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를 살짝 덮는 앞머리와 대충 손질한 단발, 그리고 뿔테 안경. <오마주> 속 지완(이정은)은 감독 신수원과 꼭 빼닮은 모습이다. 지완 또한 감독이다. 끈질기게 영화를 찍긴 했지만, 흥행에 성공한 적은 한 번도 없다. 피디 세영(고서희)은 부러움 섞인 눈길로 ‘천만 영화’를 가리키는데, 지완은 기가 죽기는커녕 심드렁한 눈치다. 지완에게 천만이라는 숫자는 비현실이다.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서, 욕심조차 나지 않는다. 최근 세 번째 영화 <유령 인간>을 개봉한 지완의 바람은 천만도 백만도 아닌, 이십만. 하지만 아들 보람(탕준상)의 말마따나 영화의 운명은 제목을 따라가는지, <유령 인간>은 아무도 찾지 않는 ‘유령 영화’가 되어버린다. 이처럼 <오마주>는 신랄하리만치 솔직한 자기 고백으로 문을 연다. 자전적 이야기라는 사실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태도 덕분에, 극 중 인물과 상황은 재빨리 생동감을 얻는다.
그러고 보면 지완이라는 이름도 낯설지 않다. 신수원 감독의 데뷔작이자, 늦깎이 감독 지망생의 분투를 담은 <레인보우>(2010) 주인공 이름 역시 지완이다. “어느 날 우연히 잡게 된 카메라가 내 인생을 바꿔 놓”은 후로 10년이 흘렀고, 당연히 지완도 그만큼 나이를 먹었다. 다만, 지완을 둘러싼 현실에는 큰 변화가 없다. 멀쩡히 다니던 회사를 관두고서 죽어라 시나리오를 쓸 때와 마찬가지로, 세 편의 영화를 만든 다음에도 기회는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집안 형편은 여전히 빠듯하며, 가족으로부터 돌아오는 평가도 줄곧 야박하다. 위기에 처한 지완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연민과 자조가 섞여 있다. 아들은 이따금 뼈아픈 핀잔을 던진다. “내가 봐도 재미없더라. 그러니까 엄마도 재밌는 것 좀 찍어 봐.” 영화는 일터에서든 가정에서든 온전히 인정받지 못하는 중년 여성의 고충을 들여다보는 일에 집중하면서도, 이를 지나치게 과장하지 않음으로써 유머가 끼어들 여유를 만들어낸다.
지완은 점점 시나리오 쓰기에 두려움을 느낀다. ‘되’와 ‘돼’가 헷갈리기 시작하자,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남편 상우(권해효)는 “영화를 10년 했으면 그 정도는 벌어야 하는 거 아니야?”라며 생활비를 주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설상가상으로 영화사에서는 자리를 비우라고 통보한다. 사무실 짐을 정리하던 지완은 예전에 받은 금빛 트로피를 미심쩍게 쳐다본다. 영광은 짧고 인생은 길며, 영화는 그때나 지금이나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 지완은 트로피 겉면을 손톱으로 긁다가, 이내 자신의 궁색함에 한숨을 내쉬고 만다. 때마침 전화를 건 후배가 “페이는 세지 않은데, 의미 있는 일”이라며 아르바이트를 제안한다. 말로는 돈 되고 의미 없는 일은 없냐 반문하지만, 결국 지완은 그 일을 맡는다. 국내 최초 여성 영화감독이라 불리는 박남옥에 이어, 두 번째로 감독 데뷔한 여성 홍재원의 <여판사> 더빙 작업이다.
홍재원은 실제 1960년대 활동했던 감독 홍은원을 모티브로 삼는 인물이다. 홍은원은 <유정무정>(신경균, 1959) 각본을 집필하며 국내 최초 여성 시나리오 작가가 됐고, “여자가 영화 하기 힘든 시절”에 첫 작품 <여판사>를 포함하여 세 편의 영화를 남겼다. <여판사>는 국내 최초 여성 판사라고 불리는 실존 인물 황윤석의 일대기를 다룬 작품으로, 최근에야 필름이 발견되며 복원 작업이 이뤄졌다. 이러한 현실적 맥락을 토대로, <오마주>는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을 교차한다. ‘최초’라는 수식에 반색하기보다는, 개척자가 될 수밖에 없던 당대 여성의 현실과 그들 삶에 자리했던 그늘을 보듬으려는 태도가 돋보인다. 복원 관계자는 지완에게 <여판사>를 둘러싼 소문을 들려준다. 영화와는 달리, 실제 황윤석은 남편에게 살해당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이야기다. 사운드가 유실된 영화를 보며, 지완은 묻는다. “근데 정말 남편한테 독살당한 거 맞을까요?” 이때 지완은 죽음에 얽힌 혐의를 부정한다기보다는, 한 여성의 죽음이 그토록 단순하게 요약될 수는 없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지완이 생각하기에 여자가, 특히 “꿈꾸는 여자”가 죽음에 다다르는 이유는 수없이 많다. 이상과 현실은 멀찍이 떨어져 있고, 간극은 쉬이 좁혀지지 않는다. 부당한 대우가 거듭될수록, 모멸감과 우울은 강도를 높여간다. 영화는 수영장 한가운데서 곤경에 처한 지완의 얼굴을 비춘다. 남들은 빠르게 헤엄쳐 가는데, 물속에서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도 지완은 내내 제자리걸음이다. 홍재원도 그랬다. 10년 동안 스크립터로 일했지만, 제 작품을 만들 길은 요원했다. <여판사>는 감독이 될 마지막 기회였다. 지완은 이제 홍재원의 흔적을 찾아 헤맨다. 그의 딸을 만나고, 그가 죽기 직전까지 새로운 시나리오를 쓰려 했다는 사실을 전해 듣는다. 홍재원이 생전에 자주 방문했다는 다방에 앉아서 옛 풍경을 상상하고, 감독의 친구이자 동료인 편집 기사 옥희(이주실)의 회고를 통해 홍재원이 겪었을 시간을 짐작한다. 부지런히 움직이는 동안, 지완은 홍재원과 <여판사>에 조금씩 가까워진다. 창고 깊숙이 잠들어 있던 <여판사> 대본을 펼쳐보는가 하면,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유실 필름을 발견해내기도 한다.
그렇게 영화를 채워가는 과정에서 지완은 종종 유령을 본다. 흑백 사진 속 홍재원을 연상시키는, 모자를 쓴 여성의 검은 그림자다. 이는 지완에게만 보이는 “유령 인간”이자, 지완에 앞서 존재했던 또 다른 지완이다. 지완이 필름을 들고 달려왔을 때, 옥희는 부엌 한구석에 보관했던 편집기와 영사기를 꺼낸다. 이어 붙인 필름에는 바다를 향해 걸어가는 한 여자의 뒷모습이 담겨 있다. 옥희는 지완에게 말한다. “자네는 끝까지 살아남아.” 그 말은 앞세대의 여성이 뒤따르는 동료에게 건네는 뜨거운 당부이자 응원이며, 현재를 살아가는 이의 절실한 다짐처럼 들린다. 신수원 감독은 여섯 번째 장편 <오마주>에서 긴 시간을 탐험한다. 영화 안에서는 <여판사>를 통해 선배 여성 영화인의 자취를 되새기고, 밖에서는 데뷔작 <레인보우>와의 연결고리를 만들며 감독 본인의 창작 여정을 돌아본다. 지완은 감독을 투영한 캐릭터인 동시에, 침체된 영화 산업에서 제 위치와 역량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동시대 창작자를 대변하기도 한다. 첫 단독 주연을 맡은 이정은은 이와 같은 인물과 직업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오마주’의 순간을 뭉클하게 완성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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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차한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