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년 같았으면 이맘때쯤 오스카 시상식이 개최돼 한해 할리우드 영화계를 깔끔하게 정리했을 터였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인해 주요 시상식들이 대거 연기됐고, 2021년 제93회 오스카 시상식(4월 25일)은 아직도 한 달 넘게 남았다. 마침 오스카 후보작들은 이번 월요일(3월 15일)에 모두 공개되었다. 화제가 됐던 <미나리>는 작품, 감독, 각본, 남우주연, 여우조연, 음악상 등 모두 6개 부문에 올라 작년 <기생충>에 이어 미국 아카데미 역사를 새롭게 썼다. 한국 배우로는 최초로 후보에 오른 윤여정과 아시아 배우로는 최초 남우주연상 지명을 받은 스티븐 연이라는 쾌거를 이뤄냈다. 최종 결과 발표만이 남았는데, 기다리는 재미가 제법 쏠쏠할 것으로 보인다.
다소 늦긴 했지만 할리우드의 대미를 장식하는 오스카 후보 공개에 맞춰, 2020년 할리우드 영화음악을 정리하는 의미의 ‘2020 할리우드 사운드트랙 리스트 5’를 소개해본다. 안타깝게도 이 명단에선 제외됐지만 작년에 나온 주목할 만한 사운드트랙들을 간략하게나마 언급하고 본문으로 넘어가고자 한다. 사운드트랙이 활성화된 할리우드 위주의 리스트로만 꾸려지게 건 안타깝게 생각한다. 트렌트 레즈너와 애티커스 로스의 <소울>과 <맹크>, 테렌스 브랜차드의 <다 5 블러드>, 에밀 모세리의 <미나리>, 러드윅 고란슨의 <테넷>, 알렉산드르 데스플라의 <미드나잇 스카이>, 다니엘 팸버턴의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 등은 이미 앞서 따로 다뤘기에 이 리스트에서 제외한다. 리스트는 한국 사운드트랙 리스트 때와 마찬가지로 무순이다.
작년 <이름들로 만든 노래>에 이어 올해도 <피스 오브 어 우먼>이란 걸출한 작품을 선택해 압도적인 바네사 커비의 연기 못지않게 인상적인 터치를 안겨주는 하워드 쇼어의 음악은 명불허전이었다. 시얼샤 로넌과 케이트 윈슬렛의 운명적인 러브스토리에 섬세한 결을 아로새기는 <암모나이트>의 더스틴 오할란과 볼커 베텔만의 감성적인 스코어도 빼놓아선 안 된다. 15편의 오스카 음악상 예비 후보에 올랐지만 아쉽게 탈락하고 말았다. 3D 애니메이션으로 넘어간 이후 좀처럼 회복하지 못하는 로버트 저메키스가 만든 <마녀를 잡아라>에서 환상적이고 스펙터클한 사운드를 선사하는 알란 실베스트리의 음악은 영화적 완성도를 넘어 퍽 만족스러웠다. <겟 아웃>과 <어스>로 할리우드에 완벽히 적응한 마이클 아벨스의 <배드 에듀케이션>도 그냥 잊히기엔 절륜한 결과물이다.
코로나의 직격탄을 받은 픽사의 불운한 애니 <온워드: 단 하루의 기적>에서 일상이 묻어나는 서정적이고 감동적인 선율을 선사한 미하엘 다나와 제프 다나의 솜씨도 매력적이었다. 우주와는 뗄 수 없는 인연을 간직한 스티븐 프라이스의 <오버 더 문> 역시 기발한 모험담에 어울리는 스케일과 웅장한 사운드를 구사하며 귀를 사로잡았다. 대니 엘프만과 니노 로타를 뒤섞은 듯한 서커스 음악으로 짓궂고 장난스러운 재미를 던지는 베어 맥크레리의 <애니멀 크래커>도 뛰어난 애니메이션 음악이었다. 제인 오스틴의 색채를 발랄하면서도 활기차게 음악적으로 구현해낸 이소벨 월러-브릿지와 데이빗 슈바이처의 <엠마>는 작년 가장 매력적인 스코어라 단언할 수 있다. 존 파웰의 <콜 오브 와일드>는 이 리스트에 올릴지 말지 두고두고 고민했을 만큼 극상의 사운드를 선사한 영화음악이었다.
뉴스 오브 더 월드
음악 : 제임스 뉴턴 하워드
폴 그린그래스가 톰 행크스와 두 번째로 만나는 영화 <뉴스 오브 더 월드>는 이전의 감독 작품들과 다르게 19세기 말을 배경으로 한 서부극이다. 반골 기질이 다분한 성향답게 그린그래스는 폴렛 질스의 동명 원작을 바탕으로 언론과 이민자, 그리고 트럼프 시대의 미국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이 절망과 희망이 공존하는 로드무비에 서정적이고 사색적인 분위기의 음악을 제공하는 건 토머스 뉴먼과 함께 오스카의 애증이 교차하는 거장 제임스 뉴턴 하워드다. 그는 이미 과거에 정통 서부극 <와이어트 어프>와 포스트 아포칼립스 풍의 <포스트맨>, 활극모험담 <히달고> 등의 서부 음악을 담당한 바 있다. 하지만 이번 작품에서 분위기는 전혀 다르다. 빅터 영이나 앨머 번스타인으로 대표되는 서부극과 달리 현재의 마르코 벨트라미가 음악을 맡은 <더 홈즈맨>이나 <3:10 투 유마>, 류이치 사카모토와 알바 노토의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등에 더 맞닿아 있다. 현악 편성을 바탕으로 서부극에 자주 쓰이는 피들과 벤조, 하프와 피아노, 베이스 리코더 등을 활용해 황량하고 위협적인 현실과 씁쓸한 외로움의 여정을 묘사해간다. 휴머니즘을 찾아나가는 과정답게 그의 음악은 또 하나의 구원에 가깝다. 제임스 뉴턴 하워드는 이 영화로 9번째 오스카 음악상 후보에 지명됐다. 무관을 벗어던지고 과연 수상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울프워커스
음악 : 브뤼노 꿀레
애플+를 통해 공개된 장편 애니메이션 <울프워커스>는 톰 무어 감독이 내놓은 아이리시 민속 문학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다. 이전의 <켈스의 비밀>과 <바다의 노래: 벤과 셀키요정의 비밀>에 이어 <울프워커스> 또한 오스카 장편 애니상 후보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개성적이고 아름다운 그림체에 가슴 깊이 파고드는 묵직한 주제의식의 조화는 브뤼노 꿀레와 포크그룹 킬라의 황홀한 음악과 결부돼 최상의 결과물을 낳는다. 조르주 오리크와 모리스 자르, 조르쥬 들르뤼, 프란시스 레이, 미셸 르그랑 등의 뒤를 이어 프랑스 영화음악계 거장의 계보를 충실히 잇고 있는 브뤼노 꿀레는 이 판타지 삼부작에 모두 참여하며 통일감을 부여했다. <곰이 되고 싶어요>를 시작으로 <코렐라인: 비밀의 문>, <숲속왕국의 꿀벌 여왕> 등 여러 편의 애니메이션과 <마이크로코스모스>나 <히말라야 지도자의 어린 시절>, <위대한 비상> 등 다큐멘터리를 통해 자연친화적인 사운드를 완성한 바 있는 그는 이번에도 환경이란 테마와 사회적인 이슈를 더블린에 기반을 둔 정통이고 민속적인 색채의 킬라의 도움을 얻어 켈릭 사운드를 효과적으로 덧입혀냈다. 덜시머와 하프시코드, 바우런(bodhrán) 드럼, 피들과 휘슬 등이 반짝이는 일렉 사운드와 모던한 오케스트레이션, 여성 보컬과 어우러져 이 사랑스러운 이야기에 자연스레 관객들이 동참하게 만든다. 놓쳐서는 안 될 수작이다.
블리자드 오브 소울
음악 : 로리타 리트마니스
오스카 음악상 예비 후보가 발표됐을 때 가장 놀라웠던 지명은 바로 라트비아 영화인 <블리자드 오브 소울>이 선정됐다는 점이다. 알렉산더스 그린스가 경험한 제1차 세계대전을 바탕으로 쓴 소설을 원작삼아 진타르스 드레이베르크스 감독이 리얼하게 연출해낸 이 거친 생존담은 지독한 추위와 안개, 혹독한 전장의 묘사와 잘 알려지지 않은 라트비아의 역사를 담아낸 전쟁물로 색다른 감동과 긴장감을 자아낸다. 음악을 담당한 로리타 리트마니스는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라트비아계 후손으로 자신의 핏줄과 민족 정체성을 자각하기 위해 참여했다. 할리우드 여성 영화음악가의 시초격인 셜리 워커의 어시스턴트로 출발해 마이클 케이먼과 바질 폴레두리스, 카터 버웰 등의 오케스트레이터로 활약한 그녀는 워커의 뒤를 이어 DC 애니 시리즈 음악들을 책임지며 널리 알려졌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웅장한 스케일과 탁월한 테마, 드라마틱한 구성이 조화된 완성도 높은 스코어를 이 작품에서 구현해냈다. 마치 <윈드토커>나 <에너미 앳 더 게이트>를 연상케하는 압도적인 서사적 위용의 스펙터클한 사운드는 전장 한복판에 서있는 것 같은 긴장과 흥분, 공포와 애국심을 뭉뚱그려 고취시킨다. 거룩한 합창이 들려주는 감동과 전율의 소리는 이 사운드트랙의 백미다. 아쉽게 오스카 후보 등극엔 실패했지만, 할리우드에 놀라운 실력자들이 많이 자리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대표적인 예시가 될 것이다.
더 퍼스널 히스토리 오브 데이빗 코퍼필드
음악 : 크리스토퍼 윌리스
찰스 디킨스의 유명한 자전적인 소설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새롭게 코미디로 각색해 풀어낸 건 이탈리아계 스코틀랜드 출신인 아만도 이아누치 감독이다. 그는 이미 HBO의 정치 풍자 시리즈 <비프>와 영화 <스탈린이 죽었다!>로 절정의 유머 감각을 뽐낸 바 있다. 데브 파탈과 로잘린 엘르아살, 데이비드 윙 등 전혀 예측 못 할 다인종 캐스팅에 틸다 스윈튼, 휴 로리, 피터 카팔디, 벤 위쇼 등 개성 넘치는 배우들을 조합해 쟁쟁한 앙상블로 풀어낸 이 유쾌한 영화에 텐션과 감동을 불어넣는 건 크리스토퍼 윌리스의 경이로운 음악 덕분이다. 작곡가 이전에 18세기 음악과 미니멀리즘에 정통하고, 캠브리지 대학에 박사학위를 받은 음악학자이기에, 그가 본 윌리엄스와 엘가, 브리튼, 홀스트 등 20세기 초 위대한 영국 작곡가들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밝힌 <더 퍼스널 히스토리 오브 데이빗 코퍼필드>의 고전적인 스코어는 이 독특한 디킨스 각색물에 영원불멸의 생명력과 찬란하고 신선한 영감을 부여한다. 방대한 내용과 다채로운 인물들을 2시간이란 한정된 길이 안에 압축해야 되는 제약에도 불구하고, 원작의 품격과 낭만, 재미를 모두 거머쥘 수 있었던 건 지루할 새 없이 새 주제부를 제시하고, 화려하게 변모하며, 끊임없이 몰아쳐 격정적인 스타일과 드라마틱한 구성을 이끈 그의 정교하고 재기발랄한 솜씨 때문이다. 이 진가를 놓친 여러 영화 시상식들의 결과가 안타까울 정도다.
자기 앞의 생
음악 : 가브리엘 야레
<자기 앞의 생>은 2010년 이후 영화계를 떠나있었던 소피아 로렌이 오랜만에 장편영화로 복귀한 작품으로, 그녀의 아들이기도 한 에도와르도 폰티가 로맹 가리의 동명의 소설을 영화한 작품이다. 1977년 프랑스에서 영상화돼 오스카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바 있는데, 이번 작품은 오로지 소피아 로렌의, 소피아 로렌에 의한, 소피아 로렌을 위한 영화가 되었다. 이 영화 여신을 위해 음악을 직조한 건 말이 필요 없는 백전노장 가브리엘 야레다. 그는 세네갈 출신의 고아 모모와 홀로코스트 생존자이자 매춘부인 로자를 각각 상징하는 현대적인 리듬의 힙합 사운드와 유대인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 바이올린 독주에 피아노가 어우러진 슬픈 곡조를 대비해 캐릭터를 부각시켰다. 그들은 점차적으로 동화되어가며 아이는 성장하고, 어른은 이별을 준비한다. 그 과정을 짧지만 특유의 감미롭고 절절한 선율로 야레는 먹먹한 감동을 자아낸다. 물론 최전성기 때의 능수능란한 고조로 관객들을 쥐락펴락하진 않지만, 처연한 바이올린과 절제된 피아노의 울림에서 눈물을 감추긴 꽤나 어렵다. 아울러 이탈리아의 디바 로라 파시니가 부른 영화의 주제가 “Io sì(Seen)”는 오스카 주제가상에만 12번 오른(그러나 한 번도 수상하지 못한) 히트곡 제조기 다이안 워렌이 작정하고 이태리어로 작업한 곡으로 제78회 골든 글로브 주제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번엔 오스카를 거머쥘 수 있을지 지켜보는 것도 관전 포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