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포스터 이야기는 이쯤 하고, 이번 전시 <왼쪽 얼굴>에 대해서 이야기 해볼까요. 예전에 진행한 전시 소개글에 “나는 사람의 얼굴이 항상 아주 구체적인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고 여겨 왔다. 그래서 사진을 만들면 마치 항해 지도를 보듯이 얼굴이라는 풍경 속에 담긴 작은 섬들을 찾곤 한다”라는 코멘트를 쓰셨어요. 근데 이번 전시는 그 이야기가 안 느껴지는 얼굴들만 모아 놓았다고 말씀하셨어요. 이번 작품들 역시 ‘불안초상’의 연장선에 있긴 한데, 이전에는 피사체가 불안의 주체였다면, 이번 전시 속 사진의 불안은 작가 본인의 것이라는 인상을 받습니다.
2006년부터 프로젝트를 시작했는데 그때 내가 봤던 불안은 일상적이면서 고립돼 있고 외로운, 얕지만 확연한 레이어가 드러나는 불안이었어요. 글에는 일상적이고 소소한 불안이라고 썼지만. 이번에 보여주고 있는 작업들은 2015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해서 코로나 전까지 촬영한 거예요. 예전에는 누가 봐도 꽂히는 구심적인 불안을 다뤘다고 한다면, 지금 전시하는 건 원심적으로 흐물흐물 퍼지는 불안이에요. 불안의 단상들이 명료하지 않아서 더 불안하다는 거예요.
<살인의 추억>이나 <조디악> 같은 영화 보면 범인의 얼굴이 모호하잖아요. 불안의 레이어가 잘 안 보이는 얼굴들이 많이 나타난다는 건 불안의 유형이 잠재의식화 되는 사회가 됐다는 얘기예요. 옛날에는 불안을 보는 게 쉬웠어요. 사회가 순진할수록 감정의 레이어가 확연해요. 지금은 찍는 나도 잘 모르겠어요. 요즘 사람들은 워낙 뭘 숨기거나 지우는 데 능해요. 불안한 레이어조차도 지워버린 얼굴들이 지금 세상에 많고, 그게 나를 불안하게 해요. 사람이 분명 지도처럼 구체적인 얼굴을 갖고 있었는데 그 구체성 자체가 모호해지기 시작을 했기 때문에 내 작업도 모호한 초상이 될 수밖에 없죠. 지금 초상이 더 무서워요.
<아줌마>나 <소녀 연기> 작업할 때만 해도 유형을 잡는 게 너무 쉬웠어요. 한국은 그만큼 전형화 돼 있었기 때문에. TTL 소녀 나올 때도 신비하고 모호하다고 했지만 실은 그것조차도 전형적이었거든요. 그래서 내가 유형학적 접근 방법을 이용해서 인물의 초상을 담기에 너무 좋았어요. 물론 유형이 사라지는 게 긍정적인 측면도 있어요. 어떤 유형에 안착해서 그걸 보여줌으로써 안도하기보다는 누구처럼 보여야 한다는 걸 무시하니까 좋은 세상이 온 건데, 동시에 감정의 레이어도 같이 사라지고 있는 거예요. 유형이 없어져서 좋긴 한데 그래서 더 위험한 사회가 돼가고 있다고 느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