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3대 영화제 중 하나인 베를린영화제가 코로나 시국을 감안해 오프라인 행사는 열리지 않고 영화산업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한 온라인 스크리닝 중심으로 개최됐다. 올해 영화제에서 최초 공개된 화제작 7편을 소개한다.


재수 없는 섹스 혹은 이상한 포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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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영화제는 근래 루마니아 감독들의 작품을 향한 편애를 보여줬다. 2013년 칼린 피터 네처의 <아들의 자리>와 2018년 애디너 핀틸리의 <터치 미 낫>에 이어, 루미니아 감독 라드 주드의 <재수 없는 섹스 혹은 이상한 포르노>가 올해 황금곰상의 영예를 차지했다. 6년 전 베를린에서 <아페림!>으로 감독상을 받았던 라두 주드(Radu Jude)의 신작이다. <재수 없는 섹스 혹은 이상한 포르노>는 마스크를 쓰고 찍은 섹스 비디오가 인터넷에 퍼지고, 해고를 요구하는 학부모들에게 맞서 싸우는 고등학교 교사 에미가 주인공이다. 소재만 보면 민감한 소재를 다룬 수난극 같지만, 현실과 초현실을 오가는 설정과 이미지가 출몰하는 영화는 난리법석한 풍자극에 가까워 보인다. 극영화와 다큐멘터리를 함께 작업하는 감독답게 이번 작품 역시 두 형식을 가로지르는 대담한 연출력이 돋보인다는 평이 많다. 영화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있는 풍경이 새삼 당대의 영화임을 깨닫게 해준다.


인트로덕션

지난해 <도망친 여자>로 감독상을 받은 홍상수의 25번째 영화 <인트로덕션>은 올해 각본상을 받았다. 우선 홍상수의 페르소나 김민희가 주연을 맡지 않았다는 점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풀잎들>(2018), <강변호텔>(2019), <도망친 여자> 등 근래 홍상수의 근작들에서 배우/연출부로 참여했던 신석호가 주인공 영호 역을 맡았다. 신예 박미소를 비롯해 홍상수의 전작에 출연한 바 있는 서영화, 김민희, 기주봉, 김영호 등이 영호의 주변 인물들을 연기했다. 크게 세 파트로 나누어진 이야기는 각각 서울, 베를린, 동해안에서 진행된다. 인상적인 제목 '인트로덕션'은 영호와 그의 여자친구 주원(박미소)이 각자 부모로부터 누군가를 소개 받는다는 설정을 고려해 붙인 것 같다. 크레딧을 훑어보면 꽤나 흥미로운 점들이 눈에 띈다. 홍상수가 직접 촬영하고 음악까지 만들었고, 김민희는 프로덕션 매니저로 이름을 올렸다. 러닝타임 66분으로 홍상수 영화 중 가장 짧다. 홍상수는 각본상 수상 소감과 함께 달팽이가 이동하는 모습을 (김민희가 'Que sera sera'를 흥얼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찍은 짤막한 비디오를 공유했다.


아임 유어 맨

Ich bin dein Mensch

이번 베를린영화제의 중요한 변화. 바로 연기상 부문이 성별이 아닌 주연과 조연으로 구분된다는 점이다.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이 아닌 주연상 조연상. 올해 주연상은 독일 영화 <아임 유어 맨>의 마렌 에거트(Maren Eggert), 조연상은 헝가리 영화 <포레스트: 아이 씨 유 에브리웨어>의 릴라 키즐링거(Lilla Kizlinger)가 수상했다. 1999년 베를린영화제 여우주연상을 (공동)수상한 마리아 슈라더가 연출한 영화의 주연배우가 베를린 주연상을 받게 된 셈이다. 마렌 에거트는 당대 독일 영화계에서 독보적인 필모그래피를 구축하고 있는 여성 감독 앙겔라 샤넬렉의 작품에 꾸준히 출연해온 배우다. <아임 유어 맨>은 페르가몬 박물관의 과학자인 알마(마렌 에거트)가 연구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이상적인 파트너가 되도록 고안된 휴머노이드 로봇과 3주 동안 생활하는 과정을 그리면서 "사랑, 그리움, 그리고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 것"에 대해서 진중한 질문을 던진다.


우연과 상상

偶然と想像

<해피 아워>(2005), <아사코>(2018) 등을 거치며 현재 가장 중요한 일본 감독으로 자리매김한 하마구치 류스케(濱口竜介)의 신작. <우연과 상상>은 '마법', '문을 열어둔 채', '또 한번' 3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영화다. 대부분 각자 하나의 장소에서 두 사람이 맺는 관계를 보여주는 세 에피소드는 예상치 못한 삼각관계, 실패로 돌아간 유혹, 오해에서 비롯된 만남을 그린다. 그리고 각 에피소드는 하나의 여성 캐릭터가 이끌어나간다. 서로 다른 이야기고 각 인물들끼리 동선을 공유하진 않지만 3개 단편이 모여 유기적인 스토리텔링이 완성된다는 소개를 보면, 단편 모음집보다 연작소설에 가까운 구성인 작품인 듯하다. 영화제가 진행되는 동안 집계된 영화 전문가들이 매긴 평점에서 가장 높은 스코어를 기록하더니, 결국 (2등상에 해당하는) 심사위원대상을 받았다.


바흐만 씨와 그의 교실

Herr Bachmann und seine Klasse

<우연과 상상>과 더불어 최고 평점을 받았던 독일의 다큐멘터리 <바흐만 씨와 그의 교실>은 심사위원상을 받았다. 다큐멘터리가 기록한 대상은 독일의 공업도시 슈타탈렌도르프에 소재한 이민자 학교의 선생님 디터 바흐만과 12~14살 즈음의 열일곱 학생들이다. 마치 <스쿨 오브 락>의 잭 블랙처럼, AC/DC 티셔츠를 입고 나타난 64세의 바흐만 선생은 우리가 어릴 적 만나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은 인물이다. 음악을 사랑하는 핫산, 스스로 히잡을 쓰길 원하는 페르한, 동성 친구를 사랑하는 이들의 권리를 위해 목소리를 내는 라비아 등 저마다 다른 10대 초반의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 아이들의 곁에 바흐만 선생이 있다. 마치 카메라가 찍고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릴 만큼 자연스러운 시선의 3시간 37분의 기록은 보는 이의 마음을 어루만질 것이다.


쁘띠 마망

Petite Mamanㅠ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의 인기에 힘입어 전작들이 모두 한국에 개봉된 프랑스의 시네아스트 셀린 시아마(Celine Sciamma)의 새 영화. 신작을 발표하는 데에 3년 이상은 걸렸던 그간의 텀과 달리 금방 찾아온 다섯 번째 장편 <쁘띠 마망>은, 감독의 초기작에서 천착한 화두인 여자 아이의 성장을 다시 파고든다. 할머니를 떠나보낸 8살 소녀 넬리는 어릴 적 엄마와 할머니가 살던 집에 찾아온다. 엄마가 짓고 놀았다고 들었던 나무집을 발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는 사라지고, 거기서 엄마의 똑같은 이름을 가진 동갑내기 여자애를 만난다. 전작에서 셀린 시아마가 그린 소녀의 성장은 주로 친구와의 관계에서 비롯됐는데, 이번 작품은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엄마의 유년시절이라는 설정까지 경유한다.


루초를 위하여

Per Lucio

이탈리아 감독 피에트로 마르첼로(Pietro Marcello)는 픽션과 다큐멘터리의 경계를 허무는 독보적인 영화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감독이다. 2019~20 시즌 최고의 영화로 손꼽힌 <마틴 에덴>에 이어 연출한 <루초를 위하여>는 60년대 중반부터 50년간 꾸준히 활동해왔던 이탈리아의 싱어송라이터 루초 달라(Lucio Dalla)에 관한 다큐멘터리다. 생전 달라의 오랜 매니저의 적극적인 협조에 힘입어 방대한 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고, 이는 고스란히 영화의 피와 살이 됐다. 과거의 푸티지들을 편집해 그 공간과 시대의 공기를 표현해내는 기막힌 실력을 가진 피에트로 마르첼로의 연출이 루초 달라의 인생, 그리고 그의 노래를 듣고 살았던 이탈리아 민중(마르첼로는 사회주의자다)의 모습까지 아우른다.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