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를 오래 다녀본 사람은 안다. 아이콘 섹션이 부산의 자랑이라면, 숨겨진 보화는 월드시네마 섹션에 있다는 것을. 하지만, 월드 시네마 리스트를 살펴본다면 익숙한 이름보다는 낯선 이름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겁먹지 말자! 여러분들은 이미 이 감독의 작품을 국내에서 접한 적이 있으니. 한 차례 이상 국내에 수입되어 한국 관객들과 극장에서 만난 적이 있는 감독들의 신작을 여러분에게 소개해보겠다. 부산의 현장에서 직접 보고 엄선한 작품들이니 믿고 맘껏 기대하시길!


<여덟 개의 산>

Dir. 펠릭스 반 그뢰닝엔 & 샤를로트 반 더 미르히 <뷰티풀 보이>, <브로큰 서클>

영화 <여덟 개의 산>

티모시 샬라메와 스티브 카렐의 뛰어난 앙상블로 국내 관객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았던 <뷰티풀 보이>의 감독 펠릭스 반 그뢰닝엔의 신작 <여덟 개의 산>은 월드 시네마 섹션에서 가장 많은 화제를 모은 작품이다. 처음으로 배우 출신 각본가 샤를로트 반 더 미르히와 협업으로 제작한 <여덟 개의 산>은 폴란드의 예지 스콜리모프스키의 <EO>와 함께 올해 칸에서 심사위원상을 공동 수상하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이 작품은 알프스산맥을 끼고 있는 시골 마을 몬테로사를 배경으로 시골 소년 브루노와 도시 소년 피에트로의 긴 우정의 여정을 다루고 있다. 알프스라는 탁월한 자연을 배경으로 풍부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와이드 쇼트 역시 매력적이지만, <여덟 개의 산>은 단순히 자연을 풍경으로 소모하지 않고 하나의 큰 매혹으로 담아낸다. 산에서 나고 자라 스스로를 산의 자손으로 여기는 브루노와, 아버지와의 산행에 질려 버린 피에트로, 그리고 두 소년과 함께 산을 오르는 것만이 유일한 삶의 낙인 피에트로의 아버지 지오반니. 세 남자는 모두 산을 매개로 서로를 질투하기도 사랑하기도 그리워하기도 하며 쉽게 정의 내리지 못하는 관계의 축들을 그려나간다.

영화 <여덟 개의 산>

이토록 복잡하게 풀기 어려운 관계들의 변수는 첨예한 대립과 갈등의 폭발로 드러나기보단, 험난한 산길을 오르내리는 등산과 지오반니의 오랜 바램이었던 여름 별장 짓기와 같은 육체적인 활동으로 대체된다. 이는 브루노와 피에트로가 장성한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두 청년 앞에 놓인 삶의 의미라는 산안개 같은 불확실한 의문 역시 산 위에서 답을 쫓게 된다. 산은 이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단순히 광활한 풍광이라기엔 세 남자의 이야기는 모두 산에서 시작해서 산에서 끝나는 것만 같다.


<라인>

Dir. 우르슬라 마이어 <시스터>

영화 <라인>

2012년 레아 세이두 주연의 <시스터>는 <여덟 개의 산>에도 등장한 알프스를 배경으로 어른과 아이에 대한 윤리적인 물음을 던진 문제작이었다. 당시, 이동진 평론가를 비롯한 다수의 국내 평론가의 호평을 받으며 국내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은 <시스터>의 감독 우르슬라 마이어는 이번엔 조금 더 도발적인 인물과 함께 돌아왔다. 베를린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받은 <라인>은 당시 영미권 비평지에서 상당한 호평을 받았던 작품이다.

꽃병과 레코드가 박살이 나고, 비발디의 음악이 흐르며, 악보들이 휘날리는 벽으로부터 주인공 마가렛이 그녀의 어머니 크리스틴의 뺨을 때리기 위해 그랜드 피아노를 축으로 빙글빙글 도는 장면을 슬로우모션으로 촬영한 이 도발적인 오프닝은 본편의 파격성을 드러내는 충격적인 서막과도 같다. 어머니를 폭행하고 100m 이내 접근 금지를 명령받은 마가렛은 끊임없이 그녀의 가족들 곁을 맴돈다. 하지만, 법의 범위 안에서 그녀는 결코 그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영화의 제목 <라인>은 심리적인 선뿐만 아니라 접근금지 명령 범위라는 물리적인 선을 의미한다.

영화 <라인>

기존 영화에선 항상 폭력성을 지니고 충동적이기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캐릭터는 언제나 남자의 몫이었다. 가깝게는 야쿠쇼 코지가 연기한 <멋진 세계> 속 주인공 미카미에서 멀게는 마틴 스콜세지의 명작 <분노의 주먹> 속 제이크 라모타까지. 하지만 <라인>은 여성 역시 이러한 폭력성을 지닌 캐릭터가 될 수 있음을 과감하게 드러낸다. 온통 멍이 든 몸과 얼굴로 대화를 요구하는 마가렛의 절규를 보고있자면 답답함과 위태로움이 가득 느껴지지만, 그 절박함이 곧 <라인>을 지탱하는 강력한 에너지다. 선 위에 서서, 선을 넘어서는 안 되는 그녀의 삶을 <라인>은 세밀하게 그려내려 한다.


<믿거나 말거나, 진짜야>

Dir. 쿠엔틴 듀피유 <디어 스킨>

영화 <믿거나 말거나, 진짜야>

2019년 파격적인 풍자와 해악으로 기이한 에너지를 뿜어내는 <디어 스킨>으로 국내 영화팬들에게 전격적인 지지를 받은 이야기꾼 쿠엔틴 듀피유가 2년 만에 부산에 돌아왔다. 배두나와 함께한 <#아이엠히어>의 주연으로 잘 알려진 프랑스의 국민배우 알랭 샤바와 함께한 이번 작품은 베를린 영화제의 스페셜 갈라 섹션에 초청받으며 베를린을 한바탕 뒤집어 놓았다.

<믿거나 말거나, 진짜야>를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실없는 소리와 기발한 상상력의 연속이다. ‘만약 이사한 집 지하에 마법의 터널이 있다면?’ 이라는 터무니없는 가정에서 영화는 출발한다. 월급쟁이 알랭은 살면서 처음으로 자기 집을 마련하게 된다. 이 집을 소개해준 중개인은 알랭 부부에게 집의 비밀을 이야기하는데, 지하에 있는 터널을 이용하면 12시간 후로 이동할 수 있다는 것! 알랭의 아내 마리는 처음엔 그 터널을 꺼렸지만, 이내 그 터널에 매료되어 수도 없이 그 터널을 들락날락한다.

영화 <믿거나 말거나, 진짜야>

반면 알랭은 괴짜 사장과 더 괴짜 같은 진상 고객에 시달리며 업무에 허덕이느라 터널을 이용할 여유조차 없다. 괴짜 사장 제라르는 최신 성기 수술을 받는데 온 신경이 팔려있다. <믿거나 말거나, 진짜야>는 이런 터무니 없는 일들의 연속이다. 직관적이지만 파격적인 비유들을 이용해 인간이 지닌 원초적인 욕망인 젊음과 섹스에 대해 말하며 끝내 이 미치광이 우화의 끝은 예술과 시간이라는 개념까지 도달한다. 이 영화에 대한 코멘트가 너무 무거워 보인다면 겁내지 말자. 부산에서 첫 회차 상영 당시 객석은 폭소로 가득했으니깐.


<와서 직접 봐봐>

Dir. 호나스 트루에바 <어거스트 버진>

영화 <와서 직접 봐봐>

뜨거운 햇살이 내리는 마드리드의 8월을 잔뜩 담았던 싱그러운 영화 <어거스트 버진>으로 한 차례 국내 관객과 만났던 스페인의 신예 감독 호나스 트루에바의 신작이 한국을 다시 찾아왔다. 올해 5월 이미 한 차례 전주국제영화제에서 220분의 엄청난 분량을 자랑하는 장편 <누가 우릴 막으리>로 함께했던 그가 이번엔 엄청나게 짧은 65분의 장편 <와서 직접 봐봐>로 부산에도 도착했다. 덕분에 호나스 트루에바는 올 한해에만 국내 3대 영화제 중 2개의 영화제에서 얼굴을 비춘 보기 드문 해외 감독이 되었다.

<와서 직접 봐봐>는 코로나라는 시의성을 그대로 관통하는 영화다. 2020년 10월의 마드리드에서 시작한 영화는 스페인의 유명 피아니스트 차노 도밍게즈의 공연을 보러온 두 젊은 커플을 보여준다. 셧다운 기간에 그가 작곡한 림보라는 곡을 꽤 긴 호흡으로 감상한 그들은 이윽고 대화를 이어 나간다. 마드리드에 사는 딩크족 부부인 엘레나와 다니엘은 아이를 가지면서 교외로 이사를 간 수잔나와 기예르모 부부와 셧다운으로 인해 오랜만에 만나게 된다. 수잔은 그들의 시골집으로 엘레나 부부를 초대하는데, 내심 가기가 불편한 눈치다. 미루고 미루다, 날이 풀린 4월의 어느 날 엘레나 부부는 수잔나 부부의 집으로 향한다.

영화 <와서 직접 봐봐>

<와서 직접 봐봐>는 평범한 일상과 지식인들의 대화로 가득하다. 도심과 교외, 마스크와 마스크 이전, 환경과 자본, 임신과 비출산. 두 커플을 나누는 대립 항은 분할되는 쇼트로 표현된다. 거리두기로 끊임없이 서로를 나누었던 코로나의 시국처럼 두 부부의 대화에는 끊임없는 불안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이내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가려는 지금의 모습처럼 따스한 4월의 햇살이 비추는 봄날 아래 나눠지고 불편해하던 이들은 하나로 모인다. <와서 직접 봐봐>는 두 부부의 모습을 통해 지금의 세계를 조금 더 긍정적으로 바라보려는 따스한 봄바람의 시선으로 가득하다.


글 씨네플레이 최현수 객원기자

사진 부산국제영화제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