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세 여성, '으른 멜로'로 돌아온 류화영의 <러브씬넘버#>

'내 나이가 어때서'라는 노래가 전 국민 히트곡이 될 만큼 나이라는 명목을 내세우는 게 점점 큰 의미를 잃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나, 여전히 일정한 때마다 찾아오는 고비에 우린 제 나이를 되돌아보곤 한다. 웨이브의 첫 오리지널 드라마 <러브씬넘버#>가 전면에 나이를 내세운 것도 이와 같은 이유가 아닐까. 삶의 방향키를 어떻게 쥐고 흔드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게 나이고 인생이라지만, 때때마다 맞닥뜨리는 상황과 고민을 잘 녹여낸 이야기들은 늘 거스를 수 없는 공감을 자아내니까. <러브씬넘버#>는 4편의 옴니버스 형식을 통해 23, 29, 35, 42세를 살아가고 있는 여성에 집중했다. 그중에서도 오늘은 35세, 반야(류화영)의 이야기를 담은 <러브씬넘버#> '35세 편'을 소개한다. <러브씬넘버#> 전편은 오직 웨이브에서만 감상할 수 있다.

# 35세의 여성

당신에게 35세라는 나이는 어떤 의미인가. 또 요즘을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35세가 의미하는 바는? <러브씬넘버#>의 반야(류화영)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저 35살이거든요. 연장자 입장에서 보면야 아직은 어린 나이지. 근데 체감은 달라요. 돈이건 지위건 이뤄놓은 게 아무것도 없으면, 진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이가 35살이거든요. 물러날 곳 없는 마지노선." <러브씬넘버#>가 정의하는 35세는 쉽사리 전진하지도 뒷걸음치지도 못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이다. 어쩐지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동의하고 싶지 않은 말 같기도 하지만 발 벗고 나서서 부정할 수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반야가 처한 상황 역시 제 자신이 정의한 '35세의 모양'과 똑 닮아있다. 마지노선. 몇 년 전 꽤 괜찮은 솜씨로 영화계에 발을 들인 반야는 민원을 처리해주던 경찰관이 얼굴을 알아볼 만큼 이름을 떨친 영화감독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영화감독이었다'. 지금. 35세가 된 반야는 과거의 영광이 무색할 만큼 자신을 소개할 직함도, 손에 꼭 쥘 수 있는 그 무언가도 없다. 반야는 숨을 쉴 수가 없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30대와 40대를 가로지르는 길목에서 방황 중인 반야는 엎어지면 안 되니까, 빨리 일어나야 할 때니까 점점 더 조급해진다. 한발 더 나아가, 반야는 부정함을 알면서도 샛길을 찾기도 한다.

​

이렇듯 <#러브씬넘버> '35세 편'은 반야의 불안함으로부터 출발하는 이야기다. 웨이브의 첫 번째 오리지널 시리즈인 <#러브씬넘버> '35세 편'이 하고 많은 숫자 중에서도 '35'를 선택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서른다섯. 적지도, 많지도 않은 나이지만 뭐라도 되어 있어야 할 거 같은 강박감이 휘몰아치는, 가장 쉽지 않은 숫자 중 하나니까.

# 35세의 욕망으로 얽힌 관계

반야의 불안함을 조명한 이야기는 곧 반야의 욕망으로 뻗쳐 나간다. 반야가 불안한 이유는 성공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제 능력이 가져다주는 달콤한 결과를 또 한 번의 빛을 보고 싶은 것이다. 물론 현실은 바람 한 점 없는 뙤약볕 한가운데에 놓인 신세지만. 영화 현장이 아닌 대학교 시간 강사, 그마저도 어이없게 잘려버린 반야는 제 인생에 턱턱 목이 막힌다. 그 앞에 영화과 교수 성문(김승수)이 나타난다. 반야의 시선을 붙드는 남자. 성문의 등장 이후, 이야기는 급물살을 탄다. 반야의 인생 일부를 설명하는 초반부를 지나 그녀를 둘러싼 관계들로 눈을 돌리며 본격적인 시동을 걸기 시작한 것. <러브씬넘버#>에는 총 세 사람, 그리고 3가지 형태의 관계가 담겨있다. 다 다른 이유로 엮이게 된 관계들을 차곡차곡 쌓는다. 이를 통해 <러브씬넘버#> '35세 편'은 반야에게 보다 밀도 있는 서사를 부여한다.

___ 반야, 그리고 성문

첫 번째 관계는 반야와 성문이다. 이 둘은 흔히 말하는 불륜 관계다. 성문은 유부남이다. 그 속내 역시 마냥 '사랑스럽지만은' 않다. 사실 반야는 마지노선에 부딪힌 제 인생을 성문으로 해결해보려 그를 사랑하는 '척' 했다. 웬걸. 성문은 정말 그녀의 바람대로 내 인생을 망치러 온 '구원자'였는지, 성문과 잠자리 이후 반야는 "기대 이상의 것"을 얻기 시작한다. 밀린 공과금 정도는 전부 다 해결해 버릴 수 있는 돈도 얻었고, 자신의 능력을 필요로 하는 자리도 생겨났다. 물론 처음 시작은 삐뚤어진 사랑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이해로 감싸주는 성문에게 반야는 온 마음을 다해 안기기 시작한다. 반야의 성공욕으로 시작된 관계, 누군가는 단순 치정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낼지도 모르는 관계에서 반야는 놓치고 있었던 진짜 제 욕망과 욕심을 마주한다.

___ 지성과 성문

반야와 성문의 관계에만 주목했다면 <러브씬넘버#> '35세 편'이 조금은 심심한 이야기가 될 뻔했다. <러브씬넘버#> '23세 편'과 '29세 편'이 각각 폴리아모리(Polyamory)와 메리지 블루(Marriage Blue)라는 특수한 상황을 설정했기 때문에, '35세 편'이 불륜의 이야기로만 일관됐다면 다소 단조로운 서사로 느껴질 수도 있었을 것. 하지만 <러브씬넘버#> '35세 편'이 가장 흥미로웠던 지점은 반야와 성문의 관계만을 그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결혼이라는 제도에 묶여버린 성문과 그의 아내 지성(김영아)의 관계를 함께 조명했다는 것이다.

​

동거, 함께 몸을 부대끼고 산 시간이 일 년도 되지 않은 성문과 지성은 8년째 결별 중이다. 그 '결별의 이유' 마저 꽤나 특수하다. 결별의 이유가 곧 헤어지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결별 중일 뿐이지 이혼하진 않았으니 말이다. 이 둘을 묶어두는 '그 이유'란 대체 뭐길래, 이 둘은 애증의 끈을 놓지 못하는 걸까. 스포일러가 되기에 자세히 이야기할 순 없지만, 이들의 치부가 드러나는 그 순간, <#러브씬넘버> '35세 편'은 멜로 장르에서 미스터리로 방향키를 틀며 또 하나의 재미를 덧입힌다.

___ 반야, 그리고 지성

<러브씬넘버#>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간다. 반야와 지성의 관계에도 연결점을 녹여내며 극의 쫀득한 긴장감을 증폭시킨 것. 반야는 지성의 집에 얹혀살 만큼 지성과 각별한 사이다. 서로 집필에 대한 속 깊은 이야기를 공유하는 두 사람은 꽤나 잘 맞는 선후배처럼 보인다. 물론, 반야와 성문의 관계를 지성이 눈치채기 전까지 말이다. 이렇듯 반야를 중심으로 계속해서 변화를 맞이하는 여러 관계들, 그리고 그 관계들로 인해 제 속을 꺼내 뒤집어 보는 반야를 지켜보는 것. 그것만으로도 <러브씬넘버#> '35세 편'은 충분한 감정적 동요를 선사한다.

# 사실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

앞서 장황하게 이야기를 들어 놓았듯이 <러브씬넘버#> '35세 편'의 대부분은 반야를 중심으로 발생하는 관계의 갈등으로 채워졌다. 극이 진행되는 동안에 그 갈등은 해소되기보단 점점 더 복잡하게 꼬이며 중후반부 극적인 순간을 장식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러브씬넘버#> '35세 편'이 비현실적이라거나 먼 세상 이야기로 느껴지지 않고, 리얼하게 다가오는 건 삼십 대라면 누구나 고민해봤을 욕망과 상처, 방황과 고민을 한데 모아놨기 때문이다. 일과 사랑 사이 선택을 했던 경험이라거나, 성공에 대한 욕망이라거나, 이전 사랑에 대한 상처라거나, 아직 번듯한 무언가가 없다거나. 그 어느 쪽이 됐든 반야라는 완전하지 못한 인물을 통해 우리의 시간과 선택을 돌아보게 만든다. ‘진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서른다섯 반야의 선택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는 것과 동시에 저마다의 공감 포인트를 얻어갈 수 있다는 거다. 사실 <러브씬넘버#> '35세 편'은 삼십 대가 아니더라도 방황의 시기를 마주한 성인이라면 누구나 따라가 보면 좋을법한 이야기다.

# 29세 류화영이 드러낸 35세의 얼굴

이미 베테랑의 경지에 오른 김승수와 김영아의 호연도 좋았지만, <러브씬넘버#> '35세 편'은 단연 류화영의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는 작품이다. <청춘시대> <뷰티 인사이드> <아버지가 이상해> <매드독>을 통해 차근차근 배우로서의 가능성을 비친 류화영은 <러브씬넘버#>를 통해 제 필모그래피에 유의미한 궤적을 새겨 넣었다. <러브씬넘버#>가 전면에 내세운 '19금 드라마'라는 타이틀답게 곳곳에 파격적인 수식어가 떠오르곤 하지만, 류화영은 파격 그 이상의 매력을 펼쳐냈다. 서른다섯이 마주한 위기와 불안의 얼굴을 때론 당돌하고 오만하게, 때론 한없이 처연하게 표현해낸 류화영. 그녀의 연기 변신을 지켜보는 것 역시 <러브씬넘버#> '35세 편'이 선사하는 가장 흥미로운 지점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씨네플레이 유정아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