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이야기에 있어 발단은 결말 이상으로 중요하다. 특히 완결되지 않은 채로 일단 대중과 만나기부터 하는 이야기들은 더욱 그렇다. 이를테면 최소 4화까지 시청자들을 붙잡아 둔 연속극은 뒷심이 부족해 용두사미로 끝나더라도 발단의 힘 만은 입증 받은 작품이다.

하지만 가끔은 대중문화 생태계에서 가능한 것인지 믿을 수 없는 순간도 포착된다. 대자본과 유명 배우들이 모인 화제작의 초반부가 깜짝 놀랄 정도로 구릴 때다. 처음부터 시청자들을 잡지 못하면 다음은 없다는 걸 모를 리 없는 사람들이 모였다면, 적어도 초반의 흡인력은 보장돼야 마땅할 것이다. 예술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말이다.

넷플릭스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

넷플릭스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종이의 집)은 예고편부터 시청자들을 아연실색케 한 드라마다. 정확히 말하면 한국형 케이퍼 무비의 게으른 클리셰에 이골이 난 K-시청자들이다. 지적을 받은 건 해커 리우(이현우)의 "어 대기들 타시고", 보라색 가발에 타이트한 미니 드레스를 입은 나이로비(장윤주)가 조폐국 직원에게 총을 겨누며 "오빠, 쓸데없는 짓 하다가 대가리에 빵꾸나"라고 한 대목이었다.

돈을 뺏는 쪽이든 그걸 잡는 쪽이든, 해커가 밑도끝도 없이 키보드를 두들기면 잠긴 문이 열리고 CCTV 화면이 교체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 식의 설정은 이제 영화적 허용이라 봐도 옳을 것이다. 해커가 잠입하고자 하는 곳에 프로그램을 어떻게 설치했고 무슨 원리로 작동했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은 없다. 문제는 감성이다. "자, 선수 입장~"이라는 닳고 닳은 대사가 "대기들 타시고"로 바뀌었다고 해서 그 지겨운 감성까지 바뀌는 건 아니다.

넷플릭스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

총구를 들이대며 협박을 하면서도 "오빠"를 운운하는 나이로비의 옷차림은 수상함 그 자체다. 좋은 말이 나오지 않을 걸 예상하지 못했다면 그건 제작진이 게으른 탓이다. 나중에는 빨간 옷을 맞춰 입고 하회탈을 쓰면서 정작 가장 주목도가 높을 총격전에선 보라색 가발이라니, 민소희의 눈 밑 점이 훨씬 신뢰도가 높을 지경이다.

예고편만 보고 <종이의 집> 한국판에 이제는 온라인 상에서 밈으로나 쓰일 K-클리셰들이 범벅돼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일. 그러나 드라마는 1화에서 이미 그 혐의를 벗는 데 실패했다. 원작의 배경을 통일 직전의 경제 통합을 진행 중인 한반도로 바꾼 건 새롭지 않지만 신선한 시도였다. '이미 있는 돈을 훔치는 대신 조폐국에서 찍어 낸다'라는 설정과 '세계 유일의 분단 국가'라는 현실은 꽤 그럴듯하게 맞물린다. 다만 그 배경에 당위성을 부여할 장치와 연출들은 부족한 상상력을 노출하고 말았다.

넷플릭스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

자칭 '북조선 아미(BTS의 팬클럽 이름)'인 도쿄(전종서)는 통일 직전 은밀히 유입된 한국 문화를 통해 남쪽을 동경하게 된 고등학생이다. 감독이 BTS의 인기에 편승하려 소재 플레이를 했다는 생각까지는 하고 싶지 않다. 다만 '전 세계 아미와 나의 차이점은 진짜 군대에 들어가야 했다는 것'이라는 억지 연결 고리 만들기가 말장난에 그친다는 점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연결 고리를 위해 전종서는 김일성종합대학 계단에서 갑자기 신명나게 BTS 춤을 춰야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시청자들은 빨리도 첫 번째 고비와 만난다. 끌 것인가, 일단 참고 볼 것인가.

코리안 드림을 품고 한국에 온 도쿄는 곧바로 사기를 당한다. 집도 절도 없는 도쿄를 유흥업소로 내몰고 폭력배에게 곤죽이 되도록 얻어 터지게 하며 성폭행을 당할 위기까지 맞게 하는 건 이제 짜증 대신 하품이 나는 여성 캐릭터 활용 방식이다. 강도단 우두머리 교수(유지태)가 도쿄를 섭외한 후 그간 모인 '선수'들을 소개하는 대목도 남다른 한국식이다. "카니발의 꽃은 뭐니뭐니 해도 쌈바!"라고 외치는 리우, "록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거든"이라며 섀도우 복싱을 하는 덴버(김지훈) 등의 자기소개에서 불현듯 '아이 엠 그라운드'를 떠올린다면 잘못인 걸까. 단일 강도 사건 역사상 최고액 4조원을 털겠다는 강도단 치고는 지나치게 귀엽고 발랄한 결단식을 벌였다.

넷플릭스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

이어지는 조폐국 점거 장면에서 도쿄와 나이로비가 흡사 라라 크로프트 같은 차림으로 선두에 선 것은 차치하기로 하자. 자, 여기까지 왔다면 '마의 30분'은 넘긴 셈이다. 물론 이후로 K-클리셰나 노란 비닐 장판에 쩍쩍 달라붙을 것 같은 눅눅한 감성들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는다. 하지만 이야기 다운 이야기가 시작되는 시점이 30분을 넘긴 후라는 것은 분명하다.

이제 <종이의 집>은 기막힌 두뇌 싸움이든, 눈물나는 드라마든 뭔가 보여줘야만 한다는 과제를 부여 받는다. 이런 상황에서 교수와 우진(김윤진)의 아슬아슬한 러브라인, 덴버와 미선(이주빈) 그리고 조폐국장 영민(박명훈)의 삼각관계는 원작보다 좀 더 정서적인 시청을 유도한다. 조폐국 안팎 관리에 있어서는 교수-도쿄의 햇볕정책과 베를린(박해수)의 강경책이 어설프게 맞붙지만, 극의 긴장감을 유발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넷플릭스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

하지만 이 강도단의 가장 큰 문제점은 끝내 파트1을 통해 해소되지 않는다. 이들이 무엇을 욕망하는지 납득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교수는 강도단 밖 현실에선 실제로 남북 경제협력계획에 참여한 학자였다. 그는 통일 후 잘 살고자 하는 개인의 욕망이 한반도 경제를 부흥시킬 것이라는, 교수라기엔 믿기 힘든 주장을 펼쳤다. 그리고 이 주장은 당연히도 자본가를 더 부자로 만들어 주는 논리를 강화할 뿐이었다.

교수는 강도단을 모은 이유가 '가진 자들만 더 부자가 된' 현실 속에서 '제 몫을 챙기기 위함'이라고 밝힌다. 그러면서 조폐국을 터는 강도단을 생중계하면 그걸 본 사람들이 열렬한 환호를 보내리라 자신한다. 결국 요약하자면 이미 자본주의 백신을 맞은 자본가들이 면역력 없는 새 세상을 털었듯 돈을 훔치고, 의적이라도 된 것처럼 인정욕망까지 충족하겠다는 소리다. 이건 발랄하기 그지 없던 결단식의 무게 만큼이나 가볍고, 강도단이 별명을 지구본에서 랜덤으로 뽑은 것 같이 '이유 없는' 이유다. 이렇다 보니 강도단과 인질, 경찰까지 한국과 북한 사람들로 나뉘어 구성돼야 할 까닭도 없다.

'30분만 버티면 된다'라는 말은 <종이의 집>을 본 수많은 감상자들의 말이다. 406분의 러닝타임 중 초반 30분만 버티면 재밌어진다는 건, 단점 투성이의 드라마가 갑자기 그간의 구린 설정들은 복선이었다는 듯 세기의 걸작으로 변신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리고 드라마를 시작한 사람들에게 초반 30분을 꾸역꾸역 버티게 한다는 건 원래 재미가 없는 드라마였다는 뜻과 같다.


칼럼니스트 라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