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3대 영화제'이자 한 해의 본격적인 출발을 영화계에 알리는 베를린 영화제가 2월 16일 막을 올렸다(현지시각 기준). 올해 경쟁부문은 총 19편. 아쉽게도 한국 영화는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세계 3대 영화제 중 가장 먼저 시작하는 탓에 한국에선 칸 영화제나 베니스 영화제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은 베를린 영화제, 이번 경쟁부문에는 어떤 작품들이 상을 놓고 겨루는지 종합했다. 베를린 영화제 공식 사이트와 IMDb 등 영화 데이터베이스 사이트에 기입된 정보를 참고했다. 제73회 베를린 영화제는 2월 26일 폐막한다.
20,000 스피시스 오브 비즈
- 에스티발리스 우레솔라 솔라구렌
이번 베를린 영화제에서 새로운 여성 감독의 태동을 목격할지도 모르겠다. <20,000 스피시스 오브 비즈>를 연출한 에스티발리스 우레솔라 솔라구렌은 첫 장편 영화로 베를린 영화제 경쟁부문에 초대받았다. 엄마 앤과 8살 딸 루시아는 여름에 양봉을 하는 할머니 리타의 집을 찾는다. 모녀는 이곳에서 앞으로의 삶을 뒤흔드는 경험을 한다. 여성 삼대와 양봉이란 소재를 통해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들려줄지 베를린 영화제에서 상영한 후 간단하게나마 알 수 있을 듯하다.
아트 컬리지 1994
- 리우 지앤
명암 묘사를 거둬낸 작화, 중국 사회의 치부를 드러내는 스토리. 리우 지앤(류건) 감독의 신작 애니메이션 <아트 컬리지 1994>도 이런 특징을 이어갈까. <아트 컬리지 1994>는 1990년를 살아가는 중국 미대생들을 그린다. 극단적인 상황에 몰린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전작들과 사뭇 다른 느낌이다. 미대생들의 '청춘'을 그린다고 하는데, 예고편부터 분위기가 을씨년스러운 것이 단순한 청춘 드라마는 아닐 것 같다. 현재 공개된 정보에 따르면 지아장커 감독이 목소리 출연한다고 한다.
더 섀도우리스 타워
- 장률
한국계 중국인 감독으로 <경계> <이리> <경주> 등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다수의 걸작을 남긴 장률 감독은 신작 <더 섀도우리스 타워>로 베를린 영화제에 안착했다. 베를린 영화제에 초청된 적은 있으나 경쟁부문에 오른 건 이번 작품이 처음. 중년 남성 구가 젊은 사진작가 오우양을 만나고, 그에게 용기를 얻어 40년 넘게 연락이 닿지 않은 아버지를 만난다. 자신의 혈통 조선족을 소재로 소외되는 순간을, 그리고 한국의 각 도시 풍경 속에서 시간 감각이 흐릿해지는 순간을 그린 장률이 부자 관계를 통해 어떤 이야기를 꺼낼지 궁금하다.
틸 디 엔드 오브 더 나이트
- 크리스토프 호흐호이슬러
마약 수사관 로버트는 잠입 수사에 투입된다. 그의 역할은 마약 딜러와 연이 있는 여성의 연인으로 위장할 것. 임무를 진행하던 중 로버트는 점점 여성에게 빠져든다. <틸 디 엔드 오브 더 나이트>의 스토리는 구태의연한 누아르 같다. 크리스토프 호흐호이슬러 감독은 몇몇 변주를 통해 그런 감상을 거둬낸다. 로버트는 게이이고, 그와 위장할 파트너 레니는 트랜스 여성이란 것. 스스로 여성이라 여기는 남성을 좋아하게 된 동성애자 남자라. <승자의 거짓말> 이후 9년 만에 신작을 공개한 크리스토프 호흐호이슬러 감독, 만만치 않다.
블랙베리
- 매트 존슨
<아폴로 프로젝트> <홀리데이즈>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배우 겸 감독 매트 존슨의 신작 <블랙베리>는 쿼티형 스마트폰을 발매한 블랙베리사의 설립자 마이크 라자리디스의 전기 영화다. 차세대 기기로 각광받다가 안드로이드, 아이폰과의 경쟁에서 급격하게 쇠퇴 길을 걸은 블랙베리사의 이야기를 코믹하게 그릴 예정. 공개한 스틸컷에서 블랙베리 창업 당시 모습은 유쾌한 분위기로, 이후 상황은 상당히 극적으로 담아내 전체적으로 어떤 무드로 블랙베리를 다룰지 공개 전까지 쉽게 종잡을 수 없다. 다만 유쾌한 코믹 연기로 유명한 제이 바루첼이 마이크 라자리디스를 맡았으니 적어도 창업 당시는 대학생들의 좌충우돌 창업기가 될 듯.
디스코 보이
- 지아코모 압루제세
지아코모 압루제세라는 이름은 낯설다. 그는 <페임>(2017), <아메리카>(2019) 등 다큐멘터리를 작업한 감독으로 <디스코 보이>는 그의 첫 장편 영화다.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기 위해 프랑스 부대에 입대한 벨라루스인 알렉세이와 나이지리아 나이저강 삼각주에서 게릴라 운동을 펼치는 조모의 운명을 다룬다. 알렉세이는 <운디네> <인 디 아일>에 출연한 프란츠 로고스키가, 조모는 모르 디아예(Morr Ndiaye)라는 신인 배우가 연기한다. 일렉트로닉 뮤지션 비탈릭(VITALIC)이 영화 음악을 맡았다.
더 플라우
- 필립 가렐
<더 플라우>는 순회 인형극을 하는 가족이 아버지의 죽음 이후, 아버지가 남긴 유산의 불씨를 살려내고자 노력하는 내용을 그린다. 2005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평범한 연인들>로 은사자상(감독상)을 수상한 필립 가렐의 신작으로, 그의 아들이자 <몽상가들> <작은 아씨들>(2019)에 출연한 프랑스 대표 배우 루이스 가렐이 아들 루이스 역을 맡았다. 영화계에서 활동하는 노령의 감독과 아들이 함께 인형극을 하는 가족의 이야기를 그리는 것에서 특별한 의미를 담겼을 거라 읽힌다. <양철북>, <발몽>, <탄생>(2005) 등을 집필하고 2021년 세상을 떠난 장 클로드 카리에가 각본에 참여했다.
잉게보리 바흐만 - 저니 인투 더 데저트
- 마가레테 폰 트로타
<잉게보리 바흐만 - 저니 인투 더 데저트>는 오스트리아의 시인 잉게보르크 바하만(Ingeborg Bachmann)의 인생을 묘사한다. 스위스의 극작가 막스 프리쉬와의 만남과 이별, 오스트리아의 작가 아돌프 오펠과의 시간을 통해 잉게보르크 바하만의 삶을 돌아보며 그에게 찬사를 보내는 영화. <팬텀 스레드>를 시작으로 <베르히만 아일랜드> <코르사주> <안녕, 소중한 사람> 등 다양한 캐릭터로 여성상을 표현한 비키 크립스가 잉게보르크 바하만을 맡았다. <독일 자매> <로자 룩셈부르크> <한나 아렌트>로 억압된 여성을 지속적으로 탐구한 마가레테 폰 트로타 감독이 연출해 오스트리아 대표 여성 시인을 비춰 다다를 경지를 기대하게 한다.
썸데이 위윌 텔 이치 아더 에브리띵
- 에밀리 아테프
에밀리 아테프 감독과 「그 여름, 마리아」 작가 다니엘라 크리엔이 합심한 영화 <썸데이 위윌 텔 이치 아더 에브리띵>. 1990년 구 동독일에서 연상의 농부와 사랑에 빠진 여성 마리아를 주인공으로 삼았다. 스토리 자체는 자주 접할 수 있는 뜨거운 사랑 이야기인데, 베를린 영화제는 '예상치 못한 독일 낭만주의'라고 평했다. 드라마 <다크>에서 성인 트론테 닐젠을 연기한 펠릭스 크레이머가 농부 헨너로, 마를린 부로우(Marlene Burow)가 그와 사랑에 빠지는 마리아로 호흡을 맞춘다. 다니엘라 크리엔가 시나리오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집필한 소설로도 출간했다.
림보
- 아이반 센
형사 트래비스 헐리가 20년 전 일어난 호주 원주민 여성 미제 살인 사건을 추적하는 영화 <림보>는 올해 경쟁부문 작품 중 유일한 흑백 영화다. 적막한 사막의 고독한 정서를 한층 더 진하게 한다. '백인' 형사 헐리가 사건을 조사하면서 피해자 가족에게 점차 유대를 쌓고, 끝내 진실과 호주 원주민들의 현실을 마주한다. <미스터리 로드> <골드스톤> 등 호주 아웃백(호주의 내륙부 사막 지역)을 배경으로 삼았던 아이반 센 감독이 그간의 경험을 살려 아웃백의 풍경을 정서로 승화했다.
배드 리빙
- 조아오 카니조
포르투갈의 감독 조아오 카니조는 <혈육>에서 함께한 배우들과 다시 한번 모여 <배드 리빙>을 만들었다. 호텔을 운영하는 다섯 명의 여성,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미묘하게 엇갈린 관계를 치밀하게 그린다. 호텔이란 배경을 활용해 다양한 이미지를 포착한다. 뿐만 아니라 <배드 리빙>과 같은 시간대를 공유하는 <리빙 배드>를 함께 공개해 각자의 시선이 혼재하는 현실을 모방한다. <리빙 배드>는 엔카운터스 부문으로 초청돼 첫 공개된다.
매노드롬
- 존 트렌고브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전통 의식과 현대적인 퀴어 드라마를 엮은 <더 운드>로 주목받은 존 트렌고브는 이번에도 집단화된 남성성을 주시한다. <매노드롬>은 여자친구의 임신 소식에 흔들리던 우버 드라이버 랄피가 한 남성 그룹을 만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남성성에 대한 스릴러로, 남성성에 매몰된 이들(베를린 영화제는 '인셀'이라고 언급했다)의 심리를 파고든다. 할리우드 스타 제시 아이젠버그와 애드리언 브로디가 출연하며 2015년 <나의 딸>로 데뷔해 주연급으로 올라선 오데사 영이 랄피의 여자친구를 맡았다.
뮤직
- 앙겔라 샤넬렉
<나는 집에 있었지만…>으로 2020년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감독상)을 수상한 앙겔라 샤넬렉의 신작. 우화적 요소나 고전의 텍스트를 활용한 그의 이전 작품들처럼 <뮤직>은 다양한 모티브를 제공한 인류의 고전 오이디푸스 신화를 차용했다. 양부모 아래서 자란 존은 살인을 저질러 교도소에 수감된다. 수감 생활 중 그는 교도소에서 일하는 한 여성과 사랑에 빠진다. 1980년대와 2006년의 오이디푸스 신화가 어떤 새로운 경험을 안겨줄지, 또 앙겔라 샤넬렉이 이번에도 상을 거머쥘 수 있을지 궁금증을 자극한다.
패스트 라이브즈
- 셀린 송
이번 베를린 영화제 경쟁부문 작품 중, (이미 개봉을 발표한 작품을 빼면) <패스트 라이브즈>가 한국 개봉 가능성이 가장 크지 않을까. 왜냐하면 한국계 캐나다인 셀린 송 감독의 데뷔작이자 한국계 인물들이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어린 시절 절친한 사이였던, 20년 만에 재회한 남녀가 주인공이다. 감독 본인의 경험을 녹인 이 영화는 오래전 인연을 만나 지금의 자신을 돌아보며 스스로의 주체성을 회복하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그린다. 우리나라에서 활동 중인 유태오가 해성 역을, 그레타 리가 그와 다시 재회한 노라 역으로 출연한다.
어파이어
- 크리스티안 펫졸드
근래 <피닉스>, <운디네>, <트랜짓> 등의 한국 개봉으로 한국 영화 관객들에게 알려지고 있는 크리스티안 펫졸드 감독의 신작 <어파이어>도 경쟁 부문에 올랐다. <어파이어>는 별장에서 모인 친구들이 점차 고조되는 감정에 흔들리는 모습을 담는다. 원제 '붉은 하늘'(Roter Himmel)이 가리키듯, 별장 부근의 마른 숲이 화재에 휩싸이는 순간이 중요한 이미지로 등장한다. <운디네>, <트랜짓> 등 펫졸드의 전작들뿐만 아니라 <프란츠>, <울프 콜> 등에 출연한 배우 폴라 비어가 이번에도 펫졸드 감독과 함께 한다.
온 디 애더먼트
- 니콜라 필리베르
이번 경쟁부문의 유일한 다큐멘터리 <온 디 애더먼트>는 프랑스 센 강에 세워진 정신과 센터 '아다만트 병원'의 풍경을 포착한다. 그곳에 방문한 환자와 간병인들의 일상을 따라가며 '정신과 병원'이란 말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거둬낸다. 니콜라 필리베르 감독은 그동안 한 학급뿐인 오지의 교실(<마지막 수업>), 40살 먹은 오랑우탄(<네네트>) 등을 주시하며 순수한 인간성을 조명했다. 이번 작품 또한 정신질환이란 딱지를 떼고자 피사체를 사려 깊게 담았다.
더 서바이벌 오브 카인드니스
- 롤프 드 히어
한 흑인 여성이 우리에 갇힌 채 사막에 버려졌다. 여성은 필사적으로 우리에서 빠져나와 사막을 걷기 시작한다. 자신처럼 속박된 사람들을 찾기 위해. 롤프 드 히어 감독은 9년 만의 신작 <더 서바이벌 오브 카인드리스>로 베를린 영화제에 초청됐다. 웨스턴풍의 사막을 지나 산으로, 도시로 향하는 흑인 여성의 여정은 현대 사회에서 백인 외 소수 민족이 겪어야 하는 역경을 형상화한다. 9년 전 작품 <찰리의 나라>와 주제를 공유하면서 좀 더 우화적인 형식을 취했다.
스즈메의 문단속
- 신카이 마코토
이번 경쟁작들을 살펴보며 '낯선 이름투성이'라고 느낀 사람도 이 감독은 알 것이다. <너의 이름은.>으로 전 세계를 열광케 한 신카이 마코토 말이다. 그의 신작 <스즈메의 문단속>은 세상에 재난을 부르는 '문'들을 닫으려는 스즈메와 의문의 청년(이자 의자가 된) 소타의 이야기를 다룬다. 신카이 마코토 하면 떠오르는 청량한 느낌의 작화와 문에서 시작되는 거대한 스케일의 재난이 인상적인 시너지를 낸다. 작중 배경을 거의 그대로 묘사하는 신카이 마코토가 그리는 규슈, 시코쿠, 고베 등은 어떨지도 포인트.
토템
- 릴라 아빌레스
데뷔작 <메이드>로 세계 각종 영화제에 초청을 받은 릴라 아빌레스 감독은 두 번째 작품으로 경쟁 부문에 초청됐다. <토템>은 젊은 화가이자 아버지, 동시에 병마로 죽어가는 토나의 생일파티 겸 작별 인사를 준비하는 사람들의 하루를 담았다. <메이드>에서 호텔의 좁은 공간을 중심으로 인물을 그렸던 아빌레스는 <토템>에서 저택의 공간을 매개로 이 모순적인 파티를 준비하는 사람들의 관계를 일구어낸다. 세상에 존재하는 생명과 식물, 그리고 인간 전체를 아우르는 드라마가 <토템>의 중심에 뿌리내리고 있다.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
사진=베를린 영화제 공식 웹사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