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조건 아름답고 사랑받아야 할 존재일까?
영국의 배우 자밀라 자밀은 2018년 인스타그램에 '아이 웨이(i_weigh)'라는 계정을 만들었다. 계기는 '유명한 것으로 유명한' 미국 셀러브리티 킴 카다시안의 몸무게가 공개된 한 리얼리티 프로그램이었다. 해당 방송은 자막을 통해 시청자들에게 물었다. 카다시안은 이 정도인데, 당신의 체중은 얼마나 나가는가? 자밀은 이 질문에 '아이 웨이' 운동으로 답했다. 외모로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지 말자고 주장하며, 단지 자신이 재는 것은 몸무게가 아니라 멋진 친구들과 일에 대한 애정, 경제적으로 독립된 삶과 여성의 권리라고 외쳤다.
이후 자밀은 아이 웨이 운동에 동참하는 다양한 인물들과의 인터뷰를 인스타그램에 공유했다. 이들은 얼굴이나 신체가 나온 사진과 함께, 그것만으로는 알 수 없는 자신에 대해 설명했다. 취미와 특기, 성격과 직업, 스스로의 장점 같은 것들이었다. 말하자면 아이 웨이 운동은 한 인간이 갖고 있는 외모와 외모 외의 요소들을 분리하는 작업이었다. 후일의 변질이나 왜곡을 차치하고, 태초부터 시작된 외모지상주의의 역사에 유의미한 칼날을 댄 운동이었음은 분명하다.
살면 살수록, 사람들은 평가하고 평가 당하는 것에 익숙해진다. 평가에는 늘 기준이 필요하다. 미디어는 그 기준을 모두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쉬운 형태로 끊임없이 생산한다. 대표적인 예가 수치화된 체중이고, 그것이 반영된 체형이다. 제시된 모양에 꼭 맞지 않는 자신을 깎아내야 평범하게라도 살아갈 수 있는 상황에서, 자신을 긍정하기란 쉽지 않다. 나보다 더 엄격한 사회적 기준에 벗어난 사람과 비교하며 억지 자신감을 채우는 긍정 방식은 비열하지만, 동시에 가장 간단하다.
그러나 외모지상주의의 박해를 더 많이 받았던 여성들의 각성으로, 어찌 됐든 세상은 변하고 있다. '바디 포지티브'의 맥락에서 아이 웨이 운동과 탈코르셋 운동이 더 많은 이들에게 전파됐고, 이제 사람들은 타인의 시선 없이도 자신의 몸을 온전히 긍정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걸 안다. 옳고 그름을 떠나 자기 몸 긍정이 가능성의 영역으로 접어든 것이다.
최근 수 년 사이 바디 포지티브와 아이 웨이 운동은 알아둬야 할 시사 상식이나 마켓 트렌드로서의 자리는 확보했다. 인식을 바꾼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자기 몸을 스스로 긍정해도 된다는 허가가 떨어진 건 아니다. 아이 웨이 운동의 필터 버블 바깥의 더 큰 세상에는 여전히 외모나 체형이 가치 판단의 제1근거로 작용한다. 영화 <나는 살을 빼기로 결심했다>와 <아이 필 프리티>는 각각 비만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며 공고한 외모지상주의와 바디 포지티브의 혈투를 그린다.
<나는 살을 빼기로 결심했다>의 잉주안(채가인)은 100kg이 넘는 큰 몸집 탓에 안팎으로 구박을 당하는 인물이다. 집에서는 철저히 체형 관리를 하는 엄마에게서 눈총을 받고, 서른이 넘도록 취직 한 번 하지 못했으며, 마트나 버스에서도 곱지 않은 시선에 시달린다. 하지만 그 타박들이 없다면 잉주안은 불편하지 않다. 엄마가 운영하는 유치원의 영양사로서 아이들에게 맛있는 밥을 해 줄 수 있다면 그걸로 행복한 하루를 보낼 수 있다. 세상이 그를 그로서 있도록 놔두지 않을 뿐이다.
자신의 몸을 향한 전방위적 압박에 잉주안은 다이어트 센터에 다녀 볼 결심을 하게 된다. 늘 친절한 택배기사 우(장요인)를 짝사랑하게 된 것도 이에 한몫했다. 우 역시 과거에 몸집으로 놀림을 받고 살을 뺐던 경험을 공유하며 잉주안과 마음을 나눈다. 그는 "세상에 살찐 사람은 많으니 자신이 너무 별나다고 생각하지 마라"라고 조언하면서도 "세상이 바뀌는 것보다 내가 바뀌는 것이 빠르다"라며 잉주안에게 체중 감량을 권한다. 하지만 우는 먹은 것을 전부 게워내는 식으로 지금의 체형을 유지하고 있었고, 잉주안은 더 이상 단순한 노력 만으로 이 몸매 평가 지옥을 벗어나지 못하리란 생각에 위 절제술을 받는다.
<아이 필 프리티>의 르네 베넷(에이미 슈머)도 보통보다 살집 있는 체형으로 평가 절하된 캐릭터다. 지금도 살기 힘든 건 아니지만, 르네는 더 사회적인 아름다움을 동경한다. 그는 빼어난 외모만 있으면 세상 모두가 마음을 열 것이라고 믿는다. 살을 빼기 위해 찾은 헬스클럽에서 스피닝을 하다가 자전거에서 떨어지며 기절한 르네. 깨어나서 본 거울 속에는 그토록 바라던 미인의 모습이 있었다. 그때부터 르네는 자신이 꿈꿨던 미인의 삶을 살기 시작한다.
르네가 절세미인으로 보이는 건 스스로일 뿐, 실제로 그에게 바뀐 것은 넘치는 자신감을 얻었다는 사실밖에 없었다. 모두가 자신을 아름답다고 생각한다는 착각 속에 르네는 거침이 없다. 하지만 꼴불견 같았던 르네의 자신감은 그를 승승장구하게 만든다. 남자도 생겼고, 회사에서 원하던 자리를 얻었으며, 중요한 기획까지 맡게 됐다. 그가 화려한 삶에 도취된 사이 친구들은 멀어졌고, 자신감은 자기 긍정을 넘어 남을 무시하는 형태로 변질돼 있었다.
그러던 중 또 한 번 머리를 다친 르네는 제정신으로 돌아온다. 자신이 갑자기 미인으로 보였던 건 환상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그의 자신감은 증발해 버린다. 늘 그렇듯 원래 있던 존재들의 소중함을 되새기면서 말이다. 다시 평범함이 간절한 곳으로 호명된 르네는 돌연 외모지상주의적 시선에 굴하지 않는 여성들을 응원하며 일상을 되찾는다.
비만 여성과 외모지상주의를 줄이음한 영화들이 그렇듯, 두 작품은 '자신을 긍정하라'라는 메시지를 던지며 끝을 맺는다. 그런데 그 모습은 극과 극이다. <나는 살을 빼기로 결심했다>의 잉주안은 제목과 달리 살 빼기를 때려치운 듯하고, <아이 필 프리티>의 르네는 다시 한번 머리를 다치길 바라는 마음을 조금 담아 운동을 시작한다. 이제 혼란스러워진다. 자기 긍정은 생긴 대로 사는 것인가, 더 사회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인가?
정답이 존재하는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이 의문은 바디 포지티브와 아이 웨이 운동의 일부 행보, 그리고 두 영화의 맹점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체형이 남다르게 큰 사람들이 겪는 차별적 시선과 그 대척점에 있는 '아름다움'을 줄곧 보여주다가 갑자기 '자기 긍정'이라는 답이 도출되는데, 그 사이의 복잡다단한 사회적 과정들은 제거된 채다. 살찐 것이 나를 실패하게 만들어서는 안 되지만, 그 상태가 건강하지 못하다면 긍정의 대상으로 볼 수 없다.
일각에서 바디 포지티브의 구호에 섞은 '아름다움'이 삭제돼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를테면 '우리 모두가 아름답다', '살찐 나도 아름답다'라고 외치는 건 또 다른 아름다움의 기준을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 인간은 그저 존재한다. 아름다워야 하거나, 사랑받아야 한다는 집착은 다양한 몸과 건강 상태에 대한 존중과 이해를 오히려 해칠 것이다. <나는 살을 빼기로 결심했다>는 자기 긍정이라는 메시지를 강화할 목적으로 비만과 어린이의 성 정체성을 연결하는 우까지 범하는데, 이 같은 무지성 자기 긍정 권유는 공염불에 머물 수밖에 없다. 몸의 다양성을 이야기하면서 이를 긍정해야 하는 이유의 다양성은 뭉쳐버린 꼴이니 말이다.
칼럼니스트 라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