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나 청춘일 것 같은 사람이 있다. 어쩐지 반항적이고 위태로워 보이지만, 한없이 투명해서 미워할 수 없는 청춘. 그 뜨거움의 이미지를 상상할 때면, 누구보다 먼저 배우 유아인이 떠오른다. 데뷔작 <반올림> 속 훈남 선배는 풋풋했고,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속 소년은 우울하고 가련했으며, <밀회> 속 피아니스트는 겁 없이 로맨틱했다. 소년의 결핍과 무모함을 탁월하게 표현하며, 늘 강렬한 여운을 남긴다.
최근 공개된 넷플릭스 신작 <서울대작전>에서는 최강의 드리프터 역할을 맡아 거침없는 청춘을 연기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VIP 비자금 수사 작전에 투입된 드라이버들이 카체이싱 질주극을 벌이는 작품이다. 명과 암이 공존하던 시대 속에 힙합 콘셉트와 리드미컬한 음악을 녹여내며 눈과 귀를 즐겁게 만든다. <서울대작전> 외에도 <승부>, <하이파이브>, <종말의 바보>가 공개 예정에 있다. 다양한 작품 속에 자신을 쏟아내는 유아인은 아직도 뜨겁게 불타고 있는 듯하다. 어느덧 데뷔 20주년을 앞두고 있는 그의 투명하고 뜨거운 연기가 빛나는 작품들을 살펴보자.
<완득이> (2011) / 도완득 역
<완득이>는 가진 것도, 꿈도, 희망도 없는 문제아 완득이가 오지랖 선생을 만나며 성장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완득이는 척추 장애인 아버지, 정신지체 장애인 삼촌과 함께 가난하게 살아가는 소년이다. 담임 동주는 사사건건 그를 괴롭히고, 친구들과는 어울리지 못하며, 어머니의 존재는 알지도 못한다. 장애인, 다문화가정, 이주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고찰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온통 자신을 괴롭히고 위축되게 만드는 세상 속에서, 완득이는 킥복싱을 통해 세상을 향한 통쾌한 한방을 던진다. 그리고 마침내 사랑과 자아를 찾아가기 시작한다. 유아인은 사춘기 소년이 겪는 ‘질풍노도’를 온몸으로 표현하며, 작지만 뜨거운 불꽃을 품은 소년의 모습을 보여준다.
<베테랑> (2015) / 조태오 역
류승완 감독의 범죄 오락 액션 영화 <베테랑>에서는 유아독존 재벌 3세이자 악랄한 빌런 조태오를 연기했다. 세상을 자신의 발아래로 두는 안하무인이며, 인간성을 찾아볼 수 없는 소시오패스이다. 건방진 듯 보이지만 가식적이지 않고, 자유분방한 동시에 올곧아 보이는 유아인이 연기하는 악인은 어땠을까. 그는 클리셰를 경계하며, 새로운 괴물을 창조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제대로 광기 어린 소시오패스를 창조해냈다. 철부지 악동이 아닌 극악무도한 악당 연기는 소년성을 벗어나려는 그의 도전이기도 했다. 욕망과 본능의 노예가 되어 인간성을 상실한 ‘그냥 나쁜 놈’ 역할조차 소화하며, 완벽한 연기 변신에 성공했다. 조태오라는 악인은 우리 시대에서 충분히 태어날 수 있고, 미디어를 통해 종종 목격했기 때문에 더욱 섬뜩하게 다가온다.
<사도> (2015) / 사도세자 역
유아인은 <성균관 스캔들>, <장옥정, 사랑에 살다>, <육룡이 나르샤>를 통해 훌륭한 사극 연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 행보에 정점을 찍은 <사도>는 그에게 생애 첫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특별한 작품이다. 아버지의 학대로 인해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의 이야기는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가족사로 꼽힌다. 남다른 총명함으로 아버지 영조의 기쁨이 되었던 사도세자는 연약한 청년이었고, 세자가 아닌 아들로 인정받기를 원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따뜻한 눈길 한 번, 다정한 말 한마디를 받아보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한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받고 싶었던 사도세자의 안타까운 욕망과 서러움을 깊이 있게 연기했다.
<버닝> (2018) / 이종수 역
<버닝>은 거장 감독의 통찰력과 청춘 배우의 생기가 시너지를 이룬 작품이다. 리얼리즘 장인 이창동 감독이 유아인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의 연기는 날것 그대로의 생동감과 예측되지 않는 역동성을 지닌다. 모호한 듯 날카롭고, 산만한 듯 질서정연하다. <버닝>에서 유아인은 분노와 열패감에 휩싸였지만, 그것이 무엇을 향하는지 모르는 청년 종수를 연기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개츠비들과 현실을 초월한 그레이트 헝거들이 지배한 세상에서, 평범한 청년들은 늘 무언가에 굶주려 있다. 그 애타는 욕망은 소설이나 마임 같은 허상으로 실현될 뿐이다. 모든 것이 허공에 떠다니는 <버닝>은 그래서 더욱 시대적이다. 개츠비가 난무하는 세상을 이해할 수 없는 종수를 통해, 무력한 청년 안에 광기가 피어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제 다 알았다고 생각했던 배우 유아인의 새로운 얼굴들을 보게 된다.
<국가부도의 날> (2018) / 윤정학 역
1997년 외환 위기, 국가부도 위기를 앞두고 서로 다른 선택을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한국형 금융 재난 영화이다. 한국 영화 최초로 우리의 아픈 기억인 외환 위기를 다룬다. 위기가 닥쳤을 때, 위기를 막으려는 사람과 위기에 베팅하는 사람이 있다. 금융맨 윤정학은 국가부도 위기에 투자하는 역베팅을 결심한 인물이다. 나라가 망하는 시기를 자신의 기회로 삼는 기회주의자이지만, 이러한 현실에 씁쓸함 정도는 느낄 줄 아는 평범한 인간이기도 하다. 유아인은 비중이 크지 않은 역할이지만 즐거운 작업이라 여기며 출연을 선택했다고 한다. 즉각적인 사랑과 주목보다 온전한 연기의 즐거움을 좇는 것이 배우 유아인의 멋 아닐까.
<소리도 없이> (2020) / 태인 역
홍의정 감독의 <소리도 없이>에서는 시체 수습을 하며 살아가는 태인 역할을 맡아, 대사 한마디 없이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배우의 존재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금 깨닫게 한다. 배역을 위해 15kg을 증량하고, 대사가 아닌 눈빛과 몸짓에 집중하며 또 한 번 색다른 연기 변신을 보여준다. 태인은 장애가 없지만 스스로 입을 닫고 살아간다. 명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침묵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길들여진 것으로 보인다. 그는 범죄자인 동시에 노동자, 11살 아이의 보호자인 동시에 유괴범인 양면적인 인물이다. 선과 악이 각자의 생존보다 우위에 있지 않다는 차가운 현실을 반영한다. 태인은 끝까지 아무런 말이 없지만, 그의 거칠고 불안한 몸짓은 복잡한 심정을 전달하기에 충분하다. 소리가 없으니 더욱 집중해서 관찰할 수밖에 없다. 그의 고요함 속에서 어떤 파도가 일어나고 있는지 상상하고 짐작하며 감상해보자.
테일러콘텐츠 에디터 혜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