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만 해도 황량한 뻘밭에 불과했던 파주는 이제 그리 멀지도, 낯설지도 않은 곳이다. 다양한 분야의 창작자와 예술가가 모여 사는 헤이리 마을엔 유명 맛집과 카페가 즐비하고, 근처엔 대규모 아울렛도 여러 개 입점해 있다. 그중에서도 파주출판도시는 파주를 구성하고 상징하는 대표 지역이다. 합정역에서 버스를 타면 20여분 만에 도착하는 작은 도시. 이곳에 들어서면, 개성 넘치면서도 주변 경관을 훼손하지 않는 정갈한 출판사 건물이 먼저 눈에 띈다. 환하게 트인 하늘, 계절마다 다른 풍경을 선사하는 산과 습지는 “책, 사람, 문화와 자연이 어울려 숨 쉬는 곳”이라는 파주출판도시의 슬로건을 실감하게 한다. 지난 30년 동안 파주는 변화를 거듭했다. 즐길 거리가 풍성해지면서 당일치기 여행지로 사랑받는 근교가 됐고, 어린이와 청소년에게는 다양한 문화 활동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학습의 장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배경에는 파주를 삶과 꿈, 그리고 일의 터전으로 선택한 이들이 있다.

<위대한 계약: 파주, 책, 도시>는 기획부터 유통에 이르기까지 출판의 전 과정을 소화하는 파주출판도시의 역사를 다룬다. 1980년대 군사정권 시절, 출판계는 불온한 사상을 전파하는 그룹으로 치부됐고, 출판은 산업으로도 예술로도 인정받지 못하는 영역에 머물렀다. 자연스레 출판인들은 검열에서 벗어나 출판의 자유를 획득하는 동시에, 출판이 새로운 문화산업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구조적 기반을 갖추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산악회를 중심으로 느슨하게 형성된 출판인 네트워크는 출판계 공동행동을 진행하며 점차 논의를 심화해갔다. 이들은 “글의 집”, 즉 책을 위한 도시를 건설하자는 구체적 목표를 세웠다. “번듯한 공간에서 책을 만들어보고 싶었던 거예요.” 출판인들은 해외로 떠나 본보기 삼을만한 사례를 수집하고, 국내 곳곳을 돌며 땅을 보러 다녔다. 협동조합을 꾸려 출자금을 마련한 후에는 한국토지주택공사를 비롯해 각종 정부 부처를 설득하려 애썼다.

시간이 지날 때마다 땅값이 치솟는 상황에서 경기도의 “물구덩이 땅” 파주가 출판도시라는 이상을 실현할 지역으로 낙점됐다. 역사상 유례없는 프로젝트에 뛰어든 출판인들에게 동시대 건축가들은 가장 든든하고 중요한 동료였다. 현재 한국을 대표하는 중견 건축가로 자리매김한 승효상, 김영준, 고 정기용 등을 포함해서, 국내외 여러 건축가가 뜻과 힘을 더했다. 이들은 출판인들과 인문학적 가치관을 공유했으며, 건축이 나아갈 방향을 새롭게 설정하고 실험하고자 했다. <위대한 계약: 파주, 책, 도시>는 파주출판도시가 건축 초기 단계부터 분명한 미학적 가치를 확립했던 곳임을 명시한다. 건축가 플로리안 베이겔은 인터뷰에서 “풍경으로서의 건축”을 지향하는 본인의 아이디어가 파주출판도시와 어떻게 융화됐는지 설명한다. 그가 “공간 사이”라고 부르는 개념은 한국에서 비움과 여백으로 이해됐고, 이는 건설 과정에서 주변 습지와 갈대 샛강을 보존하려는 파주출판도시 사업협동조합 이기웅 이사장의 목표와도 일치했다.

영화는 한 도시가 탄생하는 과정에서 어떤 절차와 고비를 거쳤는지 성실하게 정리한다. 신문 기사, 사진, 문서, 영상 등 다양한 기록 자료를 활용하며, 사업에 참여한 인물들을 인터뷰한 분량도 상당하다. 카메라 앞에 앉은 건축주와 건축가는 파주출판도시 설립이 일종의 운동이었다고 밝힌다. 이들은 존중과 신뢰를 바탕으로 ‘위대한 계약’을 맺고, 10년 가까이 동행을 지속했다. 계약서보다는 선언문에 가깝다고 자평할 만큼, 계약은 물질적 수치가 아닌 실천적 의의를 우선으로 이뤄졌다. 건축가는 참다워야 하고 건축주는 좋은 건축주가 되려 노력해야 한다는 기조 아래, 이들은 직업인의 소임과 역사적 소명에 충실할 것을 약속했다. 건축가 김영준은 공동의 가치를 세우고 지켜나갔던 시간을 회고하며, 파주출판도시를 “집합된 의지가 모여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가는 사례”라고 정의한다. 위대하기는커녕 ‘위험한 계약’이 될지 모른다며 우려하는 이가 적지 않았으나, 참여 주체의 믿음과 열정은 건재했다.

<위대한 계약: 파주, 책, 도시>는 동료이자 부부인 김종신, 정다운의 세 번째 공동 연출작이다. <한국 현대건축의 오늘: 집>(2016), <이타미 준의 바다>(2019)와 마찬가지로 건축을 중심에 놓지만, 전작과 달리 특정 인물을 따라가기보다는 도시 설립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에 초점을 맞춘다. 영화는 거버넌스를 구축해나간 여정과 성과를 조명하는 데 주력함과 더불어, 현재 파주출판도시가 마주한 과제 또한 솔직하게 담아낸다. 위대한 계약을 성사시켰던 자신감은 일면 “낙관주의”로 흘렀고, 설립 이후 도시는 공간 배치와 건축 규모의 비합리성, 주차 공간의 부재와 같은 문제점을 드러냈다. 특히 디지털 시대로 접어들며 출판 산업이 위축되는 상황은 도시 존속에 현실적 의문을 제기했다. 끊임없이 고민하고 대안을 마련해나가는 이들 곁에서, 영화는 도시의 역동을 비춘다. 위기에 맞서는 과정에서 출판인은 파주를 산업단지로 국한하는 시선에 저항하며, 출판도시를 문화예술의 허브로 확장하겠다는 새로운 꿈을 꾼다. 이들이 “각박하지 않은 세상, 인간 냄새 물씬 나는 공동체”를 꾸려보고자 하는 마음을 고백할 때, 영화에는 파주출판도시를 지탱하는 원동력이 무엇인지 또렷하게 새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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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한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