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우(곽민규)는 말이 없다. 주변에선 도통 속을 모르겠다며 수군댄다. 하지만 영애(한선화)는 다르다. 영애가 보기에 석우는 말이 없는 게 아니라 생각이 많다. 깊이 생각하느라 말하기까지 오래 걸릴 뿐이다. 의뭉스럽거나 남을 무시하는 사람은 결코 아니다. 석우와 영애는 일터에서 각자 창문 너머로 바깥을 바라본다. 석우는 버스를 모는 기사이고 영애는 매표소에 근무하면서 틈틈이 유실물 보관소를 관리한다. 서로 다른 장소에서 하루 대부분을 보내는 두 사람은 철 지난 물건을 매개로 마주한다. 터미널에서 낯익은 MP3를 발견한 다음부터 석우는 틈만 나면 영애를 찾아온다. 영애는 누군가가 MP3를 버린 것으로 추측하지만 석우는 잃어버린 것이라고 확신하며 MP3 주인의 행방을 궁금해한다. 그런 석우는 낯설다. 질문은커녕 대답조차 애매한 웃음으로 넘어가던 석우가 이번엔 먼저 말을 건다. 아무도 찾으러 오지 않는 물건이 얼마나 많은지 영애가 번번이 설명해줘도 그는 꿋꿋하게 의도치 않은 분실을 주장한다. 호기심이 발동한 영애는 퇴근길에 석우에게 다가간다. “공 기사님, 아까 하던 얘기 계속해줄래요?”
단편 <다정함의 세계>(2017), <경화>(2018) 등을 연출한 이상진 감독의 장편 데뷔작 <창밖은 겨울>은 이별 속에서 느리게 전개되는 새로운 사랑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고향 진해에 내려와 버스 운전기사로 일하기 전에 석우는 두 번의 이별을 경험했다. 서울에서 함께 영화를 만들던 애인 수연(목규리)과 헤어졌고 그 일로 석우는 영화마저 관뒀다. 표면적으론 이미 끝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석우는 애인과도, 영화와도 완전히 헤어지지 못했다. 수연이 놓고 간 물건이라 짐작하며 고장 난 MP3를 어떻게든 고치려 애쓴다. 방안 책장엔 아직 정리하지 못한 영화 책과 DVD가 여전히 빼곡하다. 앞으로 나아가기를 주저하는 석우를 대변하듯 영화의 시공간은 2000년대 초반쯤에 멈춰버린 모양새다. 기사들은 아직도 종이 카드로 출퇴근을 기록하고 동전함을 하나씩 챙겨 다닌다. MP3와 필름 카메라, 지포 라이터 등 손때 묻은 물건이 가득한 유실물 보관소는 유물 보관소나 다름없다. 석우와 영애는 수리점을 찾아 골목을 한참 헤매면서도 스마트폰에서 지도 앱 열어볼 생각을 도통 안 한다. 겹겹이 두른 복고적 설정이 억지스럽지 않은 건 한적한 터미널을 중심으로 정성스레 담아낸 소도시 풍경 덕분이다. 지붕과 담장이 낮은 동네, 수십 년은 족히 제자리를 지켰을 가게와 빛바랜 간판. 영화는 변화가 더딘 곳에 머무르며 조금씩 보폭을 맞춰 걷는 석우와 영애를 뒤따른다.
석우와 영애의 사랑이 피어나는 순간을 알아차리기 위해선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둘은 사랑한다고 속삭이지도, 손을 잡거나 입 맞추지도 않는다. 남녀가 같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금세 소문이 번지는 좁은 동네여서 일부러 조심하는 것이 아니다. 둘은 생각한다. 석우는 지난날에 겪은 헤어짐을 곱씹고 영애는 과거에 붙잡혀 있는 석우를 보며 문득 잊고 지낸 기억을 떠올린다. 두 사람은 소리 내어 질문하고 대답하는 대신, 다른 방식으로 만남과 대화를 늘려나간다. 퇴근 후에는 MP3를 고치러 다니고 점심시간에는 탁구를 친다. 내친김에 ‘진해구민 생활체육 탁구대회’에 나가기로 약속하면서 석우와 영애가 함께 움직이는 시간은 좀 더 늘어난다. 네트를 사이에 두고 공을 주고받는 행위, 탁구는 둘만의 또 다른 대화다. 혼자서는 할 수 없고 상대를 살펴야 한다. 탁구대 위를 왕복하는 공의 움직임은 수연이 석우에게 남기고 간 모빌의 진자운동과 얼핏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일정 궤도를 벗어나지 않는 모빌 추와 달리, 공은 어디로 튈지 모른다. 게임을 지속하려면 “왔다 갔다 왔다 갔다 그렇게 공이 아웃될 때까지 계속 반복”하면서 끝까지 눈여겨봐야 한다. 떠들썩한 데이트가 아니라 고요한 게임을 통해 석우와 영애는 대화에 집중하고 관계 맺는 법을 새로 익혀 나간다.
<창밖은 겨울>은 시간의 힘을 믿는 영화다. 넓지 않은 평면 탁구대를 분주하게 오가는 공처럼 인물들은 평범한 일상을 반복한다. 점심 메뉴는 김치찌개와 된장찌개 둘 중 하나이고 버스는 매일 같은 경로를 회전한다. 이때 카메라는 움직임을 최소화하며, 인물을 깊이 파고들기보다는 그들과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다. 대화 장면은 보통 말하는 사람을 번갈아 보여주지만 여기선 말하는 이와 듣는 이 양쪽을 함께 담는 경우가 다반사다. 극적인 감정을 절제하고 유머를 더하면서, 영화는 석우와 영애를 둘러싼 공간과 주변 인물에게도 눈길을 보낸다. 석우가 찍었다는 독립영화가 “독립군 영화”인지 “빨갱이 영화”인지 티격태격하는 중년의 선배 기사들, 졸혼을 선언하고 제2의 인생을 꿈꾸는 석우 엄마와 계절마다 딸에게 새치 염색을 맡기는 영애 엄마. 그들 사이에 기적이나 환상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 중학생 때 탁구를 관둔 이후로 오랜만에 라켓을 잡은 영애가 탁구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쥐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석우는 영화를 다시 찍어야 할 이유를 찾아내지 못한다. 다만, “후회인지 미련인지 궁금하니까” 둘은 마지막까지 진심으로 부딪혀보려 한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시간이 쌓이고 흘러서 무언가를 바꿔 놓는다. 늘 세 발짝쯤 떨어져서 걷던 석우와 영애가 나란히 앉아 이어폰을 나눠 낄 때, 어느새 창밖은 겨울이다.
이별과 맞물리는 새로운 만남, “사랑해”라고 말하지 않는 사랑, 오래된 사진첩을 펼친 듯 낡고 부드러운 소도시 풍경 등 <창밖은 겨울>의 면면은 자연스레 <8월의 크리스마스>(허진호, 1998)를 떠올리게 한다. 창밖에서 실내에 위치한 인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앵글 또한 기시감을 느낄 만한 요소다. 아날로그 감성에 충실하려는 목적일까, 영화는 스마트폰과 SNS의 영향력을 일찌감치 차단한다. 진해 곳곳을 어루만지듯 살뜰히 바라보는 시선은 그 자체로 미덥지만, 인파와 속도를 대신하는 낭만과 향수는 다분히 동화적이다. 자칫 균형을 잃을 법한 공간에서 중심을 잡는 건 배우들이다. 다수 독립영화에 출연하고 최근 드라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에 합류한 곽민규는 실패를 겪고 망설이면서도 제 길을 궁리하는 석우를 믿음직스럽게 연기한다. 한선화는 영화 <영화의 거리>(김민근, 2021), 드라마 <술꾼도시여자들> 등에서 보여준 특유의 명랑하고 건강한 분위기는 물론이고 영애에게 의젓함과 너그러움까지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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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차한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