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카이 마코토 감독 신작 <스즈메의 문단속>이 3월 8일 개봉한다. 이미 일본에서는 2022년 11월 개봉해 현재까지 자국 내에서만 137억 엔(약 1307억 원)이 넘는 극장 수익을 거뒀고 지난 2월 개봉 87일 만에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 국내에서는 아직 개봉 전이지만 몇몇 상영관에서 유료 시사회를 열어 현재 2만여 명 넘는 관객이 관람을 했다.
<스즈메의 문단속>에 대한 관심은 비단 국내를 비롯, 아시아 관객에만 국한된 것만은 아니다. 이번 영화는 얼마 전 폐막한 73회 베를린 국제영화제 경쟁 부문 후보에 오르기도 했는데, 일본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로서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으로 황금공상을 수상한 이후 21년 만의 진출이다. 현재 199개국에서 개봉 준비 중이다.
국내 누적 관객수 380만 명을 돌파한 <너의 이름은.>은 ‘신카이 월드’라고까지 부르는 신카이 감독 특유의 작품 세계가 대중적 호응을 얻게 된 시작점이었다. 일본 역대 흥행 영화 5위에 오른 이 작품 이후 그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수하며 세계관과 캐릭터 구도, 스타일이 유사한 <날씨의 아이>를 연이어 발표했다. 이번 신작 <스즈메의 문단속> 역시 일종의 재난 판타지 3부작으로 엮어도 무방할 정도로 반복된 이야기와 캐릭터를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스즈메의 문단속>은 이전의 신카이 월드가 보여주지 않았던 새로운 면모를 뽐내고 있기도 하다. 무엇이 달라졌을까.
다시 시작된 운명의 여정
“이 근처에 폐허 없니? 문을 찾고 있어”
규슈 미야자키현의 한 해안가 마을에 사는 스즈메(하라 나노카)는 등굣길에 우연히 한 남자와 마주치게 된다. 그의 이름은 소타(마츠무라 호쿠토). 폐허 속에서 문을 찾고 있다는 다소 이상한 첫인사를 남긴 소타의 뒤를 따른 스즈메는 무너져 가는 옛 온천마을 터에서 이상한 문을 발견하게 되고 문틈 사이로 다른 세계에서 비집고 들어오려는 괴상한 불기둥 같은 존재를 보게 된다. 이후 스즈메는 소타가 짊어지고 살아가는 어떤 운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발을 들이게 되고 두 사람은 사람들을 위기로 몰아넣는 힘의 출몰을 막기 위해 반드시 닫아야만 하는 문을 찾아 긴 여행길에 오르게 된다.
코로나19 이후 전 세계에 불어 닥친 팬데믹으로 우리의 일상은 급격하게 달라졌다. 영화나 드라마의 재난 묘사가 이전과 다르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과거엔 그저 창작물 속 기이한 사건에 그쳤다면 이제는 영화보다 더 끔찍한 현실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 일찍이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너의 이름은.>을 만들 때부터 사람들의 마음 속 깊이 자리 잡은 재난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작품에 담아냈다. 인간의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재난에 대한 두려움 앞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오늘 하루를 잘 버티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굳센 마음가짐이야말로 '신카이 월드'를 관통하는 메시지 중 하나였다.
이번 영화도 마찬가지다. 스즈메와 소타가 필사적으로 닫아야만 하는 문이란 것은 결국 무너진 폐허 위에서도 사람들이 지키고 살아야 하는 일상과 오늘의 소중함을 뜻하는 것은 아닐까. <너의 이름은.>의 타키와 미츠하가 시공간을 뛰어넘어 서로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던 것도, <날씨의 아이>에서 자신의 수명을 갉아먹어가면서까지 맑은 날씨를 불러모아야 했던 히나의 능력도 모두 사람들의 일상, 오늘의 소중함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었다.
달라진 인물 구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일상을 지켜야만 하는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다름 아닌 소년 소녀들이었다는 점도 신카이 마토코 감독 세계의 중요한 설정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약간의 추가 설정이 등장한다. 스즈메가 첫 눈에 사로잡힐 정도로 잘생긴 외모를 자랑하던 소타가 삐그덕거리는 의자로 바뀌게 된다. 정확히는 의자에 영혼이 갇히게 된다. <미녀와 야수>의 설정을 비튼 것처럼 보이는 설정 때문에 둘의 여정은 더욱 꼬여만 간다.
감독은 이번 영화를 구상하면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마녀 배달부 키키>,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 「개구리군, 도쿄를 구하다」 등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하기도 했는데 스즈메와 소타의 관계는 시공간을 초월해 연애 감정을 느끼게 되는 십 대 청소년들의 인물 구도에서 약간은 벗어나 있다. 사람이 낡은 의자로 변하게 되는 핸디캡을 준 다음, 주인공들로 하여금 보다 근원적인 질문을 풀어나가게 하겠다는 연출 의도가 담겨 있는 설정이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날씨의 아이>가 개봉했던 2019년 어느 여름날에 이번 영화의 구상을 시작하게 됐다. 그는 <날씨의 아이> 무대인사를 하러 일본 전역을 돌아다닐 당시에 곳곳에서 폐허가 되어가는 곳들을 발견했다. 본인의 본가가 있는 나가노현에서도 폐허가 된 마을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일본 지방 도시의 현실에서 착안, 특정한 장소를 애도하는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한 소녀가 이상한 외형을 가진 사람과 동행하게 되는 이야기의 테마를 떠올리게 됐다.
그는 또 고인을 떠나 보낼 때 의식을 치르는 제사, 혹은 새로 지어진 건물을 지을 때나 공사를 시작할 때 제를 지내는 지진제 등의 위로를 받지 못하는 버려진 땅과 마을을 작품에 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일본 전역에 있는 폐허를 배경으로 재앙의 근원인 문을 찾아다니면서 고군분투하는 소녀 스즈메의 이야기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새로운 로드 무비
“너는 두렵지 않느냐?” “나, 다녀올게.”
2002년 단편 영화 <별의 목소리>로 데뷔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초속5센티미터> <별을 쫓는 아이> <언어의 정원> 등의 전작을 통해 세계를 구할 운명에 처한 아이들의 삶, 불안과 절망으로 가득한 세상을 비추는 한 줄기의 환한 빛, 도시의 일상을 따스하게 만드는 자연의 아름다움 등을 세밀하게 묘사해왔다. 현재 그는 일본의 역대 흥행 영화 순위 5위에 오른 <너의 이름은.> 이후 <날씨의 아이>와 <스즈메의 문단속>이 나란히 흥행 순위 14위와 15위에 오르면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이후 가장 주목받는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이 됐다.
그의 전작들이 그랬듯이 이번 영화도 액션, 판타지, 로드 무비의 장르적 특징을 띄고 있는데 가장 돋보이는 건 일본 전국을 돌면서 벌어지는 여정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규슈의 미야자키현부터 시작해서 에이메현, 효고현 등이 배경으로 등장하고, 수도인 도쿄는 물론 도호쿠 지역의 미야기현까지 이어지는 길고 긴 여정을 그려내고 있다. 촬영지 성지순례라는 독특한 팬덤까지 형성했던 신카이 월드의 섬세한 배경 묘사가 이번 작품에서도 빛나게 된다.
1700 대 1의 어마어마한 경쟁률을 뚫고 캐스팅된 스즈메 역의 하라 나노카, 그리고 소타 역에 캐스팅된 6인조 남성 아이돌 '스톤즈' 출신의 마츠무라 호쿠토, 신카이 마토코의 작품세계를 돋보이게 해주는 음악을 담당하는 래드윔프스, <너의 이름은.>과 <날씨의 아이>에 이어 이번에도 캐릭터 디자인을 맡은 타나카 마사요시, 신카이 감독이 빛의 마술사라는 별명을 얻게 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미술감독 탄지 타쿠미 등이 모두 <스즈메의 문단속>에서 신카이 마코토 감독 작품세계를 아름답게 꾸며진 조력자들이다. 다시 한번 살아갈 힘을 얻게 해주는 메시지를 던져주는 신카이 월드의 매력이 활짝 열렸다.
김현수 영화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