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웨일>. 브랜든 프레이저의 이 연기는 존재만으로 파격적이다.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1주일도 채 남지 않은 가운데, 남우주연상 부문에서 치열한 삼파전이 이어지고 있다. 엘비스 프레슬리로 완벽하게 빙의하여 큰 화제를 모은 <엘비스>(2022)의 오스틴 버틀러,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엄청난 연기를 보여준 <이니셰린의 밴시>(2023)의 콜린 파렐, 그리고 270kg의 거구라는 매우 어려운 연기를 훌륭하게 수행한 <더 웨일>(2023)의 브랜든 프레이저가 유력 후보로 꼽히고 있다. 세 후보 모두 처음으로 아카데미에 후보로 선정되었지만, 다른 후보들에 비해 브랜든 프레이저의 이름은 어색하게 다가온다. 콜린 파렐은 빼어난 연기력으로 이미 정평이 난 할리우드 스타이며, 오스틴 버틀러는 아역 때부터 TV 시리즈와 브로드웨이를 종횡무진했던 내실 있는 젊은 배우지만, 브랜든 프레이저는 2000년대 초반 <미이라> 시리즈의 성공 이후 오랜 기간 대중들의 뇌리에서 잊힌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영화 <더 레슬러>. <더 웨일>과 <더 레슬러>는 데칼코마니 같다.

사실 <더 웨일>을 연출한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15년 전에도 이와 비슷한 상황을 만든 적이 있었다. 과거의 영광을 뒤로한 채 완전히 실패한 레슬러 ‘랜디’의 이야기를 다룬 <더 레슬러>(2008)로 80년대 전성기를 구가했던 미키 루크를 복귀시켰다. 그리고 미키 루크는 <더 레슬러>로 골든 글로브 남우주연상을 거머쥐는 쾌거를 이뤄냈다. 두 배우의 재기작이라는 특징 외에도 <더 레슬러>와 <더 웨일>은 15년의 간극을 두고 여러모로 닮은 점이 많다. 대런 아로노프스키가 그려낸 구원과 재기의 노래가 담긴 두 작품 <더 웨일>과 <더 레슬러> 간의 평행이론은 지금부터 자세히 알아보자.


브랜든 프레이저 & 미키 루크: 재기의 신호탄

브랜든 프레이저의 리즈 시절은 매력적이다 못해 매력이 넘쳤다

브랜든 프레이저의 전성기는 단연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이었다. 190cm에 가까운 장신에 두꺼운 몸, 그리고 선이 굵은 얼굴을 통해 마초적인 매력을 한껏 풍기는 그는 스티븐 소머즈 감독의 <미이라>(1999) 속 리차드 '릭' 오코넬 역을 맡아 많은 사랑을 받았다. 덕분에 그는 한동안 어드벤처 영화 시리즈에 다수 출연하며, 모험물을 대표하는 배우가 되었다. 하지만, 2007년 이혼을 하면서 정신적 스트레스와 그로 인한 탈모, 체중 증가로 우리가 알던 브랜든 프레이저의 모습은 사라졌고,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그의 붉게 충혈된 눈이 담긴 사진을 밈으로 사용하며 한순간에 그는 조롱거리가 되었다.

브랜든 프레이저의 이 사진은 10년간 밈으로 놀림당해왔다.

미키 루크의 리즈 시절은 정말 퇴폐 그 자체였다.

미키 루크 또한 1980년대 엄청난 미모를 자랑하는 섹시 스타였다. 특히, <나인 하프 위크>(1986)의 말도 안 되는 파격적인 애정신에 관객들이 몰입했던 이유는 오로지 미키 루크의 매력 때문이었다. 전성기 시절 미키 루크는 엄청난 외모만큼이나 탄탄한 연기를 자랑하는 배우였다. 알란 파커 감독과 함께 한 <엔젤 하트>(1987)에서는 연기력으로는 당대 최고였던 로버트 드 니로에 절대 밀리지 않는 에너지를 보였다. 하지만, 1990년 마약 중독으로 인해 연기에 흥미를 잃은 그는 프로 복서로 3년간 활동했고, 이 시기 복싱과 교통사고 등의 문제로 망가진 얼굴을 값싼 성형 수술로 복원하다가 실패하고 만다. 이후에도 <버팔로’66>(1998), <씬 시티>(2005) 등에서 존재감 있는 조연으로 등장했지만, 이전 80년대의 섹시 스타의 모습은 대중의 머릿속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더 웨일> 최초 상영 후 쏟아지는 환호에 브랜든 프레이저는 눈물을 보였다.

이런 두 배우에게 대런 아로노프스키와의 작업은 한 줄기 희망에 되었다. 과거의 영광과 상흔을 안은 채 살아가는 영화 속 주인공의 일생이 이들의 실제 삶과 맞물리면서 엄청난 시너지를 가져왔다. 그 결과, 지난 제79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더 웨일> 상영 직후 브랜든 프레이저는 6분간 기립 박수를 받았다. 미키 루크 역시 2008년 <더 레슬러>를 통해서 다양한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휩쓸었다. 이후 미키 루크는 <아이언맨 2>(2010)의 이반 반코로 제2의 전성기를 이어 나갔다. 브랜든 프레이저 역시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신작 <킬러스 오브 더 플라워 문>에 출연이 확정되며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것으로 보인다.


쇠락하는 육체에도

영화 <더 웨일> 거구의 찰리는 심장이 아프다.

<더 웨일>의 거구가 된 교수 찰리와 <더 레슬러>의 은퇴 직전의 레슬러 랜디는 모두 병든 몸을 이고 살아간다. 찰리는 가정을 떠나 새로운 동성 애인과 사랑을 시작했지만, 그의 사망 이후 슬픔을 참지 못하고 폭식을 이어가다 272kg라는 초고도 비만 상태에 놓인다. 랜디 역시 잦은 불법 약물 복용과 링 위에서 벌어지는 무수히 많은 폭력에 지친 육체가 결국 탈을 일으킨다. 두 노년의 남성은 모두 심장 질환을 앓게 된다. <더 웨일>의 오프닝은 찰리의 얼굴을 공개하자마자 그가 심장 발작을 일으키는 장면에서 출발한다. 게이 포르노를 보고 혼자 성욕을 달래던 그는 갑자기 찾아온 불청객 선교사 토마스(타이 심킨스)의 등장에 놀라 그만 심장마비가 왔다. <더 레슬러> 역시 하드코어 레슬링으로 몸에 유리 파편과 스테이플러 심이 박힌 채 후배들과 농담을 나누던 랜디는 잠시 혼자가 된 순간에 구토하며 심장을 부여잡고 쓰러진다.

영화 <더 레슬러>. 랜디도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중년기에서 노년기로 향하는 두 남성의 육체에는 죽음이 서려 있다. 이들에게 죽음은 간헐적인 공포를 야기하지만, 삶의 모든 것을 변화시킬 요인은 되지 않는다. 찰리는 심장마비가 온 이후에도, 음식물에 질식하여 죽을 위기가 있었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흉통을 느끼지만, 병원에 가기를 한사코 거부한다. 찰리도 죽음은 두렵다. 그는 비만인의 심정지 사망에 대해 구글에 검색해보기도 하고,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초연해지려 한다. 랜디는 쓰러진 이후 의사를 통해 더는 운동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는 의사의 조언을 받아들여서, 예정되었던 레슬링을 모두 취소하고 돌연 은퇴를 선언한다. 하지만, 랜디는 죽음의 위험 속에서도 링 위로 자꾸만 마음이 가고 있다. 이들은 죽음이 자아내는 고통이나 소멸이라는 공포보다 더 우선되는 가치가 있다. 찰리에게는 딸이, 랜디에게는 레슬링이 그를 살아있게 만드는 유일한 이유다.


실패한 아버지라는 부채의식

영화 <더 웨일> 찰리에게는 딸 엘리가 있다.

찰리와 랜디에게는 딸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딸을 오랜 기간 보지 못했다. 찰리는 기존의 가정을 버리고 자신의 동성 제자와 함께 사랑을 시작했다. 랜디는 딸을 챙길 겨를 없이 링 위에 올라가기를 반복했다. 그녀가 자라는 긴 시간 동안 곁에 있어 주지 못했고, 딸들은 그런 아버지를 원망하고 혐오한다. 필요한 순간에 함께하지 못했고, 든든한 버팀목이 되지 못한 그들을 없는 존재처럼 여기고 싶어 한다. 찰리와 랜디는 완벽하게 실패한 아버지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딸의 인생을 보살피지 못했다는 부채 의식이 남아있다.

영화 <더 레슬러> 랜디도 딸 스테파니와 화해하려 한다.

찰리는 자기 몸이 위독한 와중에도 8년 만에 딸 엘리(세이디 싱크)를 불러 그녀의 레포트를 대신 써주려 한다. 랜디는 친한 스트리퍼 캐시디(마리사 토메이)의 추천을 받아 빈티지 의류 매장에서 딸 스테파니(에반 레이첼 우드)의 옷을 선물한다. 그녀와 저녁 식사를 약속하며 앞으로 성실한 아버지로 곁에 머물기를 다짐하려 한다. 하지만, <더 웨일>과 <더 레슬러>는 이 부채 의식을 서로 다른 방법으로 다룬다. 찰리는 자신의 동성 애인이었던 앨런의 죽음 이후, 자신의 딸 엘리의 성장만이 유일한 삶의 이유가 된다. 반면, 랜디는 딸이 아닌 레슬링이 그의 전부다. 죽음을 감수해서라도 링 위에서 생의 의지를 다지길 원한다. 두 남자가 지닌 상이한 삶의 목표는 이들이 당도할 종착역에 영향을 미친다. 하강하는 슬램 기술의 랜디의 육체와 육중한 몸을 일으키려는 찰리의 육체는 구원과 속죄를 구하는 두 남자의 운명을 결정하는 상징적인 장면이기도 하다.


<더 웨일>과 <더 레슬러>는 결국 쇠락하는 몸으로 자신의 과거를 되짚는 남성의 이야기를 다룬다. 회한과 속죄로 가득 찬 마음은 구원을 갈구한다. 하지만, 15년의 간격을 두고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구원론은 많이 달라진 것 같다. 데칼코마니처럼 닮은 듯 다른 두 영화가 끝내 도착하는 곳은 정반대에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두 배우의 삶은 쇠락하는 영화 속 주인공과 달리, 재기의 노래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씨네플레이 최현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