스터 역시 마찬가지. 앤더슨의 전작 <개들의 섬>(2018)의 그래픽 디자인을 이끈 에리카 도른의 디렉팅과 스페인 아티스트 하비 아즈나라즈의 일러스트가 만났다. 캐스팅 목록만 봐도 입이 떡 벌어지는 배우 앙상블이 돋보이는 영화답게 배우와 캐릭터를 단적으로 설명하는 삽화들이 빼곡이 모여 있다. 팬데믹으로 인해 계속 개봉이 미뤄지고 있는 이 기대작을 향한 갈증을 그나마 축이고 싶다면 포스터를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보시길.


시티 홀

City Hall

<시티 홀>의 포스터는 단도직입적이다. 보스턴 시청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상을 4시간 32분 러닝타임 아래 기록한 다큐멘터리의 정체성을 프레임의 절반 이상을 보스턴 시청의 외관을 채워버리고 그 위로 'City Hall'이라는 글자를 크게 박아 드러냈다. 카메라 앞의 모든 인공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사건 그대로를 찍는다는 '다이렉트 시네마' 형식을 우직하게 지켜나가는 프레드릭 와이즈먼 감독의 방향을 정확히 관통하는 포스터다.


테슬라

Tesla

귀엽다. 전기 콘센트에 콧수염만 붙였을 뿐인데, 이것이 묘사하는 대상이 19세기 말 20세기 초 전기공학의 혁명적인 발전을 가능케한 니콜라 테슬라라는 걸 알고, 생전 콧수염을 기른 테슬라의 사진을 보면 티저 포스터의 아이디어가 더욱 신박해 보인다. 한편, 역사적인 인물을 그린 전기영화치고는 서사가 다이나믹함 없이 밋밋하다는 특징마저도 품고 있다. 포스터를 오랫동안 쳐다보고 있으면 어쩐지 저 콘센트가 테슬라를 연기한 에단 호크와 닮아 보이지 않나?


휴먼 보이스

The Human Voice

<휴먼 보이스>는 스페인의 거장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와 배우 틸다 스윈튼이 만난 프로젝트란 점에서 큰 화제를 모았던 작품이다. 장 콕토의 모노드라마 <휴먼 보이스>를, 스윈튼이 연기한 주인공이 결혼을 앞둔 전 애인과 전화 통화하는 걸 담은 30분짜리 중편 영화로 옮겼다.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1988)부터 <하이힐>(1991), <그녀에게>(2002), <귀향>(2006), 근작 <페인 앤 글로리>(2019) 등 오랫동안 알모도바르의 감각적인 포스터를 담당해온 후앙 가티가 <휴먼 보이스>의 포스터까지 만들었다. '사람의 목소리'라는 제목에도 불구하고 차라리 인형 같아 보이는 틸다 스윈튼의 새빨간 전신과 그 위로 생활 속 공구들로 만든 타이포그래피가 어우러진 포스터는 두 아티스트의 오랜 파트너십이 여전히 건재함을 증명했다.


열혈남아

旺角卡門

2020년, 'World of Wong Kar Wai'라는 타이틀로 왕가위 감독의 지난 작품들을 4K 리마스터링 복원해 선보이는 프로젝트가 진행됐다. 지난 크리스마스에 개봉해 지금까지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는 <화양연화> 재개봉도 그 일환이다. <화양연화>와 더불어 <열혈남아>(1988), <아비정전>(1991), <중경삼림>(1994), <타락천사>(1995), <해피 투게더>(1998), 중편 <손>(2004)까지 포함하는 프로그램이다. 색보정을 다시 하고, 화면비를 바꾸고, 특정 장면을 빼고 보태는 작업을 거쳐, 왕가위의 영화 세계를 다시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포함된 작품마다 포스터도 나왔는데, 가장 인상적인 건 아오(장만옥)와 아화(유덕화)가 사랑을 나누는 격정적인 순간을 포착한 <열혈남아>의 것.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고졸이라는 이유로 입사 8년 차에도 승진하지 못하는 여자 사원들이 회사를 둘러싼 비리를 파헤치는 과정을 유쾌하게 담아낸 한국영화다. 이렇게 많은 인원의 여성들이 포스터를 가득 메우고, 더군다나 그들이 주/조연 할 것 없이 같은 비중으로 배치됐다는 점에서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티저 포스터는 꽤나 파격적이었다. 영화가 의도한 가치를 전하는 데에 워낙 모범적이라, 우측 상단에 아주 작은 (영화를 배급한 롯데의 브랜드) 델몬트 광고조차 가볍게 웃고 넘어갈 수 있다.


딕 존슨이 죽었습니다

Dick Johnson is Dead

오스카 다큐멘터리상 수상작 <시티즌 포>(2014)의 촬영감독이었던 커스틴 존슨은 감독 데뷔작 <카메라퍼슨>(2016)을 만든 이래 다큐멘터리 연출에 매진하고 있다. 그의 두 번째 작품 <딕 존슨이 죽었습니다>의 주인공은 감독의 아버지 딕 존슨이다. 치매를 앓고 있는 아버지의 죽음을 재현한다. 아버지의 죽음을 소재로 했지만 작품을 감싸는 분위기는 그저 유쾌하다. 사람의 뼈 위로 꽃 장식이 되어 있고 고(故) 딕 존슨의 얼굴이 뿅 튀어나온 것 같은 포스터 역시 슬픔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말 타는 남자를 보여주는

서른여섯 가지 방법은 없다

There Are Not Thirty-Six Ways

of Showing a Man Getting on a Horse

이 이상한 제목은 길기도 길 뿐더러 막상 다 읽고 나면 왠지 속은 듯한 기분마저 든다. 영화 본편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할리우드 황금기에 활동한 명감독 라울 월쉬의 영화 속 장면들을 짜깁기 한 다큐멘터리 <말 타는 남자를 보여주는 서른여섯 가지 방법은 없다>는 말 타는 장면'만'을 모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라울 월쉬가 생전에 자기 연출관에 대해 남겼던 멘트를 고스란히 제목으로 활용한 것뿐이다. 포스터 곳곳에 배치된 말 타는 남자를 잘라낸 이미지 역시, 36개가 아닌, 영화 제목을 이루는 어절들 사이에 배치된 13개다.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