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나 이야기와 달리 역사와 인생에는 피상적인 삶의 환희가 주는 교훈이나 행복을 담은 진의나 의의 따윈 없다. 역사를 들여다볼수록 인류에 대한 경멸과 암울한 세계관만 더 생겨날 수 있다.” 지난해 베를린국제영화제 황금곰상 수상작인 <배드 럭 뱅잉>의 2부는 ‘일화, 기호, 경이에 관한 소사전’으로 구성돼있다. ‘어린이’를 ‘부모들의 정치적 불모’라고 풀이할 정도로 냉소와 빈정거림의 기운이 물씬 풍기는 이 챕터에서, ‘역사’에 관한 기술은 더욱 어둡다.
교훈도 의의도 찾을 수 없고, 볼수록 경멸스럽고 암울해질 뿐이라니. 계속해서 지난 세기 루마니아의 궤적을 소재로 작업해온 감독에게 역사는 무궁무진한 비밀 이야기의 창고도, 삶의 지침을 깨닫게 하는 나침반도 아니다. 과거를 돌아보며 눈살 찌푸리고 절망하는 건 라두 주데가 줄곧 고수해온 태도이며, 그가 바라보는 현재도 마찬가지로 어두컴컴하다. 그런데 감독은 자신의 영화를 코미디라고 부른다. 그는 역사와 현실을 마냥 관찰하는 게 아니라, 세부를 뜯어내 확대하고 그것들로 기묘한 놀이를 한다. 정신없이 그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비릿한 유머와 마주하게 된다.
<배드 럭 뱅잉>은 곤경에 빠진 역사 교사 에미(카티아 파스칼리우)의 상황을 중심에 두고 전개된다. 남편과 찍은 섹스 동영상이 인터넷에 유포되면서 에미의 해임을 논하는 학부모 회의가 소집된 것이다. 첫 공개부터 화제가 된 문제의 영상으로 다짜고짜 시작하지만, 영화가 관심을 두는 대상은 영상의 내용도, 주인공의 감정도, 영상이 유포된 경위도 아니다. <배드 럭 뱅잉>은 이 사건을 계기 삼아 현대 루마니아 사회의 곪아있는 부위를 들여다보며 사람들의 역사 인식을 진단하고 싶어 한다.
2부 소사전에 따르면 극장 스크린은 메두사와 싸우려는 페르세우스에게 아테나가 건넨 거울 방패다. 맨눈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현실을 보게 한다. 지그프리드 크라카우어와 발터 벤야민을 인용해 해당 내용을 채웠다는 감독에게 영화란 “카메라와 편집을 통해 세계를 탐험하고 성찰하는, 세상과 현실을 더 잘 볼 수 있게 하는 도구”다. 서로 다른 질감의 세 챕터로 구성된 <배드 럭 뱅잉>은 어쩌면 라두 주데의 방법론이 가장 거칠게 드러난 사례다.
1부 ‘일방통행’에서는 에미가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를 하염없이 걷는다. 그녀는 학부모 회의 문제로 교장의 집을 잠시 방문하고, 마트에 들러 장을 보며, 스트레스를 완화할 약을 사기 위해 약국으로 향한다. 이때 카메라는 계속해서 에미 곁에 머무는 게 아니라, 도시 곳곳으로 눈을 돌리며 인물로부터 멀어지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카메라에 담기는 부쿠레슈티는 여전히 반공주의의 언어가 부유하며, 자본주의의 병폐에 잠긴 장소다.
사람들은 조국의 위대함을 외치는 한편, 가난한 건 자랑이 아니라며 이웃에게 면박을 준다. 때를 가리지 않는 성희롱과 여성을 대상화하는 간판이 넘쳐나는 건 기본이다. 1부는 도시를 이루는 것들에 관한 음울한 탐구다. 3부 ‘실천과 빈정거림(시트콤)’에 등장하는 학부모 회의는 1부의 세계가 압축된 장이다. 일단 동영상부터 보고 시작하자는 황당한 제안을 하는 학부모들. 이들은 제복을 입고 명문 학교 교사의 품위를 따지며 숨 쉬듯 에미를 조롱하고 모욕하는 작자들이다. 후반부엔 아이들에게 홀로코스트를 세뇌하지 말라거나, 동성결혼을 옹호하지 말라는 외침까지 터져 나온다. 적나라한 캐리커처와 걷잡을 수 없는 전개가 전하는 바는 분명하다. 세상은 끔찍하고 개인은 무력하다.
<나는 야만의 역사로 거슬러가도 상관하지 않는다>(2018)에서 라두 주데는 여성 연출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피로 물든 자국의 역사를 소환했다. 1941년 오데사에서 유대인을 학살한 루마니아 군대에 관한 연극은 극중에서 단일하게 의미화되지 않고 여러 방면으로 열려있다. 과거를 비판적으로 성찰하자는 건 연극의 연출 의도에나 적히는 말일 뿐이다. 역사의 화염은 아직도 이성을 태워버릴 만큼 강력해서 군대의 폭력을 향한 대중의 섬뜩한 환호마저 불러일으키고, 예술의 교훈적 효과를 믿는 연출가에게도 그을음을 남긴다.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지적인 여성이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배드 럭 뱅잉>은 <나는 야만의 역사로 거슬러가도 상관하지 않는다>와 유사해 보인다. 하지만 과정에 잠겨 고민하기보다 현상을 과장되게 재현하는 데 집중하기 때문에 후자보다 몸을 사리는 영화로 느껴지기도 한다. 감독은 ‘대중 영화를 위한 스케치’라는 부제와 결말의 ‘농담’이라는 표현으로 이러한 불만에 대한 출구를 마련해두었다. 과연 지독한 농담 같은 세상에서 영화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배드 럭 뱅잉>이 아직 다 답하지 못한 질문이다.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으로 국내 개봉하지만, 성기 노출 장면은 가려진 버전으로 상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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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손시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