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의 암흑기라고 불린 시기가 있었다. 국내에서 만들어지는 영화는 단지 편 수를 채워 외화를 수입하기 위한 허가 수단 정도로만 여겨지고, 검열하는 가위가 최고의 연출이었던 어두운 때였다. 명작이 탄생하는 가운데에도 3S 정책에 포함된 영화는 창작보다는 시선 돌리기용 이정표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런데 문민 정부가 들어섰고 사전 검열에 대한 인식은 달라졌으며 대기업의 자본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그 시기쯤에 <투캅스>(1993)가 개봉하며 금기시 되어오던 경찰에 대한 리얼한 묘사가 자유로운 분위기를 만나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다. 5공 시절에 범람했던 경찰의 부패를 따끔하게 조롱하여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끈 것이다. 그러나 "강력반 새끼들은 좀 받아먹어도 된다"는 인식은 여전했기에, 이는 반쪽짜리 쇄신처럼 보인다. 이런 분위기가 용인됐으니 목전에 다가온 IMF를 읽지 못한 걸지도 모르겠다.
10년 뒤에 개봉한 <공공의 적>(2002)에는 더 심한 부패 형사가 등장한다. 그러나 부모를 죽이고 주변을 파탄내는 더 나쁜놈은 도저히 두고보지 못하는 강동서 강력반 강철중 형사는 윗선과 검사의 명령을 어기고 돌진해 범인을 박살낸다. 도리를 인지한 인물이 상부가 주는 눈치는 뒤로 한 채 저돌적인 행태를 보이는 것은 같은 해에 지도자가 된 고 노무현 대통령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1987> (2017)에서 알 수 있듯이 80년대 당시의 경찰은 권력의 앞잡이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변하여 시민의 편에서 활약한다는 암시를 읽을 수 있는 시기였다.
공공의 적 시리즈가 저물어 갈 때 쯤 본격적인 범죄물들이 쏟아졌다. 범인을 잡지 못하는 80년대를 통해 현재의 안녕을 묻는 <살인의 추억> (2003) , 무력감을 느낀 개인이 움직이는 <오로라 공주> (2005), <세븐 데이즈> (2007) 등이 쏟아졌다. 여기까지 오면서 양상이 바뀌기 시작한다. <투캅스>와 <공공의 적>에서 보여진 비교적 귀여운 톤에 비해 훨씬 장르적으로 강화되며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과거를 그리며 현재를 반추한 <살인의 추억>이 과거 시절 살인마의 순한 맛이었다 치면, <추격자> (2008)는 현재와 다를 바 없는 인물인 유영철을 그리며 아예 호러무비의 반열에 올라간다.
변화하는 공권력 속 악당의 속성
그런데, 이 영화들 속에서 공권력은 어디에 있었을까? 경찰들은 무능하거나 꾸물거렸고, <괴물>(2006) 에서 처럼 피해자의 가족의 말을 무시하거나, 눈치를 보느라 엉뚱한 해결책만 쫒아간다. 마치 70년대 할리우드에서 유행하며 민간단체가 직접 정의를 찾아가는 <찰스 브론슨의 추방객> (1974)처럼, 어려운 조건을 무릅쓰고 고생스럽게 범죄에 대응했던 일반인들이 보인다.
악당들은 진화한다. 본디 음습한 곳에서 사시미로 뱃속을 휘젓던 악당들은 사회에 음험하게 침투하여 세상의 치안을 유린했다. 반면에 극속에서 정의의 편에 섰던 공권력의 주인공들은 영화보다 더 한 현실에서 자멸한다. 특수부대 출신의 주인공이 상대를 격파하는 <아저씨> (2010), <악마를 보았다> (2010)의 주인공은 멋졌고, 드라마 <아이리스> (2009), <아테나 ; 전쟁의 여신)(2010), <아이리스2> (2013)에서는 더 멋졌다. 하지만 국정원 요원들은 댓글 사태를 일으키며 스스로를 좀 먹었고, 미디어에서 그들은 자취를 감췄다.
이뿐만 아니라 이명박 정부 시절엔 국고 보조금 부정수급에 관한 경찰의 광범위한 비리가 밝혀지며 수사권 조정은 물건너가는 분위기가 연출됐다. <추격자>는 아예 공권력의 거대한 진공상태를 보여주고, <부당거래> (2010)에서는 경찰과 검찰의 파워게임이 묘사된다. 여기서 줄도 빽도 없는 존재는 정상으로 가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결국 권력을 업은 큰 존재를 넘지 못하고 죽임을 당한다. 그 큰 존재는 어떻게 됐을까? 떵떵거리다 못해 공화국을 세울지도 모르겠다.
이후 사적 복수를 소재로 하는 영화가 많이 양산됐다. 당시 OECD 회원국 중에서 경찰 신뢰도가 두번째로 낮은 것과 연관이 있다고 본다면 과장일까?
최근의 경향
2016년 들어 국정농단의 야단법석이 벌어졌다. 영화에 등장하는 (부정적) 공권력, 그리고 주로 이에 대항하는 세력에 관한 묘사가 많이 들어간다. 가장 드라마틱한 삶을 지닌 자를 그리는 <변호인> (2013), 현대사 최대 비극을 관통하는 <택시운전사> (2017), 그 비극의 끝을 알리는 포문이었던 <1987> 그리고 최근의 <헌트> (2022)까지 그 경향이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검찰의 권력은 강해졌고, 총장은 상사의 목을 죄기에 이르렀다. 상사에게 윤리, 법리적인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필요 이상의 가혹함을 펼치는 과정은 법치주의가 추구하는 정의가 아니었다. 박근혜 정권 후반에 권력과의 암투를 그린 <내부자들> (2015) 이후 검찰은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검경 수사권이 필요한 상태에서 비교적 경찰의 편을 들어줬던 문재인 정부의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은 <범죄도시> (2017> 시리즈였다.
우리는 여기서 다른 절차보다 국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기 위해 폭주 기관차처럼 달려가는 공권력을 본다. 거기서 질서가 무시되거나 현실의 고증이 좀 틀려도 용인이 될 정도로 관객을 자극한다. 이는 코로나 시기 이후 첫 천만관객으로 이어진다.
검찰 출신들이 합법적으로 요직을 차지한 지금, 그들의 모습이 본격적으로 묘사되고 있지는 않다. 그들은 앞으로 미디어에 어떻게 그려질까?
기대했던 자경단, 혹은 공권력의 엔딩.
<다크 나이트> (2008)의 배트맨이나 웨스턴 무비속 츤데레 악동같은 주인공은 빌런을 물리치면 어둠이나 석양을 향해 사라지기 바쁘다. 국가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개인이 풀게 되면 그 히어로들은 국가와 공존하지 못한다. 실제 공권력은 스스로의 무기력이나 한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큐티한 형사 마석도 (마동석 분)가 물리치는 것은 권력층이 아니라 악마화된 어떤 존재다. 그렇게 관객이 1차원적인 빌런을 향한 카타르시스를 쏟아낼 때 자칫 가려지는 것은 진짜 악당이다. 권력을 업은 존재가 일삼는 악행이나 범죄의 심대한 원인이 되는 어떤 뿌리가 아닌 것이다. 영화 속 공권력이 이런 '안전한' 장치가 아닌 정말 가려운 곳을 끄집어내 터트린다면 사회를 묘사하는 장르 영화가 돈을 벌어가며 환원할 수 있는 범위는 넓고 깊어질 것이다.
프리랜서 막노동꾼 이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