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투병으로 공백기를 가졌던 당시를 다룬 다큐멘터리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

일본의 저명한 음악가 사카모토 류이치가 지난 3월 28일, 71세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75년 데뷔 이래 치료를 위해 잠시 활동을 멈춘 것 외엔 큰 공백 없이 왕성한 창작력을 발휘해 온 아티스트인 만큼 그의 흔적이 닿은 영화들도 상당하다. 사카모토 류이치의 넋을 기리며, 그의 음악이 흐르는 영화들을 연대순으로 꼽았다.


전장의 크리스마스

Merry Christmas, Mr. Lawrence, 1983

사카모토 류이치는 1975년 일본의 여러 뮤지션들의 작/편곡과 세션으로 음악 커리어를 시작해, 3년 후 호소노 하루오미와 타카하시 유키히로와 함께 (훗날 전자음악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밴드 '옐로우 매직 오케스트라'를 결성해 해외까지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사카모토의 첫 영화음악 작업은, <감각의 제국>(1976)으로 세계적인 인지도를 가진 일본 거장 오시마 나기사의 1983년 작 <전장의 크리스마스>다. 일본, 영국, 뉴질랜드 등이 합작해 가수 데이비드 보위, (아직 감독으로 데뷔하지 않은 '비트 다케시' 시절) 코미디언 기타노 다케시를 주연으로 캐스팅 한 <전장의 크리스마스>에서 사카모토는 영화음악뿐만 아니라 극중 포로수용소 소장인 일본군 대위 요노이를 연기하기까지 했다. 본래 가수 겸 배우 사와다 켄지가 요노이 역 물망에 올라 있었으나, 오시마 나기사 감독이 책에서 사카모토의 얼굴을 보고 잭 소령(데이비드 보위)에게 이끌리는 캐릭터에 어울린다고 판단해 배우로도 기용한 것. 신디사이저를 적극 활용해 동서양의 무드를 두루 담아낸 주제곡 'Merry Christas Mr. Lawrence'를 필두로 한 사운드트랙을 통해 사카모토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됐다. 오시마 나기사 감독은 기타노 다케시가 주연을 맡은 유작 <고하토>(1999)의 음악 역시 사카모토에게 청했다.


왕립우주군: 오네아미스의 날개

王立宇宙軍~オネアミスの翼, 1987

훗날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와 <에반게리온> 시리즈를 만드는 애니메이션 제작사 '가이낙스'의 창립작 <왕립우주군: 오네아미스의 날개>는 사카모토 류이치가 처음 작업한 애니메이션이다. 오랫동안 그의 유일한 애니메이션 작품으로 남아 있었지만 30년 후 한중일 합작 애니메이션 <안녕, 티라노: 영원히, 함께>(2017)가 추가됐다. <왕립우주군: 오네아미스의 날개>는 사카모토와 더불어, 1986년 일본 내 최고 흥행을 기록한 <마일로와 오티스의 모험>(1986)에서 함께 한 우에노 코지, 노미 유지, 쿠보타 하루오 세 아티스트가 합세해 다양성을 더했다. 사카모토는 2018년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를 두고 한 인터뷰 중 "35년 전에 애니메이션 음악을 담당했지만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아 제목을 말할 수 없다"고 언급한 바 있다.


마지막 황제

The Last Emperor, 1987

이탈리아의 거장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는 데뷔 이래 대부분 작품의 음악을 엔니오 모리코네에게 맡겼다. 3살에 왕위에 올라 3년 만에 퇴위한 푸이 황제의 삶을 영화화 한 <마지막 황제>는 일본의 사카모토 류이치, 미국의 데이비 번, 중국의 소총이 사운드트랙을 분담해 이탈리아 감독이 연출한 중국 역사 영화라는 기묘한 정체성을 뒷받침했다. 데이비드 번이 작곡한 메인 테마보다 사카모토의 'Rain'이 특히 많은 사랑을 받았다. <전장의 크리스마스>와 마찬가지로(만큼 큰 비중은 아니지만) 사카모토는 푸이를 조종하는 일본군 장교 아마카스 마사히코 역으로 얼굴을 비추기도 했다. <마지막 황제>로 사카모토는 일본은 물론 아시아 아티스트 최초로 오스카 음악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베르톨루치와 사카모토의 협업은 다음 작품 <마지막 사랑>(1990), <리틀 부다>(1993)까지 연달아 이어졌다.


하이힐

Tacones lejanos, 1991

두 유럽 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와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공통점. 전작의 음악을 엔니오 모리코네와 함께 했다가 다음 작품에서 사카모토 류이치를 음악감독으로 지목했다. 가수가 되기 위해 딸을 버리고 멕시코로 떠난 여자가 15년 만에 딸과 재회하면서 벌어지는 치정극을 위해, 사카모토는 음울하면서 격정적인 피아노와 오케스트라 연주로 주요 오리지널 스코어를 구성하고 살짝 들뜬 분위기의 신스팝 트랙을 곁들여 영화음악을 완성했다. 하지만 알모도바르와 사카모토의 연은 거기까지였다. 알모도바르는 모 인터뷰에서 사카모토의 음악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밝혔고, (음악감독이 따로 없는 <키카>를 거쳐) 1995년 작 <비밀의 꽃>부터 최근작 <페러렐 마더스>(2019)까지 꾸준히 알베르토 이글레시아스와 음악 작업을 같이 하고 있다. 스페인 감독인 알모도바르와 작업한 <하이힐>이 개봉한 이듬해 사카모토는 바르셀로나 올림픽 개막식 음악을 작곡하고 지휘했다.


스네이크 아이즈

Snake Eyes, 1998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을 좋아하는 감독은 사카모토 류이치에게도 이끌리는 걸까. 갱스터 영화 <언터처블>(1987)과 전쟁 영화 <전쟁의 사상자들>(1989)을 모리코네의 선율로 채운 브라이언 드 팔마는 <미션 임파서블>(1996)의 어마어마한 성공 이후 내놓는 야심작 <스네이크 아이즈>의 음악감독으로 사카모토를 초대했다. 헤비급 챔피언의 복싱 경기에서 벌어진 국방 장관의 총살 사건을 부패 경찰이 추적하는 영화의 막 나가는 전개에 걸맞게, 사카모토의 스코어 역시 다분히 격정적이다. 10분이 훌쩍 넘는 롱테이크를 자랑하는 오프닝에선 그의 음악을 들을 수 없어 아쉽지만 기나긴 신의 호흡의 밀도를 떠올려 보면 마땅한 부재다. 드 팔마의 2005년 작 <팜므 파탈>의 음악 역시 사카모토가 담당했다. 공교롭게도 <스네이크 아이즈>와 <팜므 파탈> 모두 드 팔마 작품 중에서도 호불호가 뚜렷하게 갈리는 축에 속한다.


토니 타키타니

トニー滝谷, 2004

사카모토 류이치를 두고 한국에서 흔히 붙이는 수식으로 '뉴에이지 피아니스트'가 있다. 데뷔 이래 근 50년간 시티팝, 전자음악, 클래식, 탱고 등 다양한 갈래를 누비는 가운데 종종 선보였던 일련의 피아노 작업에 한정하는 말.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일본영화 <토니 타키타니>는 피아니스트의 면모를 흠모하는 이들에게 더없이 좋은 자리다. 앞서 소개한 영화들과 달리 오로지 피아노 연주로만 이루어진 음악은 비주얼과 이미지 모두 미니멀한 매력이 돋보이는 영화에 무게감을 더했다. 악기는 단출하되 그것이 차분히 풀어놓는 선율의 진행은 결코 만만치 않다. 사카모토와 음반사 '에이벡스'가 공동 설립한 레이블 '커먼스'에서 발매된 첫 영화음악 사운드트랙이다.


바벨

Babel, 2006

멕시코 감독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는 데뷔작 <아모레스 페로스>(2000)부터 아르헨티나 음악가 구스타보 산타올라야의 음악을 새겨왔다. 세 번째 영화 <바벨>의 음악감독 역시 산타올라야다. 하지만 많은 관객들의 뇌리에 가장 깊게 남은 음악은 엔딩과 함께 흐르는 사카모토 류이치의 'Bibo no Aozora'일 것이다. 사카모토의 1995년 앨범 <Smoochy>에서 몽환적인 일렉트로니카 넘버로 처음 발표된 'Bibo no Aozora'는 이듬해 기존의 명곡들을 피아노 트리오(피아노, 첼로, 바이올린)로 연주한 컴필레이션 <1996>에 처연하디 처연한 편곡으로 수록되면서 보다 강력한 생명력을 얻게 됐다. <바벨>엔 <1996>과 2004년 발표된 </04> 두 버전의 'Bibo no Aozora'가 사용됐다. 두 녹음 모두 사카모토 류이치가 피아노를 자크 모렐렌바움이 첼로를 연주했지만, 전자는 에버트 넬슨 후자는 고토 유이치로가 바이올린을 켰다. <바벨>로부터 9년 후 이냐리투는 사카모토(과 알바 노토)가 음악감독을 맡은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2015)를 발표했다.

<1996>(왼쪽), </04>


어머니와 살면

母と暮せば, 2015

사카모토 류이치는 2014년 여름 인두암 투병 사실을 밝히며 음악 활동 중단을 밝혔다. 다행히 아주 긴 부재는 아니었다. 그 다음 해 연말 개봉한 일본영화 <어머니와 살면>의 영화음악으로 창작 활동을 재개했다. <어머니와 살면>은 일본의 대표적인 시리즈 '남자는 괴로워'를 연출한 야마다 요지 감독의 가족영화로, 나가사키 원폭으로 아들을 잃은 조산사가 3년이 지나 아들을 잊기로 하지만 아들의 영혼이 나타나 화목한 시간을 보낸다는 이야기다. '남자는 괴로워'의 팬이었던 사카모토는 "핵 없는 세상을 바라는 나로서는 이 작품을 할 수밖에 없다. 이런 대작이 투병 후 복귀 후 첫 작품이니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사명감을 드러냈다. 투병 이후 복귀작이자 모성애를 내세운 가족영화인 만큼 거창한 음악적 시도보다는 잔잔하게 감정을 북돋는 방향의 선율들이 담겼다.


남한산성

2017

2017년에 내놓은 영화음악은 모두 한국이 관여한 작품이다. 하나는 앞서 언급한 한중일 합작 애니메이션 <안녕, 티라노: 영원히, 함께>, 다른 하나는 <오징어 게임>(2021)의 황동혁 감독이 2017년 내놓은 사극 <남한산성>이다. 한국 내 흥행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역에 리메이크 된 <수상한 그녀>(2014)의 성공에 힘입어, 김훈 작가의 베스트셀러 소설 <남한산성>을 토대로 병자호란이 한창이던 1636년을 영상으로 옮겼다. 이병헌 김윤석 박해일 등 화려한 캐스팅이 청나라 군대에 완전히 포위된 상황에서 치욕을 참고 나라와 백성을 지켜야 한다는 최명길과 공격에 마지막까지 맞서 싸워야 한다는 김상헌의 의견에 인조가 번민하는 상황을 보여준다. <남한산성>에 추위와 굶주림을 동반한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의 느낌을 내고 싶었던 황동혁은 영화를 만들기 전 <마지막 황제>를 봤고 마침 두 작품의 음악감독이 사카모토 류이치인 걸 깨닫고 그에게 영화음악을 청했다. 불가능할 것 같았던 작업이 성사되고, 사카모토는 대금 피리 아쟁 등 한국의 전통악기를 적극 활용해 스코어를 완성했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Call Me by Your Name, 2017

이번에도 사카모토 류이치가 음악감독으로 이름을 올리지 않은 영화다. <아이 엠 러브>(2009)에 미니멀리즘 음악가 존 애덤스의 피아노곡들로 오리지널 스코어를 대신한 바 있는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티모시 샬라메 주연의 게이 로맨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 사카모토 류이치의 두 명곡을 사용했다. 1984년 앨범 <音楽図鑑>에 처음 수록된 'M.A.Y. in the Backyard'를 피아노 트리오 연주로 편곡한 버전은, 올리버가 엘리오를 어깨를 꽉 잡은 후 자전거를 타고 떠나는 뒷모습을 엘리오가 가만히 바라보고 신이 바뀌고 집에 돌아와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때도 계속 이어진다. 엘리오가 자기를 어색해 하는 올리버에게 쪽지를 쓰는 대목엔, <전장의 크리스마스> 속 음악을 피아노 솔로로 연주한 트랙을 모은 앨범 <Coda> 버전의 'Germination'이 쓰였다. 이렇게 사카모토를 향한 존경을 드러낸 구아다니노는 줄리안 무어 주연의 단편 <더 스태거링 걸>(The Staggering Girl, 2019)과 프로듀서로 참여한 (전작들의 조감독이자 애인이었던 페르디난도 치토 필로마리노 감독의) <베케트>(2021)의 음악감독으로 사카모토를 지목했다.


괴물

怪物, 2023

음악 활용도가 낮아 보이는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의외로(?) 거의 모든 영화의 음악을 각자 다른 아티스트에게 맡겨 왔다. 그에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안긴 <어느 가족>(2018)는 사카모토 류이치와 'YMO'를 이끈 호소노 하루오미가 음악을 만들었다. <어느 가족> 이후 5년 만에 일본 자국에서 제작한 영화 <괴물>의 음악감독이 바로 사카모토다. 티저 포스터에는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와 각본가 사카모토 유지와 함께 '음악: 사카모토 류이치'가 큼직하게 새겨져 있다. 6월 2일에 일본 개봉을 앞두고 있어 아마도 오는 5월 칸 영화제 최초 공개가 유력한 작품이었는데, 사카모토가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괴물>이 그의 영화음악 유작이 되고 말았다.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