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신만고 끝에 한 상가건물 옥상 행사장에 도착한 의주(윤아)와 용남(조정석)은, 구조 헬기를 부르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단 둘이서 구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면 구조 우선순위에서 밀릴 것 같으니까, 행사장에 즐비하게 서 있던 등신대 입간판과 마네킹들을 모아서 “여기 스무 명 정도 있다”고 말한 것이다. 일단 구조된 다음에 사과를 하든 하지 뭐. 이제 위태위태하게 유독가스를 피하며 빌딩숲을 클라이밍하는 밤의 모험도 끝인가 보다 싶던 순간, 건너편 건물에 고립된 학생들이 보인다. 보습학원 학생들이다. 아래에서는 유독가스가 스멀스멀 올라오고, 옥상으로 가는 문은 잠겨 있고, 학생들은 꼼짝없이 학원에 갇혀 발만 동동 구른다. 클라이밍 동호회 출신인 의주와 용남은 학원 창문 옆 간판을 타고 옥상으로 올라가는 길을 알려주려 하지만, 간판은 생각처럼 튼튼하지 않고 학생들은 클라이밍을 잘 못한다. 때마침, 저 멀리서 구조헬기가 날아온다.

의주와 용남은 갈등한다. 두 사람은 이미 한 차례 구조헬기를 양보한 바 있다. 구명 바스켓에 자리가 모자라자, 연회장 직원인 의주는 손님들을 먼저 태워보내는 선택을 했다. 의주를 짝사랑하고 있는 용남도, 일단 가족들을 먼저 구명 바스켓에 태워 보내느라 의주와 함께 남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버티는데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방독면의 필터가 다 되어 새 필터를 찾느라 한참을 헤맸고, 빌딩과 빌딩 사이를 건너기 위해 아령 수십 개에 로프를 묶어 던지는 수고로움을 감내하고, 아래에서 계속해서 올라오는 유독가스를 피해 빌딩 외벽의 간판을 타고 오르고… 의주와 용남은 저 헬기를 타고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그 개고생을 했는데, 왜 아니겠나. 하지만 저 아이들은 어쩌지. 우리는 클라이밍이라도 할 수 있지만, 저 아이들은… 헬기는 아이들을 못 본 채 의주와 용남을 향해 날아오고, 학원에 고립된 아이들은 패닉해서 울고 있다. 억울하고 서러운 마음 한 가득이지만, 의주와 용남은 살아남고 싶은 생각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외친다. 저기, 저쪽으로 가서 아이들 먼저 구하라고. 헬기가 자신들의 외침을 듣지 못하자 급기야 마네킹들로 거대한 화살표를 만들어 건너편 건물을 가리켜가며.

이상근 감독의 장편 데뷔작 <엑시트>(2019)가 처음 개봉한 2019년에는, 의주와 용남이 내리는 결단을 보며 세월호 참사의 악몽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꼼짝없이 갇힌 채 닥쳐오는 재난 앞에서 발만 동동 구르는 학생들과, 그들을 구조해야 한다는 간절한 바람. 현실 세계에서 좌절된 그 바람을, 영상예술 창작자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은유했다. 드라마 <앵그리맘>(2015)에선 학부형들이 명성고등학교 붕괴사건의 진상을 밝히라고 요구하는 장면으로 세월호 참사를 은유했고, 극장판 <번개맨>(2016)에선 조난당해 침몰해가는 유조선을 번개맨(정현진)이 번쩍 들어올려 구해내는 장면으로 보는 이들을 위로했다. 그리고 <엑시트>에서는, 의주와 용남이 제 공포와 생존욕구를 달래가며, 저기 고립되어 있는, 어른들이 보호하고 배려해주는 것이 마땅한, 사회적 약자인 학생들 먼저 구하라고 양보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러고 싶었던, 그런데 그러지 못했던, 그래서 모두의 가슴에 한으로 남았던 구조의 꿈이 반영된 장면처럼 보였다.

3년이 지난 지금, <엑시트>의 그 장면은 사뭇 다르게 보인다. 한국 사회는 학교 앞에서 왜 속도를 줄여야 하느냐고, 길을 건너는 학생들이 제 안전을 지킬 수 있도록 잘 가르쳐야지, 왜 무단횡단으로 불쑥 튀어나오는 아이들 때문에 나는 사고의 책임을 운전자가 져야 하느냐고 목소리를 높이며 ‘민식이법’을 공격하는 사람들이 득시글거린다. 업주가 피해를 감수해가며 어린이 손님을 맞이해야 한다는 건 억지라며 ‘노키즈존’을 운영할 권리를 주장하다가, ‘노키즈존’ 불매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슬그머니 ‘케어 키즈 존’으로 용어만 바꿔 눈 가리고 아웅하는 사람이 가득하다. “아이들이 놀다가 다치거나 피해를 끼치지 않도록 부모님들이 각별하게 ‘케어’ 해 주시라. 우리 가게는 그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을 것이니, 부디 노키즈존이 되지 않도록 여러분이 살펴주셔라.” 여차하면 노키즈존 할 테니, 그게 싫으면 숨 죽이고 있으라는 이야기다. 아주 대단한 은혜 베푸신다.

학생들은 성인에 비해 신체적으로 성장이 덜 끝났고 경험이 적으니, 위기 상황이면 성인보다 먼저 배려 받아야 한다. 어린이들, 노인들, 장애인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인터넷에는, 이 간단한 원칙 하나를 지키기 싫어서, 내가 속도 못 내는 게 짜증나서, 내가 더 살펴야 하는 게 억울해서, 왜 내가 손해를 봐야 하느냐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물론 세상에는 안 그런 사람도 많을 것이다. 인터넷은 원래 추하고 극단적인 면모가 과대대표되는 경향이 있으니까, 분명 자신보다 약한 존재들을 먼저 배려하고 살피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보다 약한 존재가 자신보다 더 많은 권리를 누리고 더 많은 배려를 받는 게 보기 싫어서 기를 쓰고 공격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의주와 용남은 정말로 정말로 선량한 사람들이구나 싶어지는 것이다. 그저 당연한 원칙을 지켰을 뿐인데, 자신들도 구조되지 못하는 게 서럽고 억울해서 주저주저하다가 울면서 양보한 건데, 그것조차 현실세계의 우리들에 비하면 엄청나게 선량한 실천처럼 보인다. 우린 대체 세월호 참사에서 무엇을 배운 걸까?

모두가 의주나 용남처럼 제 목숨이 오가는 윤리적 결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냥, 어린이들이 많이 오가는 학교 앞에서는 속도를 줄여서 최대한 천천히 방어운전을 하며 가는 게 상식인 세상, 아주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일반 음식점에서 어린아이 손님을 거절하지 않는 세상, 나보다 약하고 사회화가 덜 된 존재들을 배려하고 돌보고 이해하는 것이 암묵적인 원칙이 되는 세상이라도 해보자는 것이다. ‘민식이 놀이’ 운운하고 ‘케어 키즈 존’ 이야기하면서, 아이인 것이 죄가 되는 세상을 만들지는 말자는 것이다. 그냥, 딱 그 정도만 해볼 수 없을까? 그게 뭐 엄청난 바람인 걸까?


이승한 TV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