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육원에 선물을 주러 방문한 산타(에드워드 애즈너)의 선물자루에 몰래 기어들어간 이후로, 버디(윌 페럴)는 평생을 산타 마을 북극 요정들 사이에서 살았다. 아빠 요정(밥 뉴하트)에게 입양되어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버디는, 남들이 그렇듯 자신도 어련히 북극 요정이겠거니 하며 살았다. 비록 110cm 가량의 아담한 체구의 요정들 사이에서 혼자 키가 190cm가 넘지만, 다른 요정들처럼 하루에 장난감을 1000개씩 만들 만큼 손이 빠르지도 않지만.
일평생 자신은 어딘가 다르다는 막연한 이질감이 제 정체를 밝힌 건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이었다. 다른 요정들의 대화를 우연히 엿들은 버디는, 자신이 요정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에 빠진다. 아빠 요정에게서 자신의 친부 월터(제임스 칸)가 살고 있다는 뉴욕에 대해 전해들은 버디는, 그 길로 친부를 만나러 뉴욕으로 떠난다. 둥둥 떠다니는 빙하 조각을 타고 바다를 건너, 일곱 층의 사탕 지팡이 평원을 넘어서. 그러나 월터는 ‘나쁜 아이’ 명단에 이름을 올린 냉소적인 워커홀릭이고, 크리스마스 정신으로 살아온 버디에게 뉴요커들은 차갑기만 할 뿐이다.
한참 영화를 즐겨보던 시절, 사람들에게 〈엘프〉(2003)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반응이 뜨뜻미지근했다. 그도 그럴 게, 영화광 사이에서 크리스마스 시즌을 노리고 만든 영화 같은 건 그다지 존중 받지 못하는 장르 아닌가. 〈멋진 인생〉(1946)이나 〈우리 생애 최고의 해〉(1946) 같은 클래식도 아니고, 초짜 감독이던 시절의 존 파브로가 만든, 190cm 거구의 남자 윌 페럴이 초록색 코트에 노란색 쫄쫄이 바지를 입고 나와서 북극 요정을 연기하는 코미디 영화라면 더더욱 그렇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처음엔 〈엘프〉를 썩 좋아하지 않았다. 몸에 딱 달라붙는 요정 복장을 하고 서 있는 거구의 윌 페럴이 한가득 그려진 포스터부터가 좀 부담스러웠다. 어디 포스터만 그런가. 〈SNL〉(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에서 철 없고 수다스러운 남자 역할을 도맡아서 하던 윌 페럴이 그 텐션을 고스란히 가져와서 메이플 시럽에 스파게티를 비벼 먹는 북극 요정을 연기한다니. 세상 모든 걸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받아들이고 장난치기 좋아하는 덩치만 큰 어린아이 버디는 아무래도 정신산란한 구석이 있어서, 처음 영화를 볼 때만 해도 나는 월터처럼 피곤한 표정을 얼굴에서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엘프〉에는 뭔가 부정하기 힘든 힘이 있다. 자신이 북극 요정인 줄 알고 살아온 버디가 요정들 사이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슬퍼할 때, 다른 요정들은 지치지도 않고 장난감을 조립하는데 덩치 크고 손이 느린 자신만 제 몫을 못 하는 것 같다며 우울해할 때, 영화를 보는 내 마음은 이상하게 요동친다. 일평생 자신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고 느끼는 아웃사이더의 심정이 뭔지 조금은 알기 때문이다.
왜 나만 서투를까. 왜 나만 주변에 민폐를 끼치는 걸까. 막 처음 전학을 간 낯선 동네에서 느끼는 이질감, 편 갈라서 축구 경기를 할 때 나 혼자만 룰을 잘 모르고 헤매다가 벤치로 밀려날 때의 자괴감, 나 혼자 이혼 가정의 아이일 때, 나 혼자 장애인 형제를 둔 아이일 때, 나 혼자 뭔가가 달라서 잘 섞이지 못하고 겉돌 때의 서글픔 같은 것. 그건 아웃사이더였던 적이 있는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이다. 그래서일까, 버디가 제 출생의 비밀을 깨닫고 혼자 자그마한 화장실에 틀어박혀 슬퍼하는 장면은, 잠깐이지만 심장을 옥죄어 온다.
그 아웃사이더의 심정은 버디가 뉴욕에 도착해서도 사라지지 않는다. 모두가 바쁘고 모두가 조금씩 화가 나 있는 세계 최대의 대도시 뉴욕과, 총천연색 요정 옷을 입고 방실방실 웃으며 뛰어다니는 버디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다. 길을 지나는 사람들은 무심하거나 차갑고, 친부인 월터는 일에 치여서 가족을 돌보지 않는다. 버디는 크리스마스의 즐거움을 모두와 나누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버디의 최선은 그저 덧없는 소동이 된다. 자신이 모든 걸 망쳤다고 생각한 버디는 조용히 뉴욕을 떠나려 한다.
각본가 데이비드 베런바움은 루돌프 이야기에서 〈엘프〉의 줄거리를 떠올렸다고 한다. 혼자 코 끝에 빨간 불이 들어오는 기형의 순록, 다른 순록들 사이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놀림당하고 따돌림 당하던 아웃사이더 순록이 짙은 안개 속에서 앞을 밝혀 산타의 썰매를 끌어준다는 이야기. 일평생 혼자였던 외톨이가 제 단점이 사실은 장점이었음을 깨닫고, 자신의 가치를 다시 발견해 끝내 공동체를 구해낸다는 이야기. 우리가 매년 크리스마스에 캐럴로 불러왔으면서도, 자주 까먹곤 했던 ‘루돌프 사슴코’의 이야기.
요정의 세계에서도 인간의 세계에서도 계속 혼자였던 버디 또한 마찬가지 루트를 걷는다. 뉴욕 한복판에 추락한 산타의 썰매를 고쳐주면서, 버디는 산타로 대변되는 요정의 세계와 월터로 대변되는 인간의 세계를 모두 구해낸다. 크리스마스를 믿지 않았던 뉴욕의 사람들은 조비(주이 드샤넬)의 목소리를 따라 센트럴 파크 한 모퉁이에 서서 큰 소리로 캐럴을 부르고, 크리스마스 정신에 힘입어 산타의 썰매는 다시 하늘 위로 날아오른다. 그 어느 세계에도 속하지 못했던 외톨이가 두 세계를 지켜낸 것이다.
그러니까 〈엘프〉는 다양성과 포용에 대한 이야기다. 나와 다르고 별나고 특이하다고 밀쳐냈던 존재들이 사실은 우리를 구할 것이라는 이야기, 두 세계의 중간에 어정쩡하게 걸쳐져 있는 사람은 사실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사람이 아니라 두 세계 사이를 잇는 연결고리라는 이야기, 우리가 원을 넓혀 원 밖에서 맴돌던 사람들을 품어낼수록, 원은 더 단단하고 다채로워질 것이라는 이야기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면, 190cm의 거구인 윌 패럴이 쫄쫄이를 입은 광경도 뭐 그렇게 못 봐줄 꼴인가 싶어진다. 사람이 저렇게 한없이 해맑고 장난꾸러기 같을 수도 있지. 악의 없는 장난과 무조건적인 사랑, 온몸으로 뿜어내는 친절과 선의가 귀엽지 않은가.
그래서, 우린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엘프〉를 봐야 한다. 보면서, 우리 곁에 있는데 우리가 미처 눈치 채지 못한 버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야 한다. 낯설고 엉뚱한 것들을 더 열린 마음으로 맞이해야 한다. 크리스마스 정신의 본질이란, 서로의 차이 때문에 적대하고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차이 덕분에 더 풍요롭고 다채로워지는 것에 있을 테니까.
이승한 TV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