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미주리 주 에빙 외곽 도로 드링크워터 로드에 방치되다시피 한 광고판 세 개를 본 밀드레드(프랜시스 맥도먼드)는 생각한다. 이 거대한 빈 칸에 내 딸 안젤라의 죽음을 묻겠다고. 광고판 세 개에 실은 메시지는 너무도 간명해서 보는 이의 폐부를 찌른다. “강간당하고 죽었다.”, “그런데 아직 못 잡았다고?”, “윌러비 서장, 어떻게 된 일인가?” 광고 회사 사장 윌비(케일럽 랜드리 존스)는 다니는 사람이 적어 광고 효과가 없을 거라 말했지만, 메시지가 저 정도로 선명하면 없던 사람들도 모이는 법이다. 에빙의 주민들은 모두 입을 모아 광고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광고에 실은 것처럼, 밀드레드의 딸 안젤라(캐서린 뉴튼)는 친구 집까지 걸어가는 길에 강간살해를 당했다. 그리고 수 개월이 지났지만 경찰 수사는 답보상태다. 경찰이라고 노력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이렇다 할 증거나 목격자도 찾지 못한 상태에선 어찌 할 도리가 없다. 췌장암을 앓고 있는 경찰서장 윌러비(우디 해럴슨)는 밀드레드를 설득한다. 밀드레드, 나 죽어가요. 그래도 저 광고를 싣겠다고요? 밀드레드는 단호하다. 당신이 죽어가는 거 알고 있어요. 그래서 지금 실어야 해요. 당신이 죽고 나면 저 광고는 지금처럼 효과적이진 않겠죠. 광고가 화제가 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에 관심을 가질 테고, 그러면 범인을 잡을 확률도 올라가겠죠. 밀드레드의 싸늘한 반응에 윌러비는 할 말을 잃는다.
밀드레드라고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라서 그런 게 아니다. 광고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 치과의사의 손가락을 치과 드릴로 뚫어버린 혐의로 경찰서에 잡혀온 밀드레드를 취조실에 앉혀놓고, 밀드레드와 팽팽하게 비아냥을 주고 받던 윌러비는 돌연 기침을 하며 밀드레드의 얼굴에 피를 토한다. 방금 전까지 단 한 마디도 지지 않으려고 기를 세우던 밀드레드는, 피를 토하고 당황한 윌러비를 걱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본다. 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밀드레드는 사과하는 윌러비를 안심시킨다. 괜찮아요, 알아요. 사람 불러올게요. 광고판은 광고판이고 사람은 사람이라는 듯, 밀드레드는 제 얼굴에 피를 토한 윌러비를 달랠 만큼 따뜻한 동시에 죽어가는 윌러비를 공개적으로 비난할 만큼 냉정하다. 사람은 본디 그렇게 모순된 존재인 걸까.
<쓰리 빌보드>(2017)는 밀드레드를 따뜻하게 그릴 생각이 없다. 심지어 관객들에게 밀드레드를 싫어할 법한 이유까지 넉넉하게 던져준다. 애초에 안젤라가 친구 집에 걸어가게 된 이유는 밀드레드가 차를 빌려주지 않아서였다. 그 날 밀드레드와 안젤라는 차를 빌려주네 마네를 두고 불 같이 다퉜다. 가는 길에 강간이나 당해라. 당연히 진심으로 한 말은 아니었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네. 안젤라도 진심은 아니었을 것이다. 평소에도 입이 거칠기 짝이 없는 밀드레드와 엄마를 꼭 닮은 안젤라 사이에서 다툼이 벌어지면, 왕왕 그런 말들이 오갔으리라. 정말로 그런 일을 당할 줄 알았더라면, 그게 마지막일 줄 알았더라면 그런 대화를 나누진 않았겠지.
그래서 영화를 보는 이 중 누군가는 밀드레드가 불편했을지 모른다. 경찰이 최선을 다 하고 있지 않은 것도 아니고, 서장은 하루가 다르게 죽어가고 있으며, 밀드레드 또한 딸의 죽음에 책임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밀드레드는 자책을 속으로 꾹 삼켜가며 단호하게 말한다. 논란이 되고 화제가 될수록 이 사건을 알게 되는 사람들은 더 늘어난다고. 하긴, 이거 말고 더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이 있을 것이며, 이거 말고 밀드레드가 취할 수 있는 전략은 또 뭐가 있겠나. 다가가서 이해한다고 말하기에는 지나치게 메마르고 까칠한 사람, 사람들이 머릿속으로 그리는 전형적인 범죄 유가족 상과는 차이가 있는 사람, 그러나 차마 그런 이유로 외면할 수는 없는 너무도 분명한 피해자. 밀드레드는 그런 사람이다.
우리는 종종 은연 중에 ‘이상적인 피해자상’을 머릿속에 그리곤 한다. 슬픔에 잠겨서 아무 것도 못하고 있다가, 누군가 다가가서 위로의 말을 건네면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숙이는, 그 누구도 번거롭게 하지 않고 무해하게 위로만 받는 그런 존재, 그 어떤 일말의 책임도 없이 온전히 피해만 입은 순결한 피해자. 이 그림은 누구를 위한 걸까? 아마 ‘다가가 선뜻 위로의 손길을 보내는 나’를 위한 그림일 것이다. 내가 부담 없이 위로를 건네기 좋은 상대, 그 위로를 받으면 고개를 숙이며 감사하다고 말하는 것으로 내 효용감을 채워 줄 상대, 다른 소동을 피우지 않아서 그저 위로하는 행위만으로 깔끔하게 일이 끝날 수 있는 상대. 이 모든 욕망은 ‘위로하는 나’를 향한다.
하지만 피해자도 사람이다. 제 피해를 조금이라도 회복하기 위해 발버둥쳐야 하는 사람, 이 피해는 어떤 연유에서 어떤 경위로 일어난 것이며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지 어떻게든 밝혀야만 하는 사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세상에 못할 일 같은 건 없는 사람 말이다. 그리고 그런 이들의 움직임에 잡음이 없을 수 없다. 진실을 찾겠다며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일이 조용할 리가 있나. 말로 다 못할 피해를 회복하기 위해 사과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작을 리가 있나. 핏발 선 눈으로 한 맺힌 이야기를 토해내는 피해자들은, 결코 ‘이상적인 피해자상’은 아닐 것이다. 당연하지. 위로하는 타인 속이 편하라고 존재하는 사람들이 아니지 않은가. 밀드레드와 그의 광고판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지난 할로윈에 있었던 이태원 10.29 참사를 두고 벌써부터 피해자를 탓하고 희생자 유가족을 탓하는 목소리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기 시작한다. 그다지 옮기고 싶지 않은 댓글들을 보면서 나는 생각한다. 분명 이번에도 피해자다운 피해자가 되기를, 이상적인 피해자상을 수행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겠구나. 이 모든 일이 시끄럽지 않게 조용히 지나가기를 바라 마지 않는 이들이 있으리라.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희생자 가족들은 참사의 원인, 대응 과정, 향후 대책 등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듣지 못했고, 풀리지 않는 의문도 많”기 때문이다. (양홍석 변호사 페이스북 게시글 중 인용) 그리고 보는 이들이 좋든 싫든, 답을 찾는 그들은 시끄러울 권리가 있다. 부디 그들이 고립되지 않기를, 더 많은 이들이 그들이 세울 광고판을 지지해주기를 바란다.
이승한 TV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