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소녀가 양팔로 고양이 두 마리를 껴안은 채 걷는다. 등에 몸집만한 개를 둘러업은 중년 여성도 보인다. 그들은 가까운 공원으로 산책을 나온 것이 아니다. 집과 일터를 뒤로하고 국경을 넘는 중이다. 러시아의 침공으로 민간인 사상자 수가 연일 증가하는 가운데, 우크라이나인은 대대적 공습을 피해 피난길에 나섰다. 인접국 루마니아, 폴란드, 헝가리, 슬로바키아는 위기 상황을 고려하여 외국인의 반려동물 반입 규정을 면제 또는 완화하고, 피난민과 반려동물 모두에게 국경을 개방했다. 반려동물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이유로, 탈출을 단념한 이들도 적지 않다. 일상은 무너졌고 시시각각 불안에 떨지만, 이들 또한 현재 반려동물과 함께 대피소에 머물며 지낸다.

한편, 홀로 남겨진 동물도 숱하게 많다. 아무도 없는 집 마당에서 우짖는 검은 개, 전신에 화상을 입고 절뚝거리는 고양이, 축사에서 달아나지 못한 채 불에 타죽은 소. 동해안 일대를 휩쓴 이번 산불은 장장 213시간 43분 동안 이어졌다. 인명 피해는 없었으나, 수많은 생명이 목숨을 잃었다. 안내견을 제외한 동물은 동행할 수 없다는 재난 대피소 지침에 따라, 거처를 옮기지 못한 가축과 반려동물은 화마에 그대로 노출됐다. 삼림은 2만 헥타르 가까이 소실됐고, 그곳을 터전 삼아 살아가던 야생동물의 피해 규모는 집계조차 불가능하다. 전쟁과 산불이라는 재난 상황에서, 우크라이나와 한국에서 비인간 동물의 생존 양상은 이처럼 극명하게 나뉘었다. 재난의 참혹함이나 긴박함과는 별개로, 인간이 내린 선택과 사회가 마련한 제도에 의한 결과였다.

<고양이들의 아파트>는 아파트 재건축이라는 또 다른 재난을 기록한다. <고양이를 부탁해>(2001)로 데뷔한 후, <말하는 건축가>(2012) <말하는 건축 시티: 홀>(2014) <아파트 생태계>(2017)로 ‘건축 3부작’ 다큐멘터리를 선보인 정재은 감독의 신작. 극영화와 다큐멘터리를 오가며 도시와 공간에 밀도 높은 관심을 표현했던 그는, 이번 작품에서 “한때 아시아 최대 대단지였다는 자부심”을 간직한 둔촌주공아파트의 마지막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주민들은 단지 과거의 영광에만 기대어 아파트를 아끼는 것은 아니다. 6000세대가 30년간 거주했던 이곳에는 다양한 삶의 경험이 축적되어 있고, 우연히 만나면 안부를 묻는 이웃이 있다. 둔촌주공아파트에 사는 약 250여 마리의 고양이도 그 이웃 중 하나다.

영화는 고양이를 따라간다. 그저 고양이의 행동반경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고양이의 시각과 입장을 애써 짐작해보기로 한다. 오프닝은 그러한 결정을 암시하는 예다. 하늘에서 거대한 아파트 전경을 훑고 나면, 카메라는 곧장 땅으로 내려간다. 녹음이 우거진 단지에 이삿짐 트럭이 등장하고, 평소와는 다른 기계 소음이 이어진다. 화단에 웅크렸던 고양이들은 놀란 듯 몸을 일으키고서 연신 아파트를 올려다본다. 사람들은 각자 이익을 챙겨 뿔뿔이 흩어지고, 건물은 이내 무너져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고양이의 시각과 입장에서 바라보면, 재개발은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변화다. 즐겨 눕는 자리를 낯선 물체에 빼앗기는 불편이고, 몸을 맞댄 땅이 일순 흔들리는 공포다. 그렇게 영화는 고양이에 집중함으로써, 철거를 앞둔 아파트를 재난의 공간으로 인식한다.

고양이를 돌보는 사람의 마음도 편치 않다. 그들 자신이 알고 지내는 대상이 생명을 위협받는 상황에 부닥쳐서다. “길고양이가 아닌 거예요.” 활동가 김포도는 아파트 단지에 거주하는 고양이의 영양 상태와 사람을 꺼리지 않는 태도에 놀랐다고 전한다. 주민들은 10년 넘게 고양이를 보살펴 왔다. 생김과 성격의 특징을 파악하여 이름을 붙이고, ‘밥자리’를 만들어 물과 사료를 제공했다. ‘길고양이’가 아닌 ‘우리 동네 고양이’가 사는 곳, 둔촌주공아파트는 “고양이 헤븐(heaven)”이라고 불릴만했다. 재개발은 인간의 이익을 좇는 사업이지만, 인간 낙원을 건설하는 일은 곧 고양이 낙원의 파괴를 의미했다. 결국 아파트 ‘캣맘’과 활동가 및 전문가 등이 모여 ‘둔촌냥이’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이들은 예상 가능한 피해에 앞서 대책을 강구하고자 한다. 목표는 동네 고양이들의 안전한 이주다.

사람과 이웃하는 고양이, 그들의 행복한 삶을 위해 발 벗고 나선 사람들. 언뜻 동화 같은 이야기다. 그러나 여느 재난 현장이 그러하듯, 둔촌주공아파트에도 갈등이 불거진다. 공익 활동에 사적 감정이 개입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활동가 개인이 감당해야 할 몫이 늘어난다. 누군가는 답답하고 애타는 심정을 호소하는가 하면, 다른 누군가는 피로에 지쳐 말을 잃는다. 이때 <고양이들의 아파트>는 그 사이로 들어가 격론의 자초지종을 파악하는 대신, 설명을 생략한 채 간격을 유지한다. 갈등을 피하거나 봉합하려는 의도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영화는 충돌하는 의견을 하나로 그러모으지 않으려 조심하는 것처럼 보인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통일된 결론이란, 과한 욕심이나 환상에 가깝지 않느냐고 주장하는 듯하다.

해 질 녘 아파트에 여자들의 목소리가 길게 울려 퍼진다. “단비야, 나래야, 산이야.” 호명된 대상은 며칠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고양이들인데, 주차장에 맴도는 음성은 흡사 아이의 귀가를 재촉하는 엄마의 부름처럼 들린다. ‘캣맘’이라는 용어가 대변하듯 영화에서 기꺼이 돌봄을 자처하는 인물 대부분은 여성이며, 이들은 자신을 엄마와 언니, 누나라고 칭한다. 활동가 이인규는 “엄청난 재난 속에서 피어나는 모정”이라고 가리키면서도 “전시에 모정만으로 버티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모정이 대단하다는 이야기로 가면, 엄마들만 계속해서 희생하고 몸 바쳐서 뭔가를 구해내고 그렇게 되는 거잖아요”라고 지적한다. 둔촌주공아파트에 재난이 닥쳤을 때, 인간은 선택했다. “우리라면 조금 다르게, 좀 더 고양이를 위해서 좋은 방향의 방법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제도적 뒷받침은 미미했고 대안을 마련하는 일은 민간 영역에, ‘엄마들’에게 떠넘겨졌다. 적절히 응원 받거나 보상받지 못한 애정이 억울함으로 돌아오는 것은 당연했다.

영화는 사람을 다그치지도, 연민하지도 않는다. 고양이를 마냥 아름답고 기묘한 대상으로 미화하거나 감동을 전달하는 매개로 사용하지 않는 것처럼, 인물 또한 영웅으로 묘사하려 들지 않는다. 그들은 고전한다. 완벽한 결과를 내놓을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하고, 고양이의 재난을 자신의 고통과 일치시킬 때 피어오르는 이기심과 죄책감을 고백한다. 다만, 영화 속 인물들은 포기할 순 없다고 말한다. 고양이와 인간 중 누가 더 많은 힘과 정보를 가졌는지 묻고,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누구에게 여러 갈래로 뻗어 있는지 되새겨서다. 영화 중반부, 아파트에 살던 고양이 예냥이가 한 가족에게 입양된다. 다음 장면에서 카메라는 아파트 단지로 돌아가 나무를 응시한다. 밑동이 뽑힌 채 트럭에 실려 가는 나무는 낯선 집에서 우왕좌왕하는 예냥이와 얼핏 겹쳐 보인다. 아파트가 무너지고 땅이 파헤쳐진 후에도 그 장면은 계속해서 물음을 던진다. 고양이와 나무는 이제 어느 곳에, 또 어떻게 뿌리를 내리고 살아갈 것인가. 나 아닌 다른 존재를 위해 행동하는 일은 무엇으로부터 시작하며, 어떻게 지속 가능한가. <고양이들의 아파트>는 소멸된 공간의 기록이자, 폐허에 남겨진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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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한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