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블은 MCU 페이즈 4를 시작하며 대거 이탈한 캐릭터들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기존 작품들의 속편들과 함께 새로운 작품들을 차례대로 론칭한다. 진즉에 나왔어야 할 <블랙 위도우>는 예외로 치더라도,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과 이번에 개봉한 <이터널스>, 그리고 페이즈 4의 대미를 장식할 <판타스틱 4>까지 그간 MCU에 편입되지 않았던 작품들로 외견을 넓혀 ‘인피니티 사가’ 에 이어 새로운 대단원을 구축하려 한다. 이런 점에서 페이즈 4의 작품들은 여러모로 이전의 페이즈 1 때의 분위기를 떠올리게 하는데, 그중에서도 많은 떡밥들을 내포하고 있는 MCU 25번째 작품인 <이터널스>는 꽤 중요한 포석이 될 듯싶다. 국내에선 ‘위드 코로나’의 수혜를 입어 첫 주말에 161만 명을 동원하는 괴력을 발휘했고, 전 세계적으로도 <분노의 질주: 더 얼티메이텀>에 이어 첫 주 흥행 2위라는 호성적을 올리며 순항을 시작했다.
신도 인간도 아닌 중간자에 속하는 이터널스 관점으로 풀어낸 이 마블의 거시사는 색다른 시선과 화두를 제공하며 세계관의 확장을 불러온다. 10명이나 되는 캐릭터에, 고전적인 신화들을 연상케 하는 설정과 시공간을 오가는 입체적인 구성으로 일반적인 영웅서사와는 다른 결을 지녀 무엇보다 연출자의 역량과 감성이 중요했는데, <내 형제가 가르쳐 준 노래>, <로데오 카우보이> 등으로 드라마와 캐릭터에 강점을 보인 클로이 자오를 낙점해 MCU 최초의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자이자 오스카 감독상을 거머쥔 동양계 여성 감독이 연출하는 영광을 누리게 됐다. 기원전 5000년 메소포타미아 문명부터 시작해, 기원전 500년 고대 바빌론과 서기 400년대 굽타 제국 그리고 1500년대 아즈텍 제국을 거쳐 현재까지 장대한 인류의 역사를 스케치하며 다양한 풍광의 로케이션과 대규모 세트가 동원돼 시각적 만족감을 선사한다.
MCU를 열었던 영화음악가 라민 자와디의 컴백
캐스팅에서도 그간의 정형화된 스타 시스템에서 벗어나 마동석이나 젬마 찬 같은 동양권 배우들과 파키스탄계 코미디언이자 작가인 쿠마일 난지아니, 실제 청각장애 배우 로런 리들로프와 장르물에서 두각을 나타난 아역 리아 맥휴, 굵직한 작품을 거친 흑인 배우 브라이언 타이라 헨리, 영국 출신 배우 리처드 매든과 신예 배리 케오간 그리고 할리우드 구력이 쟁쟁한 셀마 헤이엑과 안젤리나 졸리까지 어우르며 다양성을 추구해 이상적인 조합을 꾸렸다. 여기에 여러 편의 MCU에 참여한 베테랑 벤 데이비스가 촬영을, 4번이나 오스카 후보에 오른 이브 스튜어트가 미술을, 인디와 영화와 블록버스터를 오가는 딜런 티케노와 크레이그 우드가 편집을 맡아 처음 할리우드 메이저 대작을 지휘하는 클로이 자오를 뒷받침해 준다. 그리고 음악에는 <아이언맨>으로 2008년 MCU의 첫 포문을 열었던 라민 자와디가 오랜만에 다시 MCU에 복귀한다.
13년 전 마블은 아직 디즈니 산하의 스튜디오가 아니었다. <아이언맨>은 한물간 약쟁이 배우(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를 기용해 끝없이 수정되는 각본으로 성공할지 실패할지 모를 도박에 가까운 시도였다. 라민 자와디 역시 한스 짐머 휘하에서 이제 막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할리우드 데뷔를 한 신참내기 작곡가에 불과했다. 더욱이 <아이언맨>은 존 파브르 감독의 단골 작곡가 존 데브니가 참여하지 못하게 되자 어부지리로 차지한 거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작품은 폭발적인 성공을 거뒀고, 그렇게 24편이나 이어진 MCU는 21세기 영화사를 바꿔놨으며, 마블 스튜디오는 그 중심에 우뚝 섰다. 라민 자와디도 <아이언맨>에 이어 여러 작품들이 연이어 성공하며 영화음악가로서 포텐을 터트렸다. 그런 점에서 이번 <이터널스>는 서로에게 기분 좋은 재회로 다가올 듯하다. 아니 그래서 마블이 라민 자와디를 다시 택한 건지 모른다.
<왕좌의 게임> 작곡가, 오르간을 활용하다
이란계 독일 출신으로 1998년 버클리 음대를 졸업한 라민 자와디는 한스 짐머 눈에 띄어 리모트 컨트롤 프로덕션에 들어가 클라우스 바델트의 보조 작곡가로 활동하며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음악은 물론 스릴러나 호러 등 장르물에서 전형적인 짐머레스크 사운드를 구사하는 문하생 중 하나였지만, 2005년 선풍적인 인기를 끈 <프리즌 브레이크>를 시작으로 <플래시포워드>와 <퍼슨 오브 인터레스트> 등 TV 시리즈에서 히트작을 배출하며 자신만의 색채를 갖는다. 여기에 방점을 찍은 게 바로 ‘윈터 이즈 커밍’을 알린 HBO의 대서사시 <왕좌의 게임>이다. 중세 유럽을 고스란히 되살린 것 같은 스펙터클한 판타지 스코어는 단숨에 그를 주목할 만한 작곡가로 띄우며 <퍼시픽 림>, <워크래프트: 전쟁의 서막>, <그레이트 월> 등 각종 블록버스터와 <웨스트월드>, <잭 라이언> 같은 대작 시리즈에 탑승하게 만들었다.
이번 <이터널스>에서도 여실히 그 솜씨를 확인할 수 있는데, 약 7천 년이란 유구한 세월을 오가는 스케일을 부각시키기 위해 라민 자와디는 파이프 오르간을 선택했다. 악기 자체가 하나의 오케스트라라고 표현될 만큼 다채롭고 웅장한 사운드를 선사하는 터라 그 스케일을 가져와 이터널스가 견뎌야 했던 세월의 깊이와 무게감을 표현하려 한다. 이미 한스 짐머가 <인터스텔라>에서 압도적인 우주적 크기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바 있지만, 라민 자와디는 그렇게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미니멀하면서 신비스러운 프레이즈로 배경에 깔아두며 영겁의 세월을 인간들 속에서 스쳐 지나듯 견지해야 했던 이터널스라는 불멸의 존재를 상징하듯 활용했다. 일렉트릭 사운드와 점층적인 오케스트레이션이 장중하게 몰아치며 만들어내는 영웅적인 테마는 퍽 인상적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영화 내에서는 분절되고 변주돼 존재감을 살리지 못한다.
액션보다 드라마에 치중한 휴머니즘 사운드
이는 <엑스맨>이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시리즈와 달리 <이터널스>가 인간사에 적극적인 개입을 꺼리고, 중후반까지 운명에 맞서 개진하려는 움직임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처럼 들리기도 한다. 대신 인간들에게 사랑에 빠진 이터널스들을 표현하기 위해 자와디는 적극적으로 인간 목소리를 두텁게 깔았다. 남녀 합창단들이 들려주는 허밍은 감동적이고 아름답게 울려 퍼지며 신화를 비튼 이야기 속에 휴머니즘 색채를 짙게 품는다. 이는 클로이 자오가 이전작들에서 보여주던 이방인적이고 타자화된 시선과 이터널스의 위치와 절묘하게 겹쳐지며 단순한 슈퍼히어로 액션물로 비치길 거부한다. 아울러 과거 여러 문명을 거치며 이터널스가 자연스레 동화되는 과정들이 플래시백으로 설명될 때 흐르는 테마들은 <왕좌의 게임>과 <워크래프트: 전쟁의 서막>, <그레이트 월> 등을 거치며 이국적이고 토착화된 서사시들을 그려낸 노하우가 발휘된 솜씨로, MCU에서 보기 드문 에픽 사운드의 묘미를 선사한다.
적재적소에 깔린 삽입곡들로 웃음과 감동을 선사할 줄 아는 MCU 영화답게 <이터널스>에서도 효과적인 노래들이 마음을 움직이게 만든다. 유랑자며 코스모폴리탄으로 살아온 클로이 자오의 음악 취향이 적극 반영된 다양한 삽입곡들의 향연은 인상적이다. 과거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마블 로고가 뜨며 현재로 넘어오는 오프닝에 깔리는 건 그 유명한 핑크 플로이드의 ‘타임’(Time)이다. 8집 앨범 <더 다크 사이드 오브 더 문>의 수록곡으로 이보다 더 명징하게 이터널스를 묘사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의미심장한 선곡이었다. 런던 술집에선 1960~1970년대 락과 소울 세례를 받은 블랙 조 루이스 앤 더 허니베어스의 ‘슈가풋’(Sugarfoot)이 흐르고 곧이어 제임스 브라운을 떠올릴 법한 소울 충만한 리키 칼로웨이와 더 댑 킹스의 ‘스테이 인 더 그루브 파트1’(Stay In The Groove Pt. 1)이 들릴 듯 말 듯 이어진다.
작품을 관통하는 테마 BTS의 ‘친구’와 적재적소의 삽입곡들
사무라이 캐릭터에서 발리우드 스타로 변모한 킨고를 위해 특유의 댄스 시퀀스를 보여주는데 여기에 흐르는 노래는 셀리나 샤르마가 부르는 발리우드 풍 팝 ‘나흐 메라 히어로’(Nach Mera Hero)다. 힌디어 곡이 아닌 영어로 된 노래가 나왔다며 잠깐 논란이 되기도 했지만 셀리나는 할리우드가 발리우드가 만나는 걸 원했다며 개의치 않은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킨고의 전용기를 타고 길가메시를 만나러 가는 장면에서 아주 익숙한 한국어 가사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바로 BTS의 ‘친구’다. 2020년 발표된 방탄소년단 정규 4집 수록곡으로 <블랙 팬서>에서 싸이의 ‘행오버’가 흘러나온 이후 두 번째로 마블 영화에 삽입된 한국 노래다. 길가메시의 집에서 흐르는 두 곡도 흥미롭다. 처음 문을 열고 등장할 땐 컨트리의 전설 멀 해거드의 ‘마마 타이어드’(Mama Tried)가, 유쾌한 회식 장면에선 로커빌리 사운드의 결정판이라 할, 비틀즈도 연주했던 칼 퍼킨스의 ‘렌드 미 유어 컴’(Lend Me Your Comb)이 이어진다.
드루이그를 설득하러 아마존 강당에 이터널스들이 모였을 때 갑자기 울려 퍼진 세르시의 핸드폰 벨 소리는 2020년 가장 핫했던 가수 중에 한 명인 리조의 ‘주스’(Juice)다. 그러나 영화에서 쓰인 곡 중 가장 잘 알려진 노래라 한다면 예고편에서도 쓰였고, 올드 팝으로 방송에도 잘 나오는 스키터 데이비스의 ‘더 엔드 오브 더 월드’(The End of the World)가 아닐까. 빌보드 핫 100 2위까지 올랐던 곡으로, 파스토스가 아들을 침대에 누이고 작별 인사를 고하며 우주선 도모를 찾으러 갈 때까지 흐른다. 마카리가 있던 우주선 도모 내부에서는 시간이 정체된 듯 대중음악이 아닌 바흐의 클래식들이 편곡돼 흘러나온다. ‘J 전주곡 G장조, BMV 902, No. 1A’와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제5번 D장조 2악장 아페투오소’가 아이러니하게 그들의 반목과 대립을 고조시키고 상처를 키운다. 그리고 첫 번째 쿠키 뒤 엔딩 크레딧이 오르며 1977년 록 밴드 포리너가 부른 ‘필스 라이크 더 퍼스트 타임’(Feels Like the First Time)이 엔딩을 장식한다. 쿠키 영상의 그 분을 위한 기가 막힌 선곡이다!
사운드트랙스 영화음악 애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