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 전, 모 방송사의 인기 예능 프로그램 중 <테마게임>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당시 최고의 인기가도를 달린 여러 코미디언들이 출연해, 매주 하나의 테마(Theme)를 정하고 삶의 희로애락을 드라마 형식에 맞춰 맛깔 나게 풀어내곤 했었다. 이게 가볍게 볼 수 있으면서도 그냥 지나치기에 결코 가볍지 않은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기에 그 재미에 절로 빠져들곤 했다. 떠오르는 여러 일화 중 하나는 이런 거다. 글을 쓰는 젊은 두 남녀가 있는데, 한 명은 시작만큼은 기가 막힌 이야기를 만들어내지만 마무리를 쉽게 짓지 못하는 단점을 가졌고, 또 다른 한 명은 마무리는 아주 깔끔하게 매듭짓지만 글의 서두를 제대로 꺼내지 못한다는 거였다.
두 사람은 우연히 서로를 알게 되고 각자의 장단점을 이해하게 되면서 서로의 단점을 장점으로 보완하고자 노력하는 그런 내용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이론적으로만 따지자면 서로의 장점과 단점이 부합되니 아주 멋진 글이 나올 것만 같은데, 과연 결과가 그러했을까. 두 남녀는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자주 만남을 이어갔고, 여기에 상대에 대한 감정이 싹트게 되면서 그 감정의 바이오스가 결과물에도 점차 영향을 미치게 된다. 어찌됐건, 모든 게 이상적으로 흐르지만 않고 현실은 이론과는 확실히 다른 결과를 나타냈던 걸로 기억에 남아 있다.
잠시 ‘기억’의 공유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자. 앞에서 말한 이야기처럼 같은 시간과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은 다른 시간과 다른 공간을 제각기 기억 속에 담는다. 시간이 흘러 이를 추억으로 마주했을 때, 우린 너무나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고 그래서 “그랬던가.”, 혹은 “그랬어?”를 자연스레 입 밖으로 내뱉기도 한다. ‘기억’이란 개인의 뇌 속 어딘 가에 자기만의 영역을 외롭도록 철저하게 구축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영화 <마녀>(2018)를 통해 박훈정 감독이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 감독 특유의 액션누아르 구축만이 아닐 거다. 오히려 그 안에 독특한 키워드 몇 개를 끼워 넣은 사실을 눈 여겨 볼 수 있는데 이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첫 번째로 얘기할 수 있는 건 바로 ‘기억’이다. 인간의 뇌를 이용해 생체실험을 하고 다양한 능력을 가진 여러 명의 괴물을 탄생시켰으니, 영화를 만드는 입장과 보는 입장에서도 꽤 흥미진진한 소재가 될 수 있겠다. 화면 속에 자주 등장하는 ‘뇌’를 바라보는 시선은 단지 이들의 ‘뇌’를 조종하고 통제하고 다스리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그들의 입장에서 어떤 기억을 담아내고 있느냐에 더 진한 내음이 있는 것처럼 보이니까 말이다. 어쩌면 영화 <뉴 뮤턴트>(2020)에서의 시도처럼 육체적으로도 그리고 정신적으로도 자신의 능력과 감정에 갇혀버린 이들의 자아에 초점을 맞췄더라면, 좀 더 깊이 있는 이야기를 풍성하게 끄집어낼 작품을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꼭 그렇지 않더라도 이 영화 <마녀>는 내면의 그것을 읽어낼 여러 장면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두 번째 키워드인 ‘선택’을 얘기할 수 있다. 분명 자윤(김다미 분)을 만들고 키운 사람은 닥터 백(조민수 분)인데, 어느 장면에서 그의 아빠인 구 선생(최정우 분)이 “우린 널 그렇게 키우지 않았어.”라고 얘기하는 그것 말이다. 이는 후반부에서 드러나는 내러티브의 메시지에 커다란 힘을 실어주는 대사로 남는다. 이쯤 되면, 도대체 누가 누구를 선택하고 키웠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자윤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계획을 세우고 그들 구 선생 부부를 찾아 이를 선택했다. 자신을 키워줄 부부를 직접 선택했고, 자신의 삶을 선택했고, 자신의 미래를 선택했다. 그리고 닥터 백은 자신이 만든 괴물을 자신이 키웠다고 말하며 그에게 다시 한번 회유를 시도한다. 물론 구 선생 또한 애지중지 어렵게 키워낸 자윤을 따뜻한 사랑으로 대했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선택하고 누가 누구를 키워낸 것일까. 이조차 서로의 기억이 만든 추상적인 차이를 드러낸 것이라면, 어쩌면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어느 정도 채워질지 모를 일이다.
마지막 키워드는 ‘자아’이다. 영화 속 그의 자아는 온전히 드러난 게 아니었다. 영화의 제목이 표현하는 ‘마녀’라는 단어조차 그의 자아를 완벽하게 끄집어낸 걸로 볼 순 없을 것 같다. 이는 영화 속에서 하나의 반전, 그러니까 닥터 백이 아닌 자윤 스스로가 자신의 삶을 개척하기 위해 노력해 왔음을 드러내는 또 다른 의미의 표현으로 사용됐다. 닥터 백이 내뱉는 ‘영악하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묘사가 바로 ‘마녀’가 아니고 또 무엇이었을까. 그런데도 그의 자아는 여전히 그가 만들고 구성한 자신의 환경에 머물러 있다. 양아버지인 구 선생과 엄마(오미희 분), 그리고 친구인 명희(고민시 분)에게 남아있는 작은 감정이 그를 완벽하게 ‘마녀’로 만들지는 못했다는 증거다. 그러니까 그는 영화 속에서 완벽하게 자신의 자아를 찾아내지 못하는 모습을 비춘다. 스스로 자신의 불완전함을 벗어나 새 삶을 찾고자 하는 몸부림을 치지만 그건 그 시기에 누구나 겪게 되는 하나의 방황에 불과한 게 아니었을까.
그렇게 이 세 가지 키워드를 받아들이고 나면, 그를 둘러싼 모든 환경과 구성, 관계 등이 이가 맞물리듯 딱 들어맞게 이해된다. 누구에게나 공감을 끌어내는 기억의 한 장면이 있기 마련이다. 어릴 적, 회전식 손잡이를 가진 텔레비전을 시청하며, 또 칙칙 소리를 내는 조그마한 라디오에 귀 기울이며 그곳에서 흘러나오던 가요 한 곡을 선택해 작은 테이프 하나에 녹음하고자 노력하곤 했다. 휴지를 찢어 카세트 테이프의 모서리 네모난 구멍에 마구 쑤셔 넣고는 녹음 버튼을 누르는 재미를 가득 누렸던 그 기억이 떠오른다. 이 기억을, 아니 이 추억의 한 자락을 누군가는 함께 경험하며 공감하고 또 사랑하고 있을 거다. 어쩌면 옛 음악을 들을 때마다 그때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때 들었던 그 음악, 휴지를 작게 찢어 넣던 그 행위가 지금의 내 모습을 만들고 나를 구성하는 자아를 형성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 시절의 내가 세차게 흔들리는 ‘마녀’였다면, 시간이 흐른 후 지금의 거울 속 내 모습은 또 어떤 모습을 갖춰 나가고 있는 것일까. 기억과 선택, 그리고 자아에 둘러싸인 또 다른 성장은 어떤 삶의 형태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일까.
테일러콘텐츠 에디터 / 영화 칼럼니스트 이동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