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은 대런 애러노프스키의 <블랙 스완>과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셉션>이 나온 해였다. 관람 후의 감상에 호불호가 뚜렷하게 드러날 수는 있지만, 두 작품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지 못한 관객은 드물 것이다. 넓게 본다면 <블랙 스완>과 <인셉션>은 공통적으로 인간의 무의식에 물성을 부여한 영화들이다. 비현실성이 필연적으로 따라 붙는 작품 속 공간을 설득력있게 전달한 건 빈틈을 찾기 힘든 세계관과 영상미다.

공교롭게도 2010년에는 <블랙 스완>과 <인셉션>을 두고 내내 언급되는 인물이 사망했다. 일본의 만화가이자 애니메이션 및 영화 감독인 콘 사토시다. 그가 췌장암 투병 중 46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기까지 남긴 애니메이션 장편은 단 5편. 데뷔작 <퍼펙트 블루>부터 유작 <파프리카>까지 거를 타선이 없는 걸작들이다.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정서는 현실적 일상 속의 비현실적 환상인데, 그 상상력을 하나의 시퀀스로 구현하는 능력은 사후 12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회자된다.

대런 애러노프스키는 끝까지 부인했지만, 콘 사토시의 <퍼펙트 블루>가 없었다면 <블랙 스완>은 나오지 못했을 영화다. 전직 아이돌 출신 배우의 정신 분열과 발레리나의 광기 어린 욕망이 단순히 비슷해 보이는 플롯을 지닌다면, 장면의 유사성은 <블랙 스완>에 <퍼펙트 블루>의 DNA가 몰래 주입됐다는 걸 확신하게 한다. 대런 애러노스프스키에게는 이미 <레퀴엠 포 어 드림>에서 <퍼펙트 블루>의 장면을 차용한 전적이 있다. 이에 관해선 콘 사토시도 대놓고 물어본 적이 있는데, 당시 대런 애러노프스키는 "오마주"라는 무책임한 답을 내놨다.

영화 <파프리카>

<인셉션>은 <파프리카>와 유사하다는 의견이 여전히 나온다. 두 영화 모두 작중 세계관에 타인의 꿈, 무의식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는 기계가 존재하고 이를 통해 현실 세계를 바꾸려 하는 인물들이 있다. 사실 이 설정만 두고 <인셉션>에 <파프리카> 표절 혐의를 씌우기엔 증거가 부족하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2001년 <인셉션>의 초안을 워너브라더스에 냈고, <파프리카>는 2006년에 나왔다. 크리스토퍼 놀란이 <인셉션>과 관련해 어딘가에서 내용 상의 영감을 받았다고 생각한다면 영화 <더 셀>(2000), <드림 스케이프>(1984)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러나 문제는 표현 방식이다. 비슷한 이야기와 설정을 동일한 장면으로 구현했다면, 이후의 작품이 이전의 작품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건 눈 가리고 아웅 격이다. <파프리카>에서 파프리카(하야시바라 메구미)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공간의 균열을 목격하고 손을 대자마자 그것이 깨지고 다른 공간이 나타나는 장면은 <인셉션>에서 의상까지 유사한 모습으로 다시 등장했다.

이처럼 콘 사토시 감독은 숱한 작품에 영감을 선사한 비주얼리스트였다. 그의 마지막 작품인 <파프리카>는 '꿈'과 거기에 다가가려는 '과학'을 바라보는 두 개의 시각을 비춘다. 정신의료종합연구소의 이사장 이누이(에모리 토오루)는 꿈을 아직 인간이 제어 장치 없는 과학의 흙발로 짓밟지 않은 순수의 공간으로 여긴다. 반면 치바와 시마(호리 카츠노스케), 토키타(후루야 토오루)는 다르다. 과학은 꿈을 통해 인간이 스스로 자각하지 못한 상처에 접근하고 이를 치유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믿는다.

영화 <파프리카>

이들은 연구소에서 만든 DC미니 샘플 3대의 분실 사건으로 부딪힌다. DC미니는 말하자면 '꿈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열쇠'다. 이 기계를 머리에 착용하면 남의 꿈에 들어갈 수 있고, 같은 꿈을 공유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직 잠에 들지 않은 상태에선 쓸 수 없으며, 제어 장치를 달지 못한 미완성품이다. 마음만 먹으면 동의 없이도 남의 꿈에 잠입해 정신병 환자의 꿈을 이식해 버리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니까 다이너마이트가 폭발물을 안정적으로 다루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것과 달리 전쟁과 테러에 더 이용됐던 것처럼, 정신 치료를 위해 생산된 DC미니가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할 만큼의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이것이 꿈을 공유하는 기계가 될 지, 지배하는 기계가 될 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치바는 보이지 않는 DC미니 도둑들을 붙잡으려 한다. DC미니가 악용될 때 어떤 끔찍한 일이 벌어질 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치바에게는 파프리카라는 18세 소녀 형태의 자아가 있는데, 파프리카는 꿈 속 세상에서 자유자재로 변신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는 이 능력을 통해 현실의 자아와 다른 모습으로 꿈 속에서 탐정이자 치료사로 활약한다. 우울증 환자의 무의식 속 우울의 원인을 찾고, 과대망상 환자의 풍선처럼 부푼 자아를 터뜨려 진정시킨다.

영화 <파프리카>

<파프리카>에서 DC미니 도난 사건을 촉발하고 갈등을 고조시킨 건 극 중 인물들의 무의식에 내재된 트라우마다. 첫 번째로 잡힌 범인 히무로는 연구소 직원이었지만 천재인 동기 토키타에게 늘 열등감을 품고 있었다. 하반신을 쓰지 못하는 이누이는 늘 과학의 오용을 걱정하는 듯 연구원들을 닦아 세우지만, 그의 행동은 유일하게 자신의 육체가 자유로운 꿈 속을 DC미니라는 매개로 타인과 공유하기 싫은 어리광에 불과했다. 히무로와 마찬가지로 토키타와 치바를 질투하는 오사나이(야마데라 코이치)는 이누이에게 협조해 꿈의 세계를 지배하려 한다.

그저 파프리카의 환자 한 명으로, 연구소와 전혀 관계가 없는 것 같아 보이는 코나카와(오오츠카 아키오)의 트라우마 극복 과정은 사건 해결의 열쇠다. 어릴 적 영화감독의 꿈을 공유하던 친구가 죽고, 그 죄의식이 왜곡돼 남은 트라우마로 불면증에 시달리던 코나카와는 DC미니로 자신의 꿈에 들어온 파프리카의 치료를 받는다. 그러나 DC미니 도난 이후 무엇이 누구의 꿈인지, 혹은 전부 현실인지 알 수 없을 만큼 뒤섞인 시공간에서 도움을 받는 건 코나카와만이 아니다. 코나카와가 트라우마의 실체를 확인한 후 이를 제거한 다음부터, 꿈 속에서 그는 파프리카의 어엿한 조력자다.

영화 <파프리카>

<파프리카> 속 DC미니의 시작점은 모종의 유희였다. 이 기계를 개발한 토키타는 그저 자신의 천재성을 입증하고 싶었고, 즐길거리가 필요했다. 사건 이후 이사장 이누이의 지시로 DC미니 개발이 중단됐지만 토키타는 개의치 않는다. 다시 만들면 되기 때문이다. 그의 비상식적 재능에는 응당 책임감이 따라야 하지만, 토키타는 자신의 꿈만 먹어 자아만 비대해진 아이에 지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문을 쉽게 통과하지 못할 만큼 거대한 그의 몸집은 자아의 크기와도 동일하다. 이 같은 토키타의 태도에 불만을 갖고, DC미니를 정신 치료에 쓰고자 하는 치바 역시 자신의 무의식이 가진 영향력을 무시하는 교만함을 보여 준다. 두 인물의 대비와 각자의 성장을 통해 영화는 '꿈 속에 들어가기를 꿈 꾸는 자'의 책임론을 말한다. 그들이 재능을 제어할 수 있다는 오만을 내려 놓고 나서야 꿈과 현실은 제자리를 찾는다. 빛이 있기에 어둠이 있고, 현실이 있기에 꿈이 있다는 사실을 잊고 조화를 깼던 자들은 심판을 받았다. 그래서 <파프리카>라는 멋진 꿈을 꾸고 깨어난 치바와 토키타는 그 조화를 책임지고 지키기로 한 것이다.

지난 여름엔 이 명작의 실사화가 발표됐다. 데드라인 등은 아마존 스튜디오와 하이브마인드가 <파프리카> 시리즈를 만든다고 알렸다. 이에 따르면 총괄 제작과 감독은 영화 <버즈 오브 프레이>와 <데드 피그스>를 연출한 캐시 얀이 맡는다.


칼럼니스트 라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