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오랜만에 일본을 통하는 하늘길이 열렸다. 많은 이들이 이미 일본 여행을 계획하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나에게도 일본, 특히 도쿄는 추억이 많은 곳이다. 특히 내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존재, 영화와 맥주로 말이다. 따라서 이번 글에서는 수일 내에 일본, 특히 도쿄를 방문할 게획을 가진 이들을 위해 영화와 맥주를 머금은 도쿄의 추억을 공개할까한다.

코로나로 발이 묶이기 직전, 난 니혼대학교 영화과에서 주최하는 ‘재일조선인 영화제’에 참여하게 되었다. 재일조선인을 주제로 하거나, 캐릭터가 등장하는 영화들을 묶어 상영하는 행사였다. 일본 영화자료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오랜 단편 영화들 (특히 일제강점기 시대에 서울을 배경으로 찍은) 이 이 행사를 통해 공개된다고 하여 꽤 기대가 됐다. 이 행사로 도쿄에 4일 동안 머물 기회가 생긴 것인데 오랜만에 재회하는 도쿄라서 공식 일정 보다도 더 길게 여정을 잡았다.

사실 영화제 보다 그 사이사이 누비고 다닐 도쿄의 골목들이 날 더 설레게 했다. 첫날은 늦게 도착한 터라 호텔방에서 저녁을 해결했다. 일본 여행의 백미 중 하나는 편의점 쇼핑이 아닌가. 이것 저것 간식과 맥주 3캔을 사서 침대 위에 펼쳐 놓고 만찬의 구색을 맞췄다. 사실 일본 맥주를 마실 때 기린이든 아사히든 에비수든 딱히 가려 마시지는 않는다. 일본 맥주는 대부분 라거라서 라거의 팬이 아닌 나로서는 어떤 맥주를 마셔도 맛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다만 왠지 아사히가 더 ‘본토’스럽다는 생각이 들어 일본 여행을 오면 망설임 없이 아사히 수퍼 드라이를 집어 든다. 아사히 수퍼 드라이는 맥주의 가장 특징적인 맛을 가장 보편적인 레벨로 규격화 시켜서 어떤 입맛을 가진 사람이든, 어떤 음식이든 잘 어울리게 만든 라거 맥주다.

[재일조선인 영화제에서 상영되었던 이마무라 쇼헤이의 <니안짱> (1959): 재일 조선인 가족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다]

첫날 저녁을 편의점 만찬으로 그럭저럭 해결하고 두번째 날에는 드디어 온 몸으로 도쿄를 머금을 자유시간이 생겼다. 신중하게 고른 도쿄에서의 첫 끼는 소바였다. 묵고 있던 호텔 옆에 꽤 오래된 소바야 (そばや: 소바 가게)가 있었는데 늘 기다리는 줄이 즐비했다. 점심 피크를 넘겨서 한가한 시간에 도착한 이 곳에서 난 소바와 아사히 생맥주를 주문했다. 한국에서 평양냉면과 소주가 낮술 고수들의 단골 메뉴라면 일본에서는 소바와 니혼슈다. 한국에서는 소바와 술을 곁들이지 않지만 일본에서는 소바에 술을 곁들이는 것이 꽤 흔한 풍경이다. 나도 레이슈 (차가운 정종)를 주문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결국 오후 일정을 위해 생맥주로 마음을 달랬다.

덴푸라 몇 개가 딸려 나오는 소바 정식과 시원한 생맥주는 그야 말로 천상의 조합이었다. 튀김 한 입, 맥주 한 모금, 소바 한 입을 무한반복하고 나니 온몸이 나른해졌다. 다시 호텔로 들어가서 낮잠을 자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그 후에 자괴감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 결국 이 날의 목적지인 칸다 (神田)로 향했다. 고서점 거리로 유명한 칸다는 도쿄에 갈 때마다 꼭 포함시키는 나의 필수 코스 중 하나다. 몇 세기 전에 쓰여진 고서부터 영어로 된 중고서적, 그리고 키치함으로 무장한 오래 된 패션지까지 칸다에 가면 시간의 흐름을 망각하게 된다 (실제로 칸다에 있다가 비행기를 놓친 적도 있다). 난 주로 영화와 관련된 서적을 타겟으로 하는 데 그 수가 많진 않아도 꽤 귀한 것들이 즐비하다.

[무성영화시대의 수퍼스타, 마를린 디트리히]

그렇게 한 나절 동안 종이 냄새를 맡고 나니 진한 커피가 간절해졌다. 칸다의 고서점 거리엔 오래 된 킷사텐 (きっさてん [喫茶店])들이 즐비하다. 킷사텐은 에스프레소 베이스의 신식 카페가 아닌, 드립 커피 위주의 전통적인 커피숍들을 말한다. 내가 특히나 킷사텐을 좋아하는 이유는 커피도 커피지만 오래된 경양식집 스타일의 촌스러움과 음식 메뉴다. 대부분의 킷사텐들은 샌드위치나 하이라이스 같은 간단한 음식메뉴들과 주류를 갖추고 있다.

공수한 책을 들여다보고 싶기도 해서 가까운 킷사텐에 들어갔다. 이번 여행에서는 마릴린 디트리히의 영화 속 의상을 모은 사진집을 구했다. 책의 표지 속 그녀는 역시 무성영화 시대의 스펙터클을 한 몸에 간직한, 대담하고 아름다운 여배우의 모습이었다. 일본의 서점답게 얼마나 포장을 예쁘고 정성스럽게 해줬는지 당장 포장지를 뜯어서 다시 책을 열어 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결국 그 자리에서 책을 보는 것은 포기하고 이른 저녁이나 먹자 싶어서 커피와 생맥주, 그리고 하이라이스를 주문했다.

역시 이 가게에서 마신 생맥주 역시 훌륭했다. 꽤 긴 시간을 걸었던 터라 오랜만에(?!) 첫 모금으로 마시는 맥주는 그야말로 구세주의 맛(?)이 났다. 일본에 도착한 이후로 이틀 내내 같은 생맥주를 마시고 있음에도 장소에 따라, 먹는 음식에 따라 모두 다른 맛이 났다. 킷사텐의 하이라이스는 너무 짜서 훌륭하다고 할 수 없었지만 적당한 온도에 거품이 가득한 맥주는 허기와 피로를 풀기에 충분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콘비니 (コンビニ: 편의점)에 들러 캔맥주와 안주거리를 샀다. 다음 날은 오즈 야스지로 전시에 갈 예정이라 그의 영화 중 한 편을 볼 생각이었다. 내가 선택한 영화는 <꽁치의 맛> (오즈 야스지로, 1962)이었다. 일본에 와서 일본 맥주와 곁드리기에 완벽한 영화다. <꽁치의 맛>은 일본영화산업이 텔레비전의 부상으로 하향세를 그릴 즈음 오즈 야스지로와 노다 코고 콤비가 만든 마지막 작품이자 오즈의 유작이기도 하다.

영화의 메인 캐릭터는 아버지와 딸이다. 딸 미치코와 함께 살고 있는 히라야마는 친한 친구로부터 딸을 결혼시키라는 종용을 듣지만 자신의 눈에 비친 딸은 어리기만하다. 이후 중학교 은사와 친구들과 술자리를 가진 히라야마는 완전히 취해버린 은사를 집까지 배웅하기 위해 은사의 집을 방문했다가, 아름다웠던 은사의 딸이 결혼도 하지 않은 채 늙고 초라한 모습으로 변해버린 모습을 보고 자신의 딸을 떠올리게 된다. 히라야마는 결국 미치코를 친구들이 추천하는 청년과 결혼시키려 결심한다.

[<꽁치의 맛> 개봉 포스터]

도쿄를 배경으로 한 <꽁치의 맛>에는 유독 술을 마시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이 장면들은 오즈가 선호하는 실내의 다다미 위가 아닌 대부분 술집들이 즐비한 (아마도 긴자) 뒷 골목의 이자카야나 바(bar)다. 형형색색의 술집 간판과 좁은 골목을 오가는 주객(酒客)들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은 오즈 특유의 고요한 ‘다다미 샷’과는 반대로 설렘과 동요가 느껴진다. 아마도 당시 60세를 맞은 오즈는 집안을 벗어나 에너지와 생기가 넘치는 도시의 곳곳을 탐험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나 또한 영화 속에서 히라야마가 방문했던 바들을 차례로 탐험하고 싶다는 설레는 상상을 하며 잠을 청했다. 다시금 영화를 빙자해 술과 동행할 도쿄 출장이 예약된 셈이다.


김효정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