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웨인 존슨은 현역 할리우드 배우 가운데 근 10년 동안 최고의 몸값을 유지하고 있다. 이는 그의 출연작 흥행 타율 역시 최고 수준이라는 의미다. 프로 레슬러 '더 락'으로서 1990년대 WWE 부흥기의 주역으로 기록된 드웨인 존슨은 자신의 이미지를 그대로 살려 영화 배우로 전업했다. <미이라2>와 <스콜피온 킹>의 악당으로 할리우드에 발을 들인 그는 곱상한 엘리트나 더 평범해진 사랑꾼들에 잠시 밀렸던 근육질 캐릭터의 인기를 단숨에 끌어 올렸다. 물론 드웨인 존슨이 무조건 미간을 구기고 폼을 잡는 마초남만 연기한 건 아니지만, 예전 말로 '육체파 배우'의 계보를 잇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드웨인 존슨이 최고의 액션 스타라는 사실이 당연한 세대가 이전의 '육체파 배우'와 작품을 기억하기는 쉽지 않다. 이를테면 1980년대 할리우드 액션의 쌍두마차 아놀드 슈워제네거와 실베스터 스탤론 같은 인물들. 아놀드 슈워제네거와 <터미네이터>가 근미래 세계관 유행과 맞물려 다시 소환되는 것과 달리, 아날로그 액션 그 자체인 실베스터 스탤론의 <록키>와 <람보>는 그렇지 않다. 특히 <록키 발보아>까지 무려 다섯 편의 속편을 낸 <록키>는 장엄한 주제가와 유명한 몇 장면이 띄엄띄엄 회자되곤 한다.
좀처럼 지성인 이미지가 달라 붙지 않는 캐릭터로 활약했지만, <록키>의 각본을 쓴 건 실베스터 스탤론이다. 가난한 이탈리아계 이민자의 자식으로 태어나 고교 시절 겨우 연기에 눈을 떴지만, 시절은 근육질 마초남을 주연으로 올려 주지 않았다. 그러니까 실베스터 스탤론은 <록키>의 록키 발보아와 마찬가지로 오른손잡이의 세상 속 사우스포 같은 존재였다. 사흘 동안 직접 써 낸 각본을 품고 영화사를 돌아다니며 주연과 감독까지 시켜 달라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자전적 이야기와 무하마드 알리 대 척 웨프너의 경기를 모티프로 한 각본은 인기가 높았다. 결국 한 영화사가 주연까지는 맡기겠다는 제안을 했고, 전설의 복싱 영화 <록키>가 탄생했다. 1976년 개봉한 이 작품은 제49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편집상을 탔다.
영화의 배경은 미국의 베트남 전쟁 패배 직후이자 미국 독립 200주년을 앞둔 1976년 말. 필라델피아 뒷골목에 살고 있는 록키 발보아(실베스터 스탤론)의 직업은 두 개다. 하나는 4라운드 이상 경기를 해 본 적 없는 복서, 나머지는 고리대금업자의 하수인이다. 자조하듯 반(半) 건달 같은 존재인 그는 무심히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매일 반려동물용품점의 에이드리안(탈리아 샤이어)에게 건넬 농담을 생각하는 순수함과 친구의 어린 여동생이 탈선하는 걸 두고 보지 못하는 정의감이 있다. 좁고 냄새나는 방 안에 붙여 둔 헤비급 세계 챔피언 록키 마르시아노의 포스터는 그가 가장 내밀한 공간에 남겨 둔 열정이다. 발보아와 마르시아노는 이름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계 미국인이라는 점도 닮았다.
록키가 짝사랑하는 에이드리안은 어렵사리 성사된 그와의 첫 데이트에서 왜 복싱을 하느냐고 묻는다. 이에 록키는 똑똑하지 못했던 아버지로부터 "넌 머리가 나쁘니 몸으로 뛰어야 한다"라는 말을 들은 과거를 떠올린다. 관심 없는 사람들에게 그저 사람들 앞에서 치고 받는 것에 불과한 복싱은 몸을 잘 쓰는 록키에게 기회였다. 이민자의 나라 미국에서 숱한 이민자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품는 것처럼 록키도 복싱계에서 인정 받는 프로로 거듭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대부분의 '아메리칸 드림'이 그러하듯 '이탈리안 종마' 록키의 꿈도 6년 동안 체육관에 봉인된 채였다.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를 시험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로.
헤비급 챔피언인 아폴로 크리드(칼 웨더스)는 미국 독립 200주년을 맞아 새해 첫 날 라이벌과의 대결을 전국에 송출하고자 한다. 하지만 상대가 부상을 입으며 급하게 대체 선수를 찾아야 하는 상황. 아폴로 크리드는 필라델피아의 무명 선수에게 자신의 챔피언 타이틀을 뺏을 기회로서의 경기를 연출하기로 한다. '이탈리안 종마'라는 록키의 닉네임은 아폴로 크리드의 눈에 띄었다. 우선 흑인인 그는 백인을 쓰러뜨리는 그림을 만들고 싶었다. 아메리카 대륙을 처음 발견한 것이 이탈리아인이라는 점도 이탈리아계 록키를 고른 이유였다.
아폴로 크리드와 이 경기를 기획한 인물들, 그리고 매스컴은 미국이 여전히 선심 쓰듯 주워 섬기는 '기회의 평등'을 쇼 비즈니스의 요소로 활용한다. 그의 호언장담처럼 3라운드 내로 끝날 확률이 99%인 경기에 무명 선수를 세워 놓고 '미국에서는 누구나 승자가 될 수 있다'라는 가치를 설파하는 것이다. 결국 그 기회가 절대적 강자 아폴로 크리드의 의사에 좌우된다는 사실은 챔피언의 여유로 포장될 따름이다. 부자가 아닌 이탈리아 이민자의 자식으로서 실제로 실베스터 스탤론이 느꼈을 답답함과 분노는 아폴로 크리드 진영의 행동으로 풍자된다. 그의 비판적 시선은 아폴로 크리드의 행동을 두고 '미국적'이라고 강조하는 데서 두드러진다.
제대로 된 프로 무대에 서 본 적도 없는데 갑자기 '세계 챔피언이 될 기회'를 떠안은 록키. 아폴로 크리드와 맞붙는 것 만으로 벼락 스타가 된 그의 심경은 복잡하다. 이미 멀어졌다는 걸 인정한 꿈에 갑자기 가까워진 상황과 부담감, 도망치고 싶은 마음과 더불어 자신을 6년 동안 방치하고 내치기까지 한 체육관장 미키(버제스 메러디스)를 향한 원망까지 겹쳤다. 최대한 이전의 아무렇게나 돌아가던 일상에서 경기를 준비하고 싶지만 쉽지 않다. 아폴로 크리드와 함께 출연한 뉴스 방송에서도 웃음거리가 됐지만, 록키는 거기서 자신을 지키는 법을 알지 못하거나 잊은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훈련의 훈련을 거듭한 록키. 경기를 며칠 앞두고 에이드리안에게 TV에서 겪은 모욕이 아무렇지도 않았다고 했던 건 거짓말이었다며 힘겹게 고백한다. 이어 경기 전날 링까지 보고 온 그는 "아폴로 크리드를 이길 수 없다"라고 도망치려 한다. 하지만 록키는 그렇게 속내들을 토해내는 사이 자신이 '승자'가 아닌 '버티는 자'가 되길 원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폴로 크리드가 서 있든 말든, 자신은 공이 울릴 때까지 링 위에 서 있는 것을 목표로 하게 된 록키의 상대는 이제 자신이었다.
3라운드 만에 끝날 거라던 아폴로 크리드의 '쇼'는 록키 발보아의 '시합'이 되어 15라운드까지 이어졌다. 보통의 스포츠 영화라면 주인공의 전문적 기술 사용을 조금이라도 넣었겠지만 <록키>의 록키는 그저 맷집으로 승부한다. 이제는 실베스터 스탤론의 시대도, 맷집의 시대도 끝났다. 하지만 여전히 맷집으로 버티는 자보다 무조건 이기는 자가 우월한 것은 아니다. 록키의 1977년 1월1일을 탈력해 휠체어에 실려 나간 모습으로 기억할 지, '버티는 자'가 스스로를 증명할 순간으로 기억할 지는 보는 이들의 몫이다.
칼럼니스트 라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