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일 사이에 본 두 편의 영화는 모두 다큐멘터리였다. 공교로운 점은 두 작품이 모두 자전적인 이야기라는 점이다. 한편은 아들이 감독이 되어 아버지의 삶을 기록했고(<물방울을 그리는 남자>), 다른 한편은 딸이 감독이 되어 어머니의 삶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오늘 이야기할 영화는 <디어헌터>(2005)로 데뷔한 양영희 감독의 신작 <수프와 이데올로기>이다.
영화 줄거리는 단순하다. 일본인, 미국인 사위를 극구 반대하던 조총련 활동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쉰이 넘은 막내딸은 오사카에 홀로 남은 어머니에게 일본인 남자친구를 인사시킨다. 처음 맞는 사위에게 어머니는 터질 만큼 속을 꽉 채운 닭백숙을 정성껏 끓여 대접한다. 음식을 나눠 먹으며 어머니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고향, 제주도에서 일어났던 참사 4·3사건을 털어놓는다. 새로운 가족과 함께 어머니는 마침내 제주로 향한다. 하지만, 어머니의 기억은 점점 사라져만 가는데….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는 제목에서 볼 수 있듯 ‘수프’ 그리고 ‘이데올로기’다. 먼저 수프를 보자. 그렇다. 영화에서 수프는 짐작하다시피 닭백숙이다. 영화에서 수프는 총 세 번 등장하는데, 첫 번째는 오사카로 인사를 오는 사위를 맞이하기 위해 어머니 강정희 여사가 닭백숙을 준비하는 장면에서 등장한다. 큼지막한 닭의 속에 마늘, 대추와 함께 무려 마흔 개의 마늘을 넣고 바늘과 실로 꼭꼭 꿰맨다. 4시간은 뭉근하게 끓여야 하며, 뚜껑은 조금 열어둬야 한다고 딸에게 조리법을 전하면서. 두 번째 수프는 한결 편안해진 사위와 장모가 함께 장을 본 후 마늘을 까는 장면에서, 마지막 수프는 사위가 홀로 정성껏 준비한 수프를 함께 나눠 먹는 장면에 등장한다.
그러고 보면 이 영화에서는 닭백숙뿐만 아니라 음식이 자주 등장한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아버지가 미래의 사위에 대한 조건을 늘어놓는 장면도 저녁 식사 장면으로 시작한다. 우리는 한 집에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 나눈다는 의미를 담아 가족을 ‘식구(食口)’라고 부른다. 식사를 통해 시간을 공유하는 것으로, 함께 밥을 먹는다는 건 단순히 끼니를 때우는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양영희 감독에게 ‘수프’는 더욱 그렇다. 세 오빠를 모두 북송시킬 만큼 열성적인 조총련 집안의 외동딸이었던 그녀는 부모를 이해할 수 없었다. 보다 못한 어머니가 ‘한 달에 한 번만 아버지와 밥을 먹어달라’며 딸에게 부탁한 후로 양영희 감독은 10년에 걸쳐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고, 그 과정을 담은 영화 <디어 평양>(2005)을 선보인 바 있다.
<수프와 이데올로기>에서도 수프는 가족을 이해하게 만드는 매개체 역할을 톡톡히 한다. 국적, 살아온 배경 그리고 사상까지 모두 달랐지만 한 그릇의 따뜻한 ‘수프’를 통해 서로를 알아가며 가족이 되어가는 것. 어머니가 한평생 숨겨왔던 아픈 기억까지 되짚어가면서 양영희 감독은 그동안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어머니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간다. 따뜻한 수프 한 그릇을 나눠 먹으며 공감하고, 이해하며, 그렇게 세 사람이 한 가족이 되어 가는 과정이 묵직한 울림을 준다.
이제 두 번째 키워드 ‘이데올로기’를 들여다볼 차례다. 전술했다시피 양영희 감독은 조총련의 열성적인 활동가였던 재일한국인 가정에서 자랐다. 북한으로 보낸 세 아들은 아버지에게는 충성의 발로였지만, 어머니에게는 아픈 손가락이었다. 평생 바느질을 하며 불렸던 재산은 현해탄 너머의 아들들 생활비로 모두 보내야 했다. 두 채였던 집은 한 채만 남았지만, 여전히 매달 어머니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들이 여럿. 연금으로 생활하면서도 빚을 내 돈을 보내는 어머니를, 딸은 이해할 수 없다.
이데올로기 이야기를 하려면 한 여인의 삶을 먼저 들여다봐야 한다. 양영희 감독의 어머니 강정희 여사는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재일조선인에 대한 혐오와 핍박이 심해지면서, 강 여사는 제주도로 떠났다. 하지만, 1948년 4월 3일. 당시 18세 꽃다운 나이의 강 여사는 오랫동안 한국 현대사의 금기였던 제주4·3사건을 겪는다. 일가친척은 물론이고 미래를 약속한 약혼자까지 잔인한 죽임을 당하면서, 그녀는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다시 오사카행 밀항선에 올라야 했다.
이후 그녀의 삶에서도 제주4·3사건은 금기어가 됐다. 재일조선인에 대한 핍박을 피해 돌아간 고국에서 잔인한 살육의 현장을 경험하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던 한 소녀. 조총련의 열성 활동가와 결혼한 건 필연이 아니었을까. 남편이 세상을 떠나기까지 함구했던 제주4·3사건에 대한 기억은, 일본인 사위와의 따뜻한 수프에서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온다. 무려 60년이 흐른 뒤에.
제주4·3사건에 대해서는 어렴풋이만 알고 있던 양영희 감독은“1948년 발발한 제주4·3사건에 대해 나는 막연했다. 제주도 태생의 아버지가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 1942년이었고, 어머니는 일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먼 친척이나 아버지의 소꿉친구 중에 희생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정도뿐이었다. 설마 18세였던 어머니가 그 속에 계셨을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잠시 제주4·3사건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제주4·3사건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교과서에 ‘북한 공산당의 사주 아래 일어난 폭동 사건’으로 기록됐다. 1945년 8월 15일, 한반도가 일제강점기를 벗어났지만,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계속되면서 통일독립정부 수립은 요원해졌다. 1947년 3·1절 기념식을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가두시위가 벌어졌다. 제주에서도 3만 명의 인파가 모였고, 가두시위가 벌어지던 중 제주경찰서가 있던 관덕정 광장에서 총성이 울렸다. 경관이 탄 말에 어린아이가 치였는데, 그대로 가려고 하자 도민들이 항의했고, 경찰은 군중들을 향해 무차별 발포했다. 미군정과 경찰은 사과는커녕 정당방위를 주장하며 주동자를 잡아들이기 시작했고, 제주도민의 분노가 커져 갔다.
실상은 제주 경찰이 아닌, 육지에서 급파된 경찰에 의해 이뤄진 무력진압이었다. 제주도민의 반감이 커지며 총파업이 벌어지자, 미군정은 파업 원인을 ‘경찰 발포로 도민 반감이 고조된 것을 남로당 제주 조직이 선동해 증폭시켰다’라고 분석했다. 제주로 파견된 경찰들은 ‘제주도 주민의 90%가 좌익’이라고 공표하며 제주도 총파업 상황을 이념적으로 몰고 갔다. 제주4·3사건이 일어나는 이듬해까지 2,500명의 도민이 검거됐다. 일부 도민들은 한라산 동굴 속에 은신처를 마련하고 피신했다.
1년간 이어진 미군정의 폭정과 무자비한 검거를 견디지 못한 제주도민은 결국 무장봉기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남로당 제주도당 산하 유격대 350명이 제주도 내 12개 경찰지서와 우익 단체를 공격했다. 탄압 저항과 5·10단독 선거 반대가 슬로건이었다. 미군정은 처음에는 협상을 시도했지만, 곧 강공으로 전환했다. 5월 1일, 제주 읍내와 가까운 오라리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청년들이 집집마다 불을 질렀고, 이틀 후인 5월 3일 미군정은 무장대 총공격을 명령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고,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탄생했다. 남과 북이 개별 정부를 수립하면서, 이승만 정부는 정통성에 걸림돌이 되는 제주도 상황이 마뜩잖았다. 미국 역시 제주도 소요 사태를 조속히 끝내기를 독촉하며, 다시 한번 학살이 시작됐다.
10월 17일.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상 들어간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이 발표됐다. 당시 해당 지역에는 1백여 마을에 수만 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고, 제주도 전체 면적의 80%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에서 초토화 작전이 감행된 것이다. 결국 남녀노소 가리지 않은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대규모 총살이 자행됐고, 가축들 역시 ‘폭도들의 양식’이 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몰살됐다. 중산간 마을 가옥 4만여 채도 토벌대의 방화로 불타며 제주도는 불바다가 됐다. <지슬-끝나지 않은 세월2>(감독 오멸, 2009)에서는 한라산 동굴로 피신한 도민들이 감자를 나눠 먹으며 마을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는 장면이 그려지기도 했다.
우리 집 할아버지 제사는 고모의 울음소리부터 시작되곤 했다. 이어 큰어머니가 부엌일을 보다말고 나와 울음을 터뜨리면 당숙모가 그 뒤를 따랐다. 아, 한날한시에 이 집 저 집에서 터져 나오던 곡성소리, 음력 섣달 열 여드렛날, 낮에는 이곳저곳에서 추렴 돼지가 먹구슬나무에 목매달려 죽는 소리에 온 마을이 시끌짝했고 5백위도 넘는 귀신들이 밥 먹으로 강신하는 한밤중이면 슬픈 곡성이 터졌다. - 『순이삼촌』(현기영 지음, 1978)
제주4·3사건의 멍에는 거의 반 세기가 지나서야 회복됐다. 4·3을 ‘국가 공권력의 인권유린’으로 규정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확정됐고, 2003년 10월 15일 고 노무현 대통령은 제주도를 찾아 반세기 동안 고통의 굴레에서 살아온 제주도민과 4·3유족들에게 국가 권력의 잘못을 인정하고 공식 사과했다. 제주도는 2005년 1월 17일, 노무현정부에 의해 ‘세계 평화의 섬’으로 선포됐다.
다시 영화로 돌아오자. 양영희 감독은 “데뷔작 <디어 평양>의 마지막 장이라고 할 수 있는 <수프와 이데올로기>에서는 처음으로 우리 가족과 남한의 관계를 그렸다. <수프와 이데올로기>라는 제목에는 ‘사상이나 가치관이 달라도 같이 밥을 먹자. 서로 죽이지 말고 함께 살자’는 마음을 담았다. 한 편의 영화가 담을 수 있는 이야기는 한계가 있다. 그래도 한 편의 영화가 세계에 대한 이해와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해로 이어진다고 믿고 싶다. 나의 작품들이 많은 이들에게 긍정적인 촉매가 되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지극히 개인적인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역사의 비극을 파헤친다. 어머니로부터 그동안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제주4·3사건에 대해 듣게 된 것이 그가 카메라를 들게 된 이유다. 가치관도, 성격도 정반대여서 서로를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알츠하이머로 점점 잊혀가는 어머니의 기억이 한국의 역사라는 걸 직감적으로 느낀 양영희 감독. 그렇게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시대가 낳은 비극의 한가운데 놓였던 자신의 가족을 통해 인간에 대한 고찰과 우리가 절대 잊어서는 안 될 역사적 비극에 화두를 던진다.
아름다운 제주의 풍광을 보여주며 영화가 끝나고 밀려드는 먹먹함. 한 여인의 기구한 삶의 기억들에는 한국, 북한, 일본 그리고 제주의 아픈 역사가 켜켜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수년에 걸친 딸의 집요한 추적으로 기록으로 남을 수 있었다. 이제 우리가 그녀의 삶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문득 든 생각 하나. 당신은 당신의 아버지, 어머니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고 있는가? 그들의 개인적인 삶이 역사의 변곡점에서 어떻게 굴곡져 그들의 얼굴에 주름을 깊게 패게 했는지 알고 있는가? 한 여인이 질곡진 현대사에서 겪은 이야기를 아프게 그려낸 <수프와 이데올로기>가 지금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더 늦기 전에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를 찾아 이야기를 들어야 할 이유다.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도 그 인생을 기억할 수 있다면, 결코 그 사람은 사라져버린 것이 아니기에.
윤상민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