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이란에서 20대 여성 '마흐사 아미니'가 ‘히잡법’ 위반으로 구금된 뒤 의문사했다. '히잡법'은 모든 여성이 공공장소에서 히잡과 헐렁한 옷으로 온몸을 가리도록 하는 복장 규정으로 1979년 이슬람 혁명 후 채택됐다.
70년대만 해도 자유로운 복장이 가능했던 이란. 79년을 기점으로 여성들의 대외 활동은 제한되고, 인권과 자유는 후퇴한다. 만화 『페르세폴리스』에서 이란 출신의 주인공 마르잔이 ‘바지가 충분히 긴지, 베일이 잘 씌워졌는지’ 감시당하며 두려움을 내면화했듯이, 복장 규정은 여성들이 자신의 자유와 권리에 대해 질문하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촘촘하고 폭력적인 억압에도 여성들은 용기 있는 저항을 이어갔다. 1979년 3월 7일, 직장에서 여성들의 히잡 착용을 의무화하자 다음날 수도 테헤란 거리에는 10만 명 이상의 시위자가 쏟아졌다. 이란 여성들은 히잡을 착용하더라도 머리카락이 보이도록 엇비슷하게 걸쳐 쓰는 등의 방식으로도 저항을 계속해 나갔다. 2014년에는 "나의 은밀한 자유"라는 이름의 온라인 시위 캠페인을 조직해 히잡법에 반하는 사진과 영상을 공개적으로 올렸고 그 영향은 이후 "하얀 수요일", "혁명 거리의 소녀들" 등의 운동으로 이어졌다.
'마흐사 아미니'의 죽음으로 반정부 시위가 다시금 격화되고 있다. 시위로 최소 50명 이상이 사망했다. 여성들은 히잡을 벗어던지고 불태우는 등 아미니의 죽음을 초래한 이슬람 율법에 저항하며 "정의, 자유, 히잡 의무화 반대"를 외친다. 시위에 참가한 한 여성은 “하늘을 향해 히잡을 흔드는 동안 다른 남성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보호하는 모습에 정말 감동받았어요. 연대를 확인해 기뻤습니다. 전 세계가 지지해 주면 좋겠어요.”라고 호소한다.
당국의 강경 진압에도 단호하고 결연하게 히잡을 태우는 이란 시민들의 모습에서 높은 검열의 벽 앞에서도 꺾이지 않고 전 세계 관객의 극찬을 이끌어낸 기세 좋은 이란의 영화감독들이 겹쳐 보인다. 오늘, 서슬 퍼런 검열을 뚫고 세상과 만난 이란 영화 3편을 소개한다. 미약하나마 여기 지지하는 ‘우리’가 있다는 연대의 의미를 담아.
<3개의 얼굴들>(2018)
감독: 자파르 파나히
각종 영화제에서의 수상 기록과 전 세계 비평가들의 극찬과는 별개로 이란 영화는 늘 검열과 싸워왔고, 그 중심에는 자파르 파나히 감독이 있다. 이란 여성들의 현실을 적극적으로 드러낸 영화 <써클>(2000)로 제57회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파나히 감독은 2010년 반정부 시위에 동조하다 체포돼, 징역 6년 형과 20년간 영화 제작, 시나리오 집필, 인터뷰 금지와 출국 금지를 선고받는다. 복역 두 달 만에 조건부 석방된 감독은 영화 제작 금지 처분을 받고도 작품 활동을 이어왔고, 이후 <택시>(2015)로 베를린영화제 최고 영예인 황금곰상을, <3개의 얼굴들>(2018)로 칸 영화제 각본상을 받았다.
<3개의 얼굴들>은 유명 배우 베호나즈 자파리에게 한 소녀의 자살 영상이 전달되며 시작된다. 영상 속 소녀의 이름은 '마르지예'. 배우가 되고 싶지만 가족의 반대로 꿈을 이루지 못한다며 하소연하던 마르지예는 이내 목을 매고, 이후 카메라는 심하게 흔들린다. 소녀는 정말 죽은 걸까? 동영상을 받아든 자파리는 촬영장을 뛰쳐나오고 자파르 파나히 감독과 함께 소녀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이란 북서부로 먼 길을 떠난다.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유려하게 넘나든 전작 <택시>(2015)에 이어 파나히 감독은 다시 운전대를 잡는다. 그렇게 감독은 영화 전면에서 배우 자파리와 함께 이란 지역민들의 척박한 삶과 이란에서의 여성 인권의 실상을 보여주는 안내자 역할을 자처한다. 텔레그램으로 전달된 영상을 보는 것만으로 배우 자파리는 소녀와 깊이 엮이게 되고, 그의 죽음을 방치할 수 없게 된다. <3개의 얼굴들>을 보는 순간 관객들도 '마르지예'와 엮이게 된다. 가난, 여성 인권, 권위주의 등 이란 북부의 문제는 우리 사회의 병폐이기도 하기에. 영화는 무겁지만은 않다. 사회적, 정치적 이슈를 관통하는, 자칫 교훈적이 될 수 있는 영화를 파나히 감독은 지루한 예술가의 손놀림과 웅장함 없이 소박하게 그려낸다.
최근 자파르 파나히는 2010년 선고받은 형벌을 마저 받아야 한다는 이유로 테헤란 에빈교도소에 재수감됐다. 이란 정부의 집요한 정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경쾌한 로드무비 <택시>와 <3개의 얼굴들>을 완성했던 파나히 감독. 암흑의 시간 속에서도 놀라운 성취를 이뤄낸 감독이 또 한 번의 힘든 시기를 잘 견뎌내길 바란다.
<체리 향기>(1997)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많은 이들이 인생 영화로 꼽는 <체리 향기>. 하지만 이 영화도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영화들처럼 우리의 인생 영화 리스트에 오르지 못할 뻔했다. 1997년, 칸 영화제 폐막 3일 전, 한 영화의 상영 공고가 붙으면서 공식 경쟁작의 명단에도 없었고, 영화제 공식 책자에도 실리지 않은 영화가 출품된다. 이렇게 이란 정부의 출국금지 조치로 출품되지 못했던 <체리 향기>가 영화제 막판 기적적으로 상영되면서 그해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는 이변을 낳는다.
영화는 끝도 없이 이어지는 황량한 흙길을 달리는 '바디'(호마윤 에르사디)를 비춘다. '바디'는 수면제를 먹고 죽을 자신의 시신 위에 흙을 덮어줄 조력자를 찾는 중이다. 돈은 얼마든지 주겠다는 그의 부탁에도 앳된 얼굴의 군인도, 온화한 미소의 신학도도 죽음이란 단어 앞에서 그의 부탁을 단호히 외면한다. 이후 자연사 박물관에서 일하는 노인 '바게리'(아브돌라만 바그헤리)가 그 제안을 수락한다. 노인은 '바디'에게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를 해주며 작지만 소중한, 삶의 기쁨들을 하나씩 펼쳐 놓는다. 자살 직전 마주한 달콤한 체리 향기의 기쁨 때문에 죽기를 포기한 자신의 이야기도 들려주며.
'바게리'의 이야기를 들으며 삶에 대한 강한 애착을 느낀 '바디'는 그에게 내일 새벽 자신을 찾아와서 돌멩이 두 개를 던지고, 어깨도 흔들어 보라는 말을 전한다. 자신이 살아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밤이 오고 수면제를 먹은 '바디'는 자신이 파놓은 무덤 자리에 눕는다. 조금은 긴장된 그의 얼굴 위로 푸른 달빛이 서리고, 가끔씩 치는 번개의 빛에 그의 얼굴이 잠깐 보였다가 사라진다. 동이 튼 새벽, '바디'는 그토록 바라던 죽음을 얻게 될까?
영화는 살아갈 동기 부여가 되는 단순하지만 아름다운 그 무엇을 '체리'로 은유한다. 이란 시인 오마르 하이 얌의 시에서 “삶을 즐기려면 죽음이 쫓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리고 체리 향기를 맡아 보아라.”라는 시구가 키아로스타미 감독에게 이 영화를 만드는 계기를 주었다고 한다.
운동장을 뛰어노는 아이들의 재잘거림, 도시 하늘 너머 펼쳐지는 저녁노을의 눈부실 빛깔, 죽으려고 누운 자리에서 본 달의 번짐. 일상 속 당연한 것들, 즉 '체리 향기'와 같은 것들이 어쩌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일지 모른다. 그리고 주인공 '바디'는 누군가가 그런 것들을 계속 보고 싶지 않냐 물어봐 주길, 그렇게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아 헤맸던 걸지도 모른다. 자살 조력자를 찾던 그의 로드 트립은 결국 삶의 동반자를 찾는 그의 간절한 시도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바디'의 무덤 자리는 고통스러워했던 과거를 묻는 곳이자 새로운 삶의 시작점이고, 그는 죽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다.
<세일즈맨> (2016)
감독: 아쉬가르 파라디
영화를 좋아한다면 이란 영화감독 '아쉬가르 파라디'의 이름,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그의 최근작 <히어로>(2021)에 대한 표절 소송이 진행 중이지만, 그는 현재 전 세계가 가장 주목하는 감독 중 한 명 임에 틀림없다. 파라디 감독은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2011)로 제61회 베를린 영화제에서 황금곰상과 남녀 주연상을, 제84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이란 영화 최초로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후 <세일즈맨>으로 제90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다시 한번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다.
영화에 대한 정치적 검열이 엄격한 나라에서 <세일즈맨>은 특별한 영화다. 파라디 감독은 검열이라는 칼날 위 묘한 경계선에서 작품 활동을 한다. 그 이유 때문일까? <세일즈맨>은 복잡한 의미전이의 구조를 위해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과 소설 <암소>라는, 이전보다 더 강력한 은유의 장치를 영화에 끌어온다. 이를 통해 감독은 인물 각각의 심리 갈등을 섬세하게 그리고 그 안에서 파생되는 윤리적, 도덕적 딜레마를 능수능란하게 그려낸다.
벽과 창에 균열이 생기며 붕괴되기 시작한 건물, 그곳을 피해 부부 라나(타라네흐 알리두스티)와 에마드(샤하브 호세이니)가 새로운 집으로 이사하는 것으로 영화 <세일즈맨>은 시작된다.
이전 세입자의 사정으로 그녀의 물건들을 한쪽 방에 둔 채 살림을 시작하는 둘. 그러던 어느 날 라나는 집에 침입한 한 남자에 의해 불미스러운 사고를 당하고 분노한 에마드는 직접 범인의 행적을 쫓는다. 부부는 애써 괜찮은 척하지만 그날의 사건으로 둘의 사이도 서서히 무너져내린다. 영화는 젊은 부부에게 들이닥친 시련을 통해 복수심과 연민, 용서와 같은 인간의 양면적인 감정을 내밀히 보여줄 뿐 어느 한쪽 손을 들어주진 않는다. 연쇄적 딜레마의 끝자락에서 관객이 영화의 결말을 선택하게 할 뿐이다.
문화기획자 하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