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말을 잃은 아이

캠코더를 들고 다니며 촬영하는 취미를 가진 고등학생 문영(김태리)은 말을 못합니다. 누군가 지하철에서 그녀에게 말을 걸어도 그녀는 대답하지 못합니다. 오해는 하지 말아주세요. 누군가 길에서 그녀에게 길을 물어도 예의가 없어서 대답하지 않는 게 아닙니다. "너는 왜 말을 못하니?"라고 화를 내지도 말아주세요. 진짜 말을 못하는 아이입니다.

말을 못하는 문영이 왜 그렇게 악착같이 캠코더를 들고 다니면서 무언가를 찍어대는지 관객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녀가 찍는 영상을 보아하니, 걸어다니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주로 찍는 것 같긴 합니다. 어떤 특징을 지닌 사람들 위주로 찍는 건 아닌 것 같고 그냥 무작위로 아무나 찍는 것 같습니다. 그러던 그녀가 여느 때처럼 캠코더로 골목을 걷는 사람들을 찍다가 우연히 어떤 커플의 이별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말 못하는 게
면죄부는 아니야

문영이 우연히 목격한 여자는 방금 남자친구로부터 "꺼지라"는 소리를 듣고 눈물을 흘리고 있던 희수(정현)입니다. 희수는 세상을 다 잃은 표정으로 울다가 문영이 자신을 몰래 촬영하고 있단 사실을 알게 되자 도망치는 문영을 기어이 붙잡고는 따져 묻습니다. 뭐 하는 짓이냐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닥만 보고 있는 문영을 향해 답답한 듯 희수가 화를 냅니다.

결국 문영이 말을 못하는 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도 희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 못하는 게 면죄부가 아니"라고 윽박지릅니다. 맞는 말이죠. 문영의 생김새에 대해서 아무런 편견 없이, 그저 본인 할 말을 다 하는 희수는 문영이 보기에 조금 달라 보입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생각해주는 듯해요. 게다가 희수는 화를 내고 문영의 캠코더를 박살내는 게 아니라 그녀를 집으로 초대합니다.

버림받은 아이

이제부터 문영의 사연을 조금 더 소개해볼까요. 문영은 방치된 아이입니다. 엄마는 어려서 집을 나갔고 아빠는 알콜 중독이 심해 문영을 볼 때마다 해코지하고 행패부리기 일쑤입니다. 그녀의 유일한 취미는 캠코더. 그 취미 덕분에 희수라는 여자를 만나게 된 것인데 다행히 희수는 살아온 환경 때문에 경계심이 많고 까칠한 문영의 태도를 이해하고 잘 받아줍니다. 둘은 함께 밤거리를 쏘다니면서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게 되지요.

물론 두 사람에게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고등학생인 문영과 달리 할 일 없는 백수 희수는 여러 번의 이별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의 거리감을 갖는 것에 익숙한 반면, 문영은 그렇지 못합니다. 지금껏 누구와도 가까워 본 적 없기 때문에 사람과 마음의 거리를 얼마나 유지해야 할지 잘 모릅니다. 희수 역시 그런 문영의 마음을 잘 알고 있지요. 이처럼 <문영>은 부모와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채 자라왔던 문영에게 친구가 생기는 따뜻한 순간, 그 어설프고 서툰 관계의 시작을 다루는 영화입니다.

눈으로 질문하는 아이

영화는 문영이 말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주목합니다. 우리가 길을 걷다 우연히 문영과 마주친다고 가정해보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아마도 그녀가 말을 못한다는 사실을 알 수 없을 겁니다. 그녀 스스로 수화를 해보이지 않는 이상, 문영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때부터 영화는 문영의 시점에서 여러 질문을 쏟아냅니다. 왜 나는 부모로부터 버려졌을까? 그럼 나는 누굴까? 관객 역시 궁금증을 갖게 됩니다. 문영은 누굴까. 어떤 아이일까. 그것은 문영이 캠코더를 들고 다니면서 사람들을 찍어대는 이유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면 바로 그 문영의 행동에 관한 이유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짐작할 수 있겠지만, 그리 유쾌한 이유는 아닙니다.

김태리를 주목하라

문영이란 아이가 희수를 만나 마음을 열게 되고, 세상과 소통하게 되는 과정을 통해서 영화는 자기가 누구인지 끊임없이 궁금해하는 아이의 목소리, 버림받은 사람들의 목소리에 주목할 것을 이야기합니다. 세상에 너무 많은 시끄러운 소리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들어야 할 소리는 무엇일까.

이런 질문을 오직 눈빛만으로 쏟아내야 했던 문영을 연기한 김태리의 존재감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영화의 전달력이 반감되었을 것 같더군요. 영화의 연출 전략이 다소 미약한 상황에서 배우의 존재감만으로 영화의 정서를 이끌어야 했을 테니 말이죠. 이 영화는 그만큼 막중한 임무를 띄고 있었던 캐릭터를 훌륭하게 표현해낸 신인배우 김태리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할 겁니다.

분명 김태리의 데뷔작은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영화는 김태리가 아직 장편 영화 데뷔 전에 단편으로 참여한 영화였습니다. (그러므로 여전히 김태리의 데뷔작은 <아가씨>가 맞습니다.) 연출을 맡은 김소연 감독은 애초 <문영>이라는 제목의 40여분짜리 단편 영화를 만들었다가 분량을 조금 늘려 64분 분량의 영화로 재편집했습니다. 그래서 작년, 인디포럼이나 상상마당 영화제 등에서 봤던 <문영>의 러닝타임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것이죠.

P.S.
문득 쓸데없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영화 <문영>의 영어 제목을 외국인들이 보면 어떻게 받아들일까. '어둠 속에서만 빛나는 작은 달'?, '젊은 달'? '달, 그리고 젊음'? 해외에는 문나이트 같은 히어로 이름도 있으니까 어색하게 들리지는 않으려나요? 왜 그녀의 이름이 '문영'인지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가로등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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