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이터널 선샤인>(2004)의 결정적인 스포일러로 시작되는 글입니다. 영화가 공개된 지 18년이 지난 만큼 대부분의 독자 여러분이 결말을 아시리라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서술 트릭이 중요한 영화인 만큼 스포일러 경고를 덧붙입니다. 아직 영화를 안 보신 분이라면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얼마 전 몬톡 해변에서 처음 만난 조엘(짐 캐리)과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은 서로가 마음에 든다. 숫기 없는 조엘은 자신의 무채색 일상을 마구잡이로 흔들어 놓는 충동적인 클레멘타인이 좋고, 클레멘타인은 자신의 총천연색 변덕에 어쩔 줄 모르면서도 그걸 받아주는 조엘이 귀엽다. 막 관계가 한 발 더 진전되려던 차, 클레멘타인에게 웬 낯선 소포가 날아온다. 하워드 미어즈왁 박사의 환자분들께. 저는 메리 스베보라고 합니다. 우리는 만난 적이 있지만 아마 당신은 기억하지 못하실 겁니다. 전 당신이 기억을 지우려 찾아온 회사에서 직원으로 일했어요. 그러다 마음을 굳혔습니다. 이런 시술은 너무 끔찍한 일이라고요. 이걸 바로잡기 위해, 여러분 모두의 파일을 돌려드립니다.

자신을 메리(키어스틴 던스트)라고 소개한 여자가 보낸 소포 속 테이프를 틀어보자, 클레멘타인 자신도 기억 못 하는 자신의 음성이 흘러나온다. 제 이름은 클레멘타인 크루진스키고, 조엘 배리쉬를 기억에서 지우기 위해서 왔습니다. 지루한 남자거든요. 그런 이유로 지워도 되나요? 함께 차 안에 있던 조엘은 걷잡을 수 없는 수치심과 당혹감에 클레멘타인을 차에서 내리게 하고는 혼자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집에 돌아온 조엘을 맞이한 건, 클레멘타인이 받은 것과 같은 소포다. 이 두 사람은 이미 예전에 만나 오래 사랑을 했고, 서로를 견디지 못해 헤어졌으며, 인생에서 상대를 지우겠다며 하워드 미어즈왁 박사(톰 윌킨슨)이 운영하는 기억제거회사 라쿠나를 찾아가 기억을 지웠다. 그리고 기억을 지운 탓에 서로를 만났다는 사실을 모르는 두 사람은, 운명의 장난처럼 다시 처음 만났던 몬톡 해변에 갔다가 상대를 다시 발견한 것이다.

미셸 공드리의 2004년작 <이터널 선샤인>의 결말은 얼핏 더없이 로맨틱하게 보인다. 두 사람이 끝내 서로의 단점만을 발견하고 서로를 지긋지긋해 하고 싸우다가 헤어질 것임을 알아도, 이미 한차례 그런 결론을 맞이했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다시 서로를 사랑하기를 선택한다. 그러나 눈 내리는 겨울의 몬톡 해변을 웃으며 달리는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뒷모습으로 끝나는 <이터널 선샤인>의 결말은, 원래 시나리오 속 엔딩과는 사뭇 다르다. 찰리 카우프만이 쓴 시나리오의 엔딩은 이렇다. 나이 든 클레멘타인이 라쿠나를 찾는다. 컴퓨터 스크린에 뜬 환자 파일에는 클레멘타인이 지난 50년간 15차례 기억을 지우는 시술을 받았으며, 그 15차례는 모두 조엘을 지우기 위한 것이었노라 적혀 있다. 결말을 알면서도 다시 용감하게 서로를 사랑하기로 선택했던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50년간 끊임없이 서로를 사랑했다가 증오하고 끝내 기억에서 지우고는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쳇바퀴 안에 갇히는 것. 그것이 찰리 카우프만이 의도했던 엔딩이었다.

카우프만의 비전은 잔혹하다. 하지만 어쩌면 더 현실적인 결말일지도 모른다. 서로 무엇 때문에 싫어졌는지 기억해내지 못하는 두 사람은 같은 실수를 반복할 가능성이 높지 않나. 상대가 나에게서 무엇을 싫어했는지, 어떤 말을 하면 예민하게 반응하고 무슨 계기로 대판 싸웠는지 같은 걸 기억하지 못하니 말이다. 같은 패턴으로 다시 처음 만나게 된 두 사람은, 결국 서로를 같은 패턴으로 처음 상처 입히다가 다시 헤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는 또 기억을 지우면, 언제 그랬냐는 듯 또 우연히 서로를 발견하겠지. 망각은 축복이라고 하지만, 이 경우에는 서로를 잊었기에 더 고통스러운 림보에 빠지게 되는 게 아닐까? 그 사실을 알고 보면, 영화의 엔딩 부분 눈밭을 달리는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뒷모습이 똑같이 세 차례 반복되는 것이 귀엽게만 보이지는 않는다. 어쩌면, 끊임없이 같은 패턴을 반복하며 쳇바퀴 안에 갇히는 두 사람을 그린 원래 엔딩의 흔적이 아닌가 싶어서 말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지금의 엔딩이 사랑받는 건, 조엘의 태도 때문일 것이다. 카우프만이 그렸던 엔딩의 위험은 이미 클레멘타인의 입에서 나온 바 있다.

“난 완벽한 여자가 아녜요, 조엘. 그냥 제 마음의 평화를 찾는 부서진 여자죠. 완벽하지 않다고요.”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을 찾을 수가 없는걸요. 제 눈엔 안 보여요.”

“하지만 보일 거예요! 보일 거라고요. 알잖아요. 곧 내가 거슬리기 시작할 거고, 난 당신한테 질려서 답답해하겠죠. 나랑 있으면 그렇게 되니까!”

카우프만의 엔딩을 고스란히 요약한 클레멘타인의 말에, 조엘은 마치 그게 뭐 어쨌다는 거냐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말한다.

알겠어요(Okay).

그 결말을 뻔히 알면서도, 당신을 사랑하면 그렇게 상처받고 서로를 오해하다가 헤어질지도 모르면서도, 그럼에도 당신이 좋다는 그 한 마디에 클레멘타인은 무너진다. 눈물이 차오른 눈으로 헛웃음을 웃으며, 조엘의 오케이를 따라서 반복하면서. 산 정상으로 돌덩이를 굴리는 일을 계속 반복해야 하는 그리스 신화 속 시시포스 같은 삶이라도 좋으니 당신을 사랑하겠다는 조엘의 강력한 낙관이, <이터널 선샤인>의 예정된 비극을 희미한 희망 속으로 끄집어 냈다. 영화 내내 음울하고 비관적이었던 조엘이, 그 순간만큼은 낙관으로 먼저 상대에게 손을 뻗는다.

우리는 모두 해피엔딩을 원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파괴적인 쳇바퀴를 도는 일이라도 클레멘타인과 함께라면 괜찮노라 결심한 조엘의 결단에 눈물을 훔치고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생각해 볼 일이다. 어떻게 결말이 날지 불 보듯 자명한 경로로, 영혼이 망가지고 같은 상처를 반복해서 받으면서 다시 뛰어드는 게 맞는 일일까? 그게 과연 해피엔딩일까? 우리는 영화가 보여주는 지점까지만 보고 나오면서 <이터널 선샤인>을 의지로 낙관하는 해피엔딩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삶은 눈 내리는 몬톡 해변 이후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고, 우리는 그 삶이 어떤 모습일지 자세히는 몰라도 대강은 알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가 개봉한 지 18년이 지났지만 아직 영화가 남겨둔 질문은 유효하다. 여전히 결말을 해피엔딩으로만 기억하고 있다면, 바로 지금이 다시 조엘과 클레멘타인을 만나 그들이 던지는 질문을 곱씹어 볼 때다.


이승한 TV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