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의 이름은.〉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자연재해와 사회적 참사에 대한 묘사가 있습니다. 트라우마에 취약하신 분들은 유의해주시기 바랍니다.

<너의 이름은.>

타키(카미키 류노스케)는 밤하늘을 현란하게 수놓으며 가로지르는 티아마트 혜성을 넋 놓고 바라본다. TV에선 혜성의 핵이 갈라져 조각이 떨어져 나오는 장면을 생중계하고, 아나운서는 1200년 주기로 지구 근처를 지나는 티아마트 혜성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게 큰 행운이라 말한다. 타키는 혜성이 쪼개지는 걸 보겠노라며 옥상으로 뛰어올라 간다. 미래의 타키는 옥상에서 바라본 티아마트 혜성을 이렇게 회고한다. “그것은 마치 꿈속 풍경처럼 그저 한없이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과연 신카이 마코토는 티아마트 혜성을 애니메이션 역사에 길이 남을 만큼 아름답고 신비롭게 그려서, 영화 시작과 함께 스크린에 가득 채워 관객들의 눈앞에 전시한다. 아직 작품의 반전을 모르는 관객들 또한 별 생각 없이 그 스펙터클을 마음 놓고 감상한다. 그렇게 손에 잡힐 듯 머리 위 가까이 혜성이 지나가면 그게 비정상이라는 위화감도, 그렇게 가까이 지나가는 혜성이라면 어딘가에 낙하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같은 건 가지지 않은 채.

<너의 이름은.>

그렇게 그저 작화가 아름다운 흔한 타임슬립물에 그칠 수도 있었던 〈너의 이름은.〉(2016)은, 티아마트 혜성의 아름다움에 심취한 사람들과 그 결과물인 이토모리 호수를 대비시켜 보여주면서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미츠하(카미시라이시 모네)와 이토모리 마을 사람들에게 티아마트는 끔찍한 재앙이었다. 그 날, 그들의 머리 위를 지나가던 티아마트에서 떨어져 나온 별의 조각들은 이토모리를 강타했고, 마을 인구의 1/3인 500여 명이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한때 이토모리 ‘마을’이었던 것은 이제 이토모리 ‘호수’가 되었다.

반면 두 눈으로 이토모리 호수를 확인하기 전까지만 해도 타키에게 이 참극은 그저 3년 전 뉴스에서 보았던 사건사고 중 하나에 불과했다. 심지어 참극의 무대인 이토모리 마을의 이름을 듣고도 티아마트를 떠올리지 못할 정도였다. 별이 쏟아지던 날의 기억은 그저 꿈처럼 아득하니까. 그렇게 마냥 보고 즐겼던 혜성 때문에 미츠하가 세상에서 사라졌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타키는, 주체할 수 없는 충격과 슬픔에 잠겨 이토모리 마을의 참극에 대한 기사를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한다.

뒤늦은 후회와 애도, 미처 몰랐다는 죄책감, 비극에 딸려온 스펙터클은 적극적으로 소비하지만 비극으로 희생된 이들에 대해서는 어느샌가 슬그머니 잊어버리고야 마는 무심함에 대한 반성. 내 일이 아닐 때에는 그저 막연하기만 했던 비극은 내 일이 되는 순간 뼈저리게 아파오기 시작한다. 하지만 완전히 ‘남의 일’이기만 한 건 또 얼마나 있을까? 우리가 ‘내 일도 아닌데’라고 생각했던 일들, 혹은 그저 상투적으로 ‘안타까운 일이네’라고 생각하고 넘겼던 일들은, 정말 그저 ‘남의 일’이었을까?

<너의 이름은.>

타키와 미츠하가 꿈 속에서 몸이 바뀐다는 〈너의 이름은.〉의 설정은 타키로 하여금 ‘남의 일’이었던 재난을 ‘내 일’로 받아들이도록 설계된 장치다. 몸이 바뀐 채 미츠하로 살아본 타키에게, 미츠하의 동생 요츠하(타니 카논), 친구 사야카(유우키 아오이), 동급생 카츠히코(나리타 료), 외할머니 히토하(이치하라 에츠코), 그리고 수많은 이토모리 마을 사람들은 더 이상 ‘미츠하의 주변 사람’이 아니다. 함께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누고 함께 수업을 듣고 같은 지붕 아래서 잠을 청했던 그들은, 타키의 주변 사람들이기도 한 셈이다. 그렇기에 타키는 더욱 절박한 마음으로 이토모리 마을을 구하기 위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방법을 강구한다.


사회는 종종 재난의 기억을 애써 일상에서 도려내고 분리하려 든다. 성수대교 참사 희생자 추모탑은 자동차전용도로에 둘러싸여 있어 차가 없으면 방문할 수 없는 위치에 섬처럼 고립되어 있고, 삼풍백화점 참사 희생자 추모탑은 참사 현장이 아니라 멀리 떨어진 양재 시민의 숲 구석자리에 세워져 있다. 대구 지하철 참사 20주기가 되었지만 여전히 추모행사에서 ‘대구 지하철 참사’, ‘2.18’이라는 표현을 쓸 수가 없고, 추모비 또한 ‘추모비’가 아니라 ‘안전상징조형물’이란 이름으로 세워져 있다. 세월호 참사를 추모하는 ‘4.16생명안전공원’은 참사 10주기인 내년 4월이나 돼야 첫 삽을 뜬다. 녹사평역 앞에 분향소를 차린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은 극우 인사들의 조롱과 저주를 견뎌야 했으며, 유가족들이 장소를 옮겨 서울광장에 분향소를 설치하자 서울시는 ‘무단 점유’라며 2900만 원의 변상금을 부과했다.

왜 이렇게까지 필사적으로 재난의 흔적을 지우려고 드는 걸까? 이유를 따지자면 여러 가지일 것이다. ‘집 값이 떨어져서’, ‘재난을 막지 못한 책임, 도리어 재난을 키운 책임을 묻기 시작하면 정권 지지율이 떨어져서’, ‘맨날 우는 모습을 보는 게 피로해서’, ‘이쯤 하면 좀 잊고 살고 싶어서’….

<너의 이름은.>

하지만 그 모든 게 가능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내 일이 아니라서’다. 한 며칠 적당히 슬퍼하는 듯하다가 얼버무리며 ‘이제 일상으로 다시 돌아올 시간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으니까. 아니, 잠시나마 진정 슬퍼했다 하더라도, 어느새 언제 그랬냐는 듯 잊어버리고 잘 살아갈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걸 ‘남의 일’이 아니라 ‘내가 알고 지냈을 수도 있었을 사람들의 일’, ‘어쩌면 내 가족이 겪었을 수도 있었을 일’, ‘나의 일’이라고 생각하면, 이야기는 많이 달라진다. 마치 이토모리 마을의 참극이 타키에겐 더 이상 남의 일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한국처럼 3-4 다리만 건너면 전 국민이 아는 사람인 나라에서, 마냥 ‘남의 일’이라는 게 가능하긴 할까?

미츠하와 ‘인연의 끈’인 ‘무스비’로 연결되어 있어서 3년 전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었던 타키는, 미츠하의 친구들로부터 도움을 받아 마을 사람들 전원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는 데 성공한다. 3.11 동일본 대지진의 충격을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진 작품인 〈너의 이름은.〉은, 그처럼 시간을 되돌려서라도 그날의 결과를 바꾸고 싶었을 일본인들의 염원을 화면 위에 투사한다.

그러나 무스비도 타임슬립도 없는 현실 세계에 발이 묶인 우리에게 허락된 무기는, 기억이 전부일 것이다. 그 날의 참사가 잊히지 않도록, ‘얼굴도 한번 본 적 없는 남들에게 일어난 불행이었을 뿐’이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그래서 언젠가 다시 비슷한 참사가 반복되는 일이 없도록, 그것이 내 일인 양 잊지 않고 끈질기게 기억하는 것. 쉬운 망각과 싸우는 것. 어쩌면 그날 살릴 수도 있었을 그 수많은 목숨들에게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고 끊임없이 호명하고 기억하는 것.


이승한 TV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