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수 감독.

무더운 여름날 비말 차단을 막기 위해 가동되지 않는 극장 에어컨과 이에 항의하는 관객들, 문진표 작성을 거부하는 자칭 유명 감독(이희준), 공짜 음료를 주지 않는다고 투덜대는 저명한 평론가(전찬일)와 이들 모두의 짜증을 견뎌내는 극장 직원 찰스(김충길). 영화 <습도 다소 높음>은 마스크 속에 머무는 더운 입김 못지않은 답답하고 불쾌한 상황들을 통해 코로나 19로 위기에 빠진 영화계를 생생하게 재현한다.

고봉수 감독은 뚝딱뚝딱 영화를 잘도 찍어낸다. 2017년 장편 <델타 보이즈>를 들고나온 이후 단 한 해도 작품을 거른 적이 없다. 한 해에 한 편 제작도 어렵다는 영화판에서 말이다. 심지어 재미도 있다. 당면한 냉혹한 코로나 시대도 고봉수 감독의 창작욕은 멈출 수 없었다. 작년 잠시나마 코로나가 잠잠하던 시기를 틈타 또 뚝딱 <습도 다소 높음>이란 영화 한 편을 만들어 낸 고봉수 감독의 분투를 여기에 옮긴다.


코로나 시대에도 기민하게 움직여 영화를 만들어 냈다. 작품을 만든 계기를 듣고 싶다.

우리가 처음 겪는 일이 일어났고 다들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영화인으로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던 차에 지금까지 찍었던 영화들보다 더 웃기는 영화를 한번 찍어보자 생각하고 기획을 했다. 코미디 영화가 대중의 공감을 이끌어내려면 역으로 우리를 힘들게 하는 코로나를 소재로 가지고 와야겠더라.

습도가 다소 높은 정도가 아니라 후텁지근하고 땀이 차오를 정도의 답답함이 드러나더라. 에어컨이 가동되지 않는 극장 같은 단순한 경험을 넘어 코로나 시대의 영화계가 닥친 위협을 은유한 것 같기도 하더라.

맞다. 일차적으로 말하면 내 주변의 여러 가지 요소들을 가져다가 적극 활용하는 게 내가 만든 영화의 스타일이다. 코로나 시국이 되니 사람들이 극장보다 스트리밍 서비스를 많이 이용하더라. 만약 이렇게 되면 극장이 사라지지는 않을까 하는 위기감 같은 것들을 영화 속에 표현해 보고 싶었다.

코로나 상황에서 촬영하는 일도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의외로 힘들지는 않았다. 이희준 배우가 특별 출연했는데 스케줄이 딱 하루밖에 안 난다고 하셔서 그분 스케줄에 맞추다 보니 촬영 회차가 자연스럽게 줄어들게 됐다. 우리들끼리는 ‘코로나니까 이게 잘 된 거다’ ‘빠르게 찍어 끝내자’ 이렇게 4회차에 마무리했다.

<습도 다소 높음> 이희준.

이희준 배우의 참여가 눈에 띈다. 어떻게 합류하게 됐나.

<남산의 부장들>(2019) 촬영할 때 이병헌 배우가 <델타 보이즈>(2016)를 한번 보라고 소개해 줬고 영화를 재밌게 봤다고 했다. 그래서 막연하게 이 작품 만든 감독과 작업을 하면 어떨까 생각을 하셨고 또 현장도 궁금해 하셨다고 들었다. 마침 이희준 배우와 안면이 있는 신민재 배우가 고봉수 감독이 곧 영화를 찍는다고 했고, 코로나로 <보고타> 해외 촬영이 중단되어 한국에 나와 있으셔서 출연하게 됐다.

고봉수 감독의 현장은 애드리브, 임기응변이 많은 현장일 것 같다. 이희준 배우는 현장에서 어땠나.

이희준 배우는 참 치밀한 배우였다. 사전에 만나 이야기를 했을 때 잠깐 나오는 역할인데도 분석을 많이 하고 나오셨더라. 전화도 자주 주셨고, 여기서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물어봐 주시기도 하고. 현장에 처음에는 적응이 안 되셨던 것 같은데 빠르게 적응을 하시고 나중엔 그걸 즐기시더라. 촬영 마지막에 어떠셨냐고 물어봤는데 너무 재미있었고 신선했다고 하셨다.

또 출연하겠다는 말은 없었나.

궁금해하신다. 무슨 일을 꾸미고 있냐고. (웃음)

<습도 다소 높음> 전찬일.

능력에 비해 드높은 자기애를 가진 감독, 특권 의식에 젖은 평론가, 악덕 극장주 등 소위 기득권에 대한 노골적인 풍자가 통쾌하기도 했다. 이런 캐릭터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말을 인용하면 캐릭터가 자기 시나리오를 이끌어 간다고 한다. 내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웃음) 그렇지만 하다 보니까 그 말이 조금씩 이해가 가는 것 같다. 내 머릿속에 설계도가 다 그려져 있어야 하는 게 아니라, 하다 보면 이런 캐릭터도 저런 캐릭터도 나오고 하는 것 같다.

전찬일 평론가의 출연도 의외의 재미가 있었다. 실제 평론가로 활동하는 분이 본인의 직업으로 출연했다. 섭외 과정이 궁금하고, 자기애에 충실한 꼰대 역할인데 흔쾌히 역할을 수락했나.

전(찬일) 선생님과는 2년 전인가 GV에서 만나 그때부터 쭉 정기적으로 만나고 있다. 워낙 달변가셔서 나는 거의 말을 안 한다. (웃음) 그분이 다 말씀을 하신다. 듣고 있으면 연기를 하셔도 잘하겠다, 이런 확신이 생기더라. 이분을 꼭 한번 영화 속에 모시고 싶은데 어떤 게 있을까 하고 생각하다 아무래도 이번 작품이 극장 이야기고 영화 이야기니까 그냥 평론가 본인 캐릭터로 모시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고 모셨는데 역시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NG 한번 없으셨다.

실제 고봉수 감독의 아내가 영화에 등장했다.

아내가 뮤지컬을 전공했다.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연기를 잘하겠다는 생각이 늘 있었다. 뮤지컬과 영화가 그리 다르지 않으니 한번 해보자고 했는데 처음엔 안 하겠다고 하더라. 근데 막상 카메라 앞에 서니 참 잘하더라. (웃음)

코미디 영화에 주목하는 이유는 뭔가.

습작을 약 200여 편 정도 찍었기 때문에 장르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봤다. 내가 제일 잘하는 게 코미디더라. 관객들의 반응을 보면 알지 않나. 액션이나 스릴러 이런 것들보다는 코미디를 했을 때 반응이 더 좋더라. 어렸을 때 한 생각인데 코미디 쪽에서 한번 거장이 되어 보자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웃음)

소위 고봉수 사단이라 불리는 김충길, 신민재, 백승환, 차유미 배우와 이번에도 함께했다. 여전히 적재적소에서 빛나는 연기를 선보였다.

이번에도 정말 즐겁게 촬영을 했다. 확실히 오랫동안 함께 작업을 하다 보니까 내가 별말 하지 않아도 이제 그냥 이분들이 알아서 찾아가는 게 있는 것 같다. 예전에 감독님들이 그러시더라. 영화를 만들다 보면 영화 작업 후반에는 감독이 연출하는 게 아니라 배우가 그 영화를 만들어 가는 거라고. 이제 그런 경지까지 간 것 같다. (웃음)

(왼쪽부터) 백승환, 김충길.

이들과의 첫 만남이 궁금하다.

지인을 통해 백승환 배우를 제일 먼저 만났다. 백승환 배우와 단편을 한 편 찍었는데 연기력도 좋고 인상도 참 좋더라. 그리고 또 이렇게 미남 배우랑 작업을 해본 적도 없었는데 그런 것도 너무 고맙고. (일동 웃음) 키도 크고 스타일도 좋다. (웃음) 제 현장이란 곳이 워낙에 스태프가 없는 영세한 촬영장인데 백승환 배우가 늘 옆에서 도와주셨다. 감독님 내가 뭐 할 거 있냐고 얘기도 해주시고. 후에 백승환 배우가 함께 작업하고 싶은 배우가 있다고 제안을 주셨는데 그때 모시고 온 배우분들이 바로 신민재, 김충길 배우였다. 그렇게 점점 인연을 넓혀갔던 거다.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가 있을까.

어렸을 때부터 영화를 좋아했다. 영화 마니아들을 보면 언젠가 나도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나도 그런 사람이었다.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의 <엘 마리아치>(1992)라는 영화를 보고 마침 그때 <엘 마리아치> 제작기 책을 또 보게 됐다. 단 7천 달러로 제작을 했더라. 그걸 보는데 막 용기가 났다. 나도 만들 수 있겠다. 이런 용기.

고봉수 감독의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늘 열심이다. 그게 꼭 성공을 보장하지 않더라도. 그런데 매번 관객들은 희망과 위안을 얻는 것 같다.

내 이야기와 내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 영화에 투영되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같다. 주변에 그런 분들이 많이 계셔서. (웃음)

본인도 열심히 해야 직성이 풀리는 편인가.

무엇이든 다 성실하게 열심히 하는 스타일이기 보다는 그냥 어떤 일이 있으면 그걸 그냥 놔두지는 못하는 편이다. 사람들이 저에게 작업 속도가 빠르다고 말씀하시는데 속도가 빠른 게 아니라 하루에 소화하는 작업량이 많은 거다. 예를 들어 편집 거리를 놔두고 있으면 이게 무슨 병인 것 같은데 이게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거다. 이게 다 디지털로 넘어오면서 생긴 병인 것 같다. 전엔 다 찍은 6mm 테이프를 빼서 보관해 놓으면 되었다면 지금은 이 작은 메모리칩에 오늘 찍은 것이 들어가 있다는 것 이걸 못 믿는 거다. (웃음) 그래서 <튼튼이의 모험>(2018)을 찍을 때도 매일 숙소에 들어가서 그날 찍은 것 편집하며 작업을 했다.

개봉을 기다리는 작품들이 많다. <습도 다소 높음> 이후 선보일 작품은 무엇인가.

지금 배급사와 협의를 하고 있는데 아직 구체적인 계획을 말할 단계는 아니다.

충분한 시간과 자본이 허락한다면 꼭 해보고 싶은 장르나 작품, 함께 일하고 싶은 배우가 있을까.

하고 싶은 이야기나 장르보다도. 정말 하고 싶은 행동은 있다. 촬영장에서 모니터를 보고 싶다. 앉아서. (웃음) 내가 촬영을 하니까 그럴 기회가 없었다. 촬영 감독님들이 작업하시는 것을 보면 포커스를 너무 잘 맞추시는 거다. 나는 이게 너무 힘든데. (일동 웃음) 제가 촬영하다가 포커스를 놓치면 그날은 너무 기분이 안 좋았다. 그래서 프로페셔널한 분들과 같이 일하는 모습을 상상해봤다. 그리고, 함께 작업하고 싶은 배우는 정말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생각인데 구교환 배우다. 전부터 워낙 팬이었고 전에 시상식 이런 데서 잠깐 뵙기는 했는데 그때는 말씀도 잘 못 나누곤 했었다.


글 · 씨네플레이 심규한 기자

사진 · 백지수표(주)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