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와 음악 팬들을 두루 만족시킨 <500일의 썸머>를 다시 극장에서 만날 수 있게 됐다. 재개봉을 기념하며 영화를 채운 음악들의 면면을 곱씹어본다.


There Is A Light That Never Goes Out

THE SMITHS

톰(조셉 고든 레빗)은 썸머(조이 디샤넬)를 1월 8일에 만났다. 처음 본 순간 운명의 반쪽임을 느꼈지만 첫 대화는 3일 후. 사람이 말을 걸어도 무시한다는 얘기를 듣곤 제딴엔 관심 없는 척하려는데, 엘리베이터를 같이 탄 썸머가 톰의 헤드폰에서 새어나오는 노래를 듣고 먼저 말을 건다. "저 그 스미스 노래 좋아해요." 대뜸 취향이 비슷하다면서 "당신 곁에서 눈 감는 건 최고의 죽음이야" 부분을 따라부른다. 썸머는 엘리베이터가 열자마자 인사도 없이 휙 나가버렸고 멀뚱히 서 있는 톰의 눈은 이미 하트 뿅뿅이다. '음덕'이라면 좋아하는 여자가 나와 같은 노래를 좋아한다는 걸 알았을 때 그 호감도가 그대로 하늘을 찌르게 되는 건 불문율이니까. 스미스는 80년대 영국이 낳은 최고의 밴드로 손꼽힌다. 그들이 5년간 활동하는 사이 발표한 최고의 앨범 <The Queen Is Dead>에 수록된 'There Is A Light That Never Goes Out'은 수많은 팬들이 스미스의 최고 명곡으로 추켜세우는 노래다. 이 곡을 소개하는 데에 최고라는 수식어를 세 번이나 썼을 만큼 영미권에선 너무너무나 유명하다. 취향에 대한 고집이 대단한 톰에게 이 노래를 좋아한다는 건 별 대수롭지 않은 경우일 텐데, 썸머와의 접점이 처음 만들어진 곡이기에 더없이 특별할 수밖에. 그날 이후에도 생각보다 썸머와 가까워지지 못한 톰은 사무실에서 스미스의 또 다른 노래 'Please, Please, Please Let Me Get What I Want'를 틀어보지만 썸머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Sugar Town

NANCY SINATRA

28일째 회식 날. 썸머는 회사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한 곡 뽑는다. 한껏 높은 마이크 때문에 까치발을 한 채 "첫 무대니까 예쁘게 봐주세요" 하며 부르는 노래는 낸시 시나트라의 'Sugar Town'이다. 아담한 펍에서 몸을 살랑대고 방실방실 웃으며 귀여운 멜로디를 꽤나 출중한 실력으로 노래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톰과 마찬가지로 영화를 보는 관객들 역시 조이 디샤넬의 사랑스러움에 귀가 입에 걸린다. 미국의 국민 가수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는 딸 낸시 시나트라가 가수로 성공하도록, 60년대 중반 서서히 명성을 떨치고 있던 프로듀서 리 헤이즐우드(Lee Hazlewood)에게 낸시의 프로듀싱을 맡아달라고 직접 요청했다. 썸머가 부른 'Sugar Town'은 낸시 시나트라와 리 헤이즐우드의 협업에서 유독 크게 오랜 사랑을 받은 노래다. 2000년대 초 LA 등지에서 공연 활동을 한 바 있는 디샤넬은 <500일의 썸머>가 개봉하기 3년 전 뮤지션 M 워드(M. Ward)와 함께 '쉬 앤 힘'(She & Him)을 결성해 현재까지 그룹을 이어가고 있다.


You Make My Dreams (Come True)

DARYL HALL & JOHN OATES

복사실에서 처음 키스를 한 두 사람은 주말엔 이케아에서 오붓한 데이트도 즐긴다. 그리고 그날 밤을 함께 보낸다. 옷을 벗고 기다리는 썸머에게 톰이 다가가면 경쾌한 키보드 소리가 문을 여는 홀 앤 오츠의 'You Make My Dreams'가 들리기 시작한다. 아침에 집을 나서는 톰은 세상 모든 걸 가진 남자의 얼굴을 하고 있다. 의기양양하게 걸음을 옮기는 톰을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하나둘 쳐다보고, 그의 걸음에 맞춰 분수까지 터져 오르면, 주변 사람들이 톰과 하이파이브를 하는 것도 모자라 다같이 군무까지 춘다. 꽤나 현실적인 관계를 그린 영화에서 유일한 판타지적인 순간. 완전히 작정한 것처럼은 아니더라도 이미지와 음악이 딱딱 맞아들어가는 솜씨는 마크 웹 감독이 영화 데뷔작 <500일의 썸머> 이전에 알아주는 뮤직비디오 감독이었다는 걸 상기시킨다. 영화에 쓰이기만 하면 거의 치트키마냥 일정이상의 흥겨움을 보장하는 홀 앤 오츠의 노래 'You Make My Dreams'는 <웨딩 싱어>(1998), <슈퍼 배드 2>(2013), <레디 플레이어 원>(2018) 등 수많은 영화에 사용됐다.


Quelqu'un m'a dit

CARLA BRUNI

우리는 이미 톰과 썸머의 관계가 끝났다는 걸 안다. 두 사람이 한창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날들이 지나가고, 톰은 그 행복이 커질수록 썸머가 연인임을 확인 받고 싶어한다. 영화를 보러 가던 어느 날, 차 안에서 톰이 묻는다. "지금 우리... 뭐 하는 걸까?" "영화 보러 가잖아." "그게 아니라.. 우리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 같냐고." "모르겠어. 뭐 어때. 난 행복해. 넌 안 그래?" "행복해." 잠시 어색하던 분위기를 카를라 브루니의 노래 'Quelqu'un m'a dit'(누군가 내게 말했어)가 가로지르고 있다. 모델로 데뷔해 믹 재거, 에릭 클랩튼, 케빈 코스트너 등 수많은 셀럽들과 수많은 염문을 뿌린 브루니가 프랑스 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와 결혼하기 5년 전에 발표한 데뷔 앨범의 문을 여는 'Quelqu'un m'a dit'는, <퐁네프의 연인들>의 레오스 카락스 감독이 노랫말을 써서 화제를 모은 곡이다. 갑자기 긴장이 감돌다가 다시 여느때처럼 평화를 되찾는 1분 남짓한 신이 브루니의 내내 나긋한 음악과 맞물려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Train In Vain (Stand By Me)

THE CLASH

톰은 두 번 마이크를 잡는다. 썸머와 친구가 된 회식 자리에서 픽시즈(Pixies)의 'Here Comes the Man'을, 친구들이 소개시켜준 여자와 어색한 시간을 보내다가 썸머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하다 고백하고 클래시의 'Train in Vain'을 부른다. 분위기가 분위기인 만큼 픽시즈의 노래는 회사 사람들 특히 썸머에게 잘 보이겠다는 의지로 똘똘 뭉쳐 꽤나 멋드리게 부르는데, 클래시의 노래는 주사마냥 거의 울부짖을 기세다. 고분고분 연애 상담을 잘도 해주던 여자도 그 꼴을 보고는 자리를 뜬다. 'Train in Vain'은 톰이 영화 속에서 여러 차례 입고 나오는 티셔츠에 찍힌 앨범 <London Calling>의 마지막 노래다. 앨범 초반에는 이 노래가 트랙리스트에 누락돼 마치 히든 트랙처럼 알려졌는데, 사실 아직 이 노래가 녹음될 때 이미 음반 커버가 인쇄되고 있어 벌어진 해프닝이었다. 펑크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앨범임에도 불구하고 디스코 유행이 한창이었던 1979년 말의 영향을 보여주듯 디스코의 댄서블한 그루브가 물씬한 트랙인데, 톰은 완전히 청승 가득한 술주정으로 소화한다.


Hero

REGINA SPEKTOR

<500일의 썸머>에서 노래 두 개가 아주 중요한 순간에 쓰이는 아티스트, 러시아 출신의 싱어송라이터 레기나 스펙터다. 'Us'가 영화 오프닝크레딧을 장식한 데 이어, 톰이 회사 동료의 결혼식에 가는 길에 썸머를 만나 연인이 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안고 초대 받은 파티에 가는 대목에서 스펙터의 'Hero'가 흐른다. 두 노래 모두 분할 화면으로 구성된 데에 쓰였다는 점이 재미있다. 사실 'Us'와 사뭇 다른, 음울한 분위기의 'Hero'를 듣자마자 톰의 기대처럼 되지 않을 거라는 걸 예감한다. 처음엔 '기대'와 '현실'은 크게 다르지 않다. 썸머와 반갑게 인사를 하고, 기차에서 만났을 때 관심을 가졌던 책 <행복의 건축>을 선물한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썸머와 오붓한 시간을 보낼 거라고 기대했건만, 사람들과 함께 어정쩡한 대화를 나누고, 결국 구석에서 혼자 맥주를 홀짝이다가 썸머가 남자친구에게 결혼 반지를 받은 걸 목격하게 된다. 반지가 끼워진 썸머의 손을 크게 잡은 장면을 보여주면서 'Hero'의 멜랑콜리한 무드도 극에 달한다.


Bookends Theme

SIMON & GARFUNKEL

톰이 찾아올 때마다 어린 동생 레이첼(클로이 모레츠)은 결정적인 조언을 던져준다. 그 마지막은 "그 여자가 오빠의 운명의 상대라는 건 그저 착각일 뿐이야. 좋아하는 것만 기억하는 것도 문제야. 나쁜 기억도 같이 떠올려봐." 톰은 그대로 한다. 물론 처음엔 좋은 기억부터 떠오른다. 그리고 문득 톰이 썸머에게 링고 스타의 레코드를 보여주지만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던 그 날 일이 자세히 생각난다. 초반의 내레이션에서 톰이 완전히 오해했다고 한 그 영화 <졸업>을 함께 보는데, 썸머는 오열하고 톰은 그런 썸머를 보며 어리둥절한다. 사랑에 대한 관점이 서로 완전히 다르다는 걸 보여주는 순간. 톰은 그 날을 천천히 곱씹고 나서야 썸머가 운명이 아닌 자기 삶을 되찾아간다. (지난번 영화음악감상실에서 소개한 <올모스트 페이머스> 속 조이 디샤넬의 신에서도 중요하게 쓰인 바 있는) 앨범 <Bookends>는 사이먼 앤 가펑클이 <졸업>의 주제가들을 내놓아 어마어마한 스타덤에 오른 이듬해에 발매됐다.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