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쾌하고 대담한 복수의 향연이 펼쳐지는 <더 글로리>에서 서걱대는 일말의 찝찝함은, 공적 처벌의 좌절이 사적 복수를 정당화시킬 수 있느냐의 문제다. 절대악에 맞서 멋진 복수극을 곁들이며 가끔은 웃어보자는 드라마를 두고 진지한 것도 병이라면 병이지만, 정당방위는 매우 제한적이며 자력구제는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현행법을 상기할 때, <더 글로리> 그리고 <모범택시 2>로 이어지는 사적 복수 이야기의 유행은, 뭔가 꺼림칙하다.
시작할 땐 '테이큰' 같을 줄 알았던 복수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가해자들 뒤도 캐야하고, 돈도 벌어야 하고 학교도 옮겨야 했다. 하지만 <더 글로리>의 동은(송혜교)은 포기하지 않았고, 18년간 갈아온 복수의 칼날을 효과적으로 휘두른다. 드라마는 그의 복수엔 그만한 사정이 있다고, 가해자 얼굴을 나열하며 시청자를 설득한다. 특히 가해자 중 한 명인 연진의 엄마(손지나)를 볼 때면 한 얼굴이 스치는데, 피해 사실이 명확한 학폭 사건에서 아들의 대학 입시를 위해 '끝장 소송'에 나선 실제 사건 속 어느 부모의 그것이다. <더 글로리>를 쓴 김은숙 작가는 드라마를 집필하게 된 과정을 설명하며 "딸이 죽도록 맞고 오면 해결 방법이 있겠더라"라며 "가해자들을 지옥 끝까지 끌고 갈 돈이 저에게는 있다. 그래서 차라리 맞고 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한다. 이 말이 오싹한 이유는, 만약 금전적 능력을 가진 부모를 가해자의 부모로 상대해야 한다면, 피해자는 대법원 상고까지 각오해야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끝장 소송'에 나선 그 아버지는 당시 아들에게 '해결할 방법은 뒤에 없어. 늘 앞에 있어. 인생은 그런 거야'라고 속삭이며 폭주했을까.
사적 복수의 정당성과 공권력의 존재 이유에 질문을 던지는 드라마가 여기 또 있다. 지난해 4월 방영돼 SBS 역대 드라마 중 시청률 4위를 기록한 인기에 힘입어 시즌 2로 돌아온 <모범택시>다. <모범택시>는 억울한 피해자들의 복수를 대행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정의를 구현하는 한 무리의 상처 입은 '어벤져스'가 주인공이다. <더 글로리> 동은의 복수가 자기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는, 가해자들 사이에 균열을 일으키는 우아한 것이었다면, <모범택시>의 이들은 변장과 잠입, 직접적 구타로 범죄자들을 단죄한다. 사이비 종교단체 순백교의 단죄를 다룬 최근 방영된 8화는 넷플릭스 <나는 신이다: 신이 배반한 사람들> 공분과 맞물려 화제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사적 복수와 공적 처벌 사이의 딜레마는 새로울 것 없는 대중문화의 주제다. 특히 사적 복수는 서부영화의 단골 테마였는데, 서부극의 황혼기에 장르 자체의 인기가 시들해지면서 권총을 뽑아들던 사나이들의 서사도 저물게 된다. 서부영화의 거장 존 포드의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는 무법자들이 판치는 시대에서 문명과 문화의 시대로 이행되는 과정을 가장 극적으로 그린 영화다. 존 웨인이 연기한 이 영화의 주인공 톰은 악당 리버티 밸런스를 물리치지만 그 공로를 정의감 넘치는 변호사 랜섬에게 돌리고 술에 절어 아웃사이더로 살아간다. 톰이 자신의 행위를 감췄던 이유는 법과 질서로 대변되는 새 시대에 자신이 설 자리는 없음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존 포드는 총잡이 톰을 대신해 변호사 랜섬이 마을의 영웅으로 칭송받게 되는 과정을 그리며 폭력의 시대, 사적 복수의 시대가 끝나고 법의 시대, 공권력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천명한다.
사적 복수를 인정하는 중세 시대를 거쳐 국가가 법을 정해 피해자의 복수를 대신하는 식으로 인류의 사법체계는 발전했고, 전자에 가까운 서부극은 법과 공권력에 자리를 내주며 저물었는데 <더 글로리>와 <모범택시 2>의 당대적 유행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먼저 법 제도를 악용한 특권층의 학폭 처벌 회피와 뿌리 뽑을 수 없는 사회악으로 대변되는 사이비 종교에 관한 두 개의 실제 사건이 픽션과 포개지며 법치주의에 대한 거대한 대중 불신이 읽힌다. 사적 복수의 유행은 또한 민주적 합의를 도출하는 사회적 시스템의 마비와 합리적 판단 능력의 퇴행을 경고하는 신호이기도 하다. 두 드라마는 법치에 대한 불신이라는 대중 감정 저류에 흐르는 불만을 영리하게 포착해 그것을 과장되게 펼쳐 보임으로서 시선 끌기에 성공한다.
어떤 이들은 사적 복수 드라마의 유행을 걱정하며 이 열광이 법치주의에 균열을, 아노미 상태의 도래를, 야만의 시대로의 회귀를 불러올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 결론은 매우 성급해 보인다. 아무리 사법 정의가 무너진 시대라지만, 일개 '몸에 그림 있는 오빠들'이 정의를 구현해 줄 리 만무하고, 특정 폭력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순간, 다른 종류의 폭력도 감수해야 함을 우리는 안다. 사적 복수가 가능한 세계야말로 사회적 경제적 강자가 지배하는 아노미적 세계일 것이라는 것 또한 쉽게 상상이 된다. 그래서 <더 글로리>와 <모범택시 2>의 유행이 사적 복수에 열광하는 사회를 낳는다는 우려는 지나치다.
생각해 보라. 사적 복수 드라마가 유행하기 바로 얼마 전, 법을 통한 정의 구현을 외쳤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나 <소년심판> 같은 드라마에 열광했던 것이 우리다. 개별적 사건들로 법치주의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고 있지만, 법 앞에 만인의 평등을 드러내는 법치주의의 근간은 확고해야 한다는 것을, 법률가는 약자를 대변할 수 있기에 멸종되지 않고 살아남아야 함을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이봉련이 연기한 류재숙 변호사를 통해 깊이 공감했던 터다.
많은 이들이 동은과 <모범 택시>의 무지개 운수 사람들의 복수극에 찬성하는 것은, 무법의 세상을 옹호해서가 아니다. 다만 산업이 돼버린 학폭 소송에서 돈 때문에 물러나고 성숙한 부모의 부재로 제대로 된 사과나 화해의 기회를 갖지 못한 아이들을 무력하게 지나친, 드라마 속 양호 선생님의 절절한 자기반성은 곧 우리의 것이기도 하기에, 사적 복수는 반사회적 죄악이며 너의 복수는 잘못됐다라고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문화기획자 하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