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 공장> 포스터. 사진 제공=영화사 오원

회색의 공장을 찾아온 남자 ‘복서’(최희섭)은 심장을 다쳤다.

회색의 공장에 갇힌 여자 ‘복희’(전혜진)은 마음에 멍이 들었다.

우연을 가장한 운명 속에서 무채색이었던 두 사람은

어느새 서로에게 가장 선명한 색깔이 되어간다.

조은성 감독이 <션샤인 러브>(2015) 이후 8년 만에 <낭만적 공장>으로 관객과의 만남을 앞두고 있다. 소도시의 자동차 공장에서 경비로 일한 경험과 그때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영화의 줄기가 되었다. 첫 단편을 찍고 경비 일을 하면서 하고 싶은 영화를 하지 못한 채, 반복된 일상에 갇혀 괴로웠던 경험은 <낭만적 공장>에서 생생한 캐릭터와 진심이 담긴 이야기로 되살아났다. 삶의 무게를 버티는 이들에게 위로를 전하는 <낭만적 공장>은 보는 이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앞으로 나아가도록 등을 밀어준다. ‘괜찮다고, 나도 겪어봤다고, 우린 할 수 있다고’. 조은성 감독을 만나 영화와 그의 영화 인생 이야기를 들어봤다.


<낭만적 공장> 조은성 감독. 사진 제공=영화사 오원

영화 개봉을 앞두고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기대 반, 설렘 반, 걱정 반 그렇죠, 뭐(웃음). 사실 이번이 두 번째 영화 개봉이잖아요. <션샤인 러브>로 데뷔할 때는 아무것도 몰랐으니 그랬다고 해도, 지금은 조금 아니까 긴장이 좀 되긴 합니다.

영화 <낭만적 공장>에 대해 간단한 소개 부탁드릴게요.

시나리오 쓸 때부터 생각한 건데요. 어딘가에 있을 법한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 뭔가 큰 의미를 주는 이야기라기보다는 우리 옆에 있을법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입니다. 소시민적인 느낌도 있고, 우리 이웃의 이야기라 생각하시고 보면 좀 더 편하실 거 같아요.

<낭만적 공장>이라는 제목이 참 재밌게 다가오더라고요. 어떻게 지으신 건가요?

제 경험에서 온 거예요. 제가 정말로 공장에서 경비 아르바이트를 했거든요. 그때 겪었던 일들을 생각하면서 시나리오로 쓴 거죠. 어차피 공장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인데, 이 앞에 무얼 넣을까 고민했습니다. ‘사랑의 공장’이나 뭐 어떤 공장 이렇게 여러 개를 붙여 봤어요. 그러다 두 사람이 공장이라는 회색지대 같은 곳에서 만나는 것이 좀 낭만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더라고요.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보지 않는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잖아요. 낭만적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랑이라는 단어와 공장이라는 단어가 안 어울리는데, 붙여놓으니 영화의 성격이랑도 잘 맞는 것 같아서 그렇게 지었습니다.

<낭만적 공장> 스틸컷. 사진 제공=영화사 오원

영화의 아이디어에 자전적인 부분이 녹아 있었군요.

2002년 월드컵 때였어요. 충남 아산에 있는 공장에서 한 일 년 반 정도 일했습니다.

시나리오 집필부터 크랭크업까지 얼마나 걸렸나요?

사실 시나리오는 한두 달 만에 끝낸 거 같아요. 예전에 있던 일이기도 했으니까요. 사실 설마 저도 그걸 쓸까 하고 전혀 생각을 못 했던 거죠. 시나리오를 쓴다고 결심하고 어느 날 갑자기 실타래가 풀리듯 써지더라고요.

예산 확보가 관건이었을 거 같아요.

2019년에 인천영상위원회에서 제작 지원을 받았어요. 그걸로는 부족해서 다른 곳에서 투자를 알아봤죠. 그러다 결국 무산되면서 한 해를 넘겼고, 다행히 충남영상위원회에서 제작 지원을 더 받아서 촬영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게 없었으면 아마 힘들었을 거예요. 2020년 9월 말에 촬영에 들어가서 14회차로 촬영을 마쳤습니다.

<낭만적 공장> 스틸컷. 사진 제공=영화사 오원

정말 빠듯하게 촬영하셨겠네요.

저희 피디가 <다음 소희>(감독 정주리, 2023)도 한 베테랑이에요. 김지연 피디가 눈뜨고 차 문 열리자마자 ‘슛’ 외치라고 할 정도로 빡빡하게 찍었습니다(웃음). 스태프와 배우들이 정말 힘들었죠.

영화 주조연들 이름이 ‘심복서’(최희섭), ‘김복희’(전혜진), ‘낙봉’(박수영)이에요. 참 정겨운 이름들은 어떻게 떠올리신 거예요?

우선 주인공 심복서는 제 고등학교 친구 이름입니다(웃음). 친구 아버지께서 못다 이룬 권투선수의 꿈을 이루라고 아들에게 그런 이름을 지어주신 거예요. 근데 애는 <아기 공룡 둘리>에 나오는 마이콜처럼 정말 깡말랐던 친구예요. 복서라는 이름과 전혀 상관 없이 음악을 했고요. 그게 너무 재밌었어요. 만약 시나리오를 쓴다면 친구 이름을 꼭 쓰겠다고 생각했었죠. 그때 구상했던 시나리오는 복서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가 세상과 맞서 싸우는 내용이었어요. 그런데 이야기가 잘 안 풀리더라고요. 그러다 <낭만적 공장>에 복서를 대입하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전직 축구선수에 싸움을 못하는 복서. 재밌잖아요(웃음).

그럼 ‘복희’랑 ‘낙봉’은요?

복희는 친구네 고양이 이름입니다(웃음). 여자주인공 이름을 뭐로 하지 고민하는데, 친구 고양이 이름이 복희라고 하는 거예요. 너무 이쁘잖아요. 실제 복희의 일상이랑 좀 반대적인 느낌도 있으니까요.

낙봉은 사실 제가 경비일 할 때 실제 계셨던 분 이름입니다. 성낙봉이라고 되게 재밌게 생긴 분이셨어요. 박수영 배우가 했던 역할과 느낌도 비슷해요. 도박, 술 좋아하셨고 돈도 엄청 잃기도 했고요. 사실 <낭만적 공장> 찍을 때 공장으로 헌팅을 갔어요. 아직도 경비일을 하고 계신다더라고요. 안타깝게도 시간이 안 맞아서 못 뵈었죠. 그분이 월급날이면 늘 고스톱을 치면서 돈을 많이 따기도 했고, 잃기도 했었습니다. 돈 많이 잃은 날은 일주일이나 집에 안 가고 인형뽑기 자판기 가게에만 틀어박혀 계셨죠. 영화에서 낙봉처럼요.

<낭만적 공장> 스틸컷. 사진 제공=영화사 오원

그렇게 재미난 캐릭터를 왜 영화에서….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이렇게 질문을 해야겠네요(웃음).

사실 낙봉에 대한 버전이 두 개 있었어요. 그런데 너무 판타지 같은 느낌이 들어서 지금 버전을 선택한 거죠. 어떻게 보면 낙봉이 복서의 미래처럼 느껴졌거든요. 거기서 경비로의 삶을 쭉 살게 되는. 복서가 홀로 서려면 좀 벽을 깨고 나가야 하기 때문에 낙봉에 대해 그런 선택을 한 겁니다. 자세한 건 영화에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웃음).

황반장(한승도)은 불륜, 도박, 음주, 폭력 뭐 남자로 해서는 안 될 모든 것들을 스스럼없이 하는 인물입니다. 거리낌이 없죠. 어떻게 이런 캐릭터를 설정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역시 경비일 하실 때 주변인을 참고하신 건가요?

경비일을 하면서 느낀 게 있어요. 제가 인천 출신인데 도심과 지역의 정서가 다르더라고요. 경비일을 하던 곳의 남자들은 굉장히 마초적이에요. 그런데 재밌는 것이 그런 면들이 지역사회에서 또 통용되는 거예요. 제가 알던 사회와 괴리가 굉장히 컸죠. 실제 경비일을 하면서 만난 분이 있는데, 사실 영화의 황반장보다 훨씬 센 캐릭터였어요. 원래 시나리오를 보고 한승도 배우가 “감독님, 이걸 어떻게 해요”라고 되물을 정도였죠. 많이 순화시켰죠. 동물적이고 마초적인 캐릭터라는 점은 유지하면서요. 그 시절 그 지역사회 분위기가 남자면 다 술을 많이 마시거나 도박을 하거나 바람을 피거나…. 셋 중 하나는 꼭 하는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있었어요.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도심처럼 딱히 오락거리가 있는 게 아니라 그랬던 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낙봉 역을 맡은 박수영 배우가 나오면 영화가 안정되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어떻게 캐스팅하신 건가요?

제가 아는 배우들도 시나리오를 읽어보고 낙봉 역을 탐내는 분들도 있었죠. 그런데 말씀하신 대로 낙봉이란 캐릭터가 중심을 잡아주지 않으면 영화 자체가 흔들릴 거 같았어요. 이왕이면 좀 더 안정된 연기를 하는 분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죠. 그때 캐스팅 디렉터가 박수영 배우를 추천해줬어요. 시나리오를 건네고 일주일 후에 만났어요. 복서 역의 최희섭 배우, 복희 역의 전혜진 배우와 함께 만나 고기에 술을 먹으며 이야기했죠. 정말 박수영 배우가 연기를 하면 연기 보는 재미, 맛이 있어요. 시나리오상 대사를 거의 살렸어요. 토시도 하나 안 바꾸면서도 대사의 타이밍이나 말의 억양이나 동선까지 너무 잘 알더라고요. 굉장히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낭만적 공장> 스틸컷. 사진 제공=영화사 오원

구체적으로 한 장면을 예로 들어주신다면요?

음, 이건 처음 이야기하는 거 같네요. 영화 중반에 낙봉이가 경비실에서 복서한테 말해요. 복희랑 잘 사귀어 보라고요. 그런데 아까 말씀드렸듯이 정말 빡빡한 일정으로 찍었거든요. 워낙 일정이 급하게 진행되니 제가 한번 ‘멘붕’이 온 겁니다. 동선을 짜긴 했는데 난감하더라고요. 경비실 장면이 워낙 많다 보니, 비슷한 앵글이 반복되는 거 같아서요. 혼자 고민하고 있는데, 박수영 배우가 와서 바로 그 자리에서 동선을 짜주더라고요. 거기서 힌트를 받아서 무사히 촬영할 수 있었습니다. 동선은 물론이고 여러 면에서 센스 있고 훌륭한 배우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복서의 복희에 대한 마음이 커지는 것에 비례해서 황반장에 대한 적개심도 같이 커져요. 한 번만 더 손대면 죽여버리겠다는 상황까지 가는데, 그 사이사이 대사들이 참 위트 있습니다. 낙봉이 복서에게 “너 나를 왜 말해?”라고 하니 복서가 “이름은 말 안 했어요”라고 답하고, 여기에 낙봉이 “너 아이큐 두 자리여?”라고 바로 되받는 장면 같은 것들요. 영화 분위기가 너무 가라앉지 않도록 해주더라고요.

사실 그 대사는 애드리브였어요(웃음). 낙봉이라는 캐릭터가 실존 인물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충청도 사투리가 굉장히 심한 분이었어요. 시나리오 쓸 때부터 그분 생각만 하면 너무 재미있는 겁니다. 이야기가 점점 무거워지니 낙봉이가 친구로, 동료로, 멘토로 한번씩 분위기를 환기시키면 좋겠다는 생각에 그런 대사, 상황들을 넣게 된 거죠. 원래 시나리오에도 있는 대사들이었는데, 박수영 배우가 워낙 잘 살려주셨고요. 박수영 배우 찍을 때면 저나 촬영 스태프들이 그냥 딱 놓고 연기를 보기만 했던 거 같아요.

<낭만적 공장> 스틸컷. 사진 제공=영화사 오원

복서 역을 맡은 최희셥 배우와 복희 역을 맡은 전혜진 배우는 캐릭터에 딱 맞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어요. 어떻게 캐스팅한 건가요?

물론 두 배우 역시 소개받은 거죠(웃음). 사실 최희섭 배우는 알고는 있었죠.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흔들리는 물결>(감독 김진도, 2016)을 보면서 아, 이 배우는 연기를 좀 다른 톤으로 하는구나 하고 느꼈어요. 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데도 속에는 파도가 나오는 느낌이었다고 할까요? 사실 언론배급시사회 전에 그 영화를 한 번 더 봤어요. 우리 영화랑 비슷하더라고요(웃음). 여자를 기다리거나 오토바이 타는 것도요. 그때 이미지도 좋았고, 복서인데 싸움을 전혀 못할 거 같은 이미지랑도 맞은 거 같아요.

전혜진 배우는요?

사실 복희 역할을 할 배우들 소개를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만나 봐도 딱 이 사람이구나 하는 느낌이 없었어요. 복희 역할이 유부녀잖아요. 가만히 있어도 얼굴에서 삶의 굴곡이 좀 드러나면 좋겠는데, 너무 어리거나 너무 예쁜 배우들만 소개를 해줘서요. 그렇게 고민하다가 전혜진 배우가 생각나서 시나리오를 건넸고, 한 이삼일 후에 바로 만났어요. 사무실에서 첫 미팅을 하는데 아직도 기억나요. 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되게 수수한 모습이었어요. 아, 딱 복희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죠. 전혜진 배우가 30대 초반인데 결혼했고 아이도 있잖아요. 가정주부의 느낌도 충분히 살릴 수 있을 거 같았어요. 배우의 얼굴에서 편안함과 불안함이 다 느껴져서, 의자에 앉자마자 “같이 하시죠”라고 말했습니다.

<낭만적 공장> 스틸컷. 사진 제공=영화사 오원

현장에서 두 배우의 합은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둘 다 아는 사이여서 현장 분위기가 너무 좋았어요. 복희라는 캐릭터 때문에 전혜진 배우가 본인의 성격을 누르고 있어야 했는데요, 가끔 자기 진짜 성격을 보여주더라고요. 정말 활발한. 언젠가 전혜진 배우가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촬영장에 올 때 너무 행복하다”라고요. 전혜진 배우는 <낭만적 공장> 전에 좀 쉬었잖아요. 그런데 멜로영화에 출연하게 되면서 감정을 주고받는 상상을 하며 현장에 오는 게 너무 기분 좋다고 하더라고요. 그건 최희섭 배우도 마찬가지였고요. 다만, 최희섭 배우는 거의 모든 씬에 나오다 보니, 좀 헷갈려서 고생을 했죠. 그래도 전반적으로 스태프와 배우들의 케미가 잘 맞았던 현장이었어요.

총예산이 얼마나 든 건가요?

1억 2천만 원 정도였나 그럴 겁니다. 그러니 피디가 차문 열자마자 슛을 외치라고 저한테 그랬던 거고요(웃음). 인천, 충남, 서울을 왔다 갔다 하면서 찍었으니 더 정신이 없기도 했고요. 힘들었죠, 뭐.

빠듯한 예산에 세 도시를 돌아야 하는데, 촬영이 정말 힘들었을 거 같아요.

그래서 전략상 카메라를 들고 찍기로 했어요. 인물에게 다가가는 컷들은 다 들고 찍기로 해서 이에 관한 연구를 많이 했죠. 기동성이 있어야 빨리 찍을 수 있잖아요. 카메라를 픽스하는 순간부터 앵글 잡고 조명 세팅하면 오래 걸리니까, 사전에 리허설을 하고, 헌팅 장소에서는 배우가 없어도 촬영감독과 계속 논의했습니다.

<낭만적 공장> 스틸컷. 사진 제공=영화사 오원

카메라 말씀을 하셔서 그런데요. 순서대로 찍은 건가요?

아니에요.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었죠.

영화 중반부를 넘어서면서 화면이 점점 더 안정되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처음에 카메라를 들고 찍으니 무겁잖아요. 하면서 본인이 그렇게 적응한 것도 있었겠죠. 화면이 안정적으로 느껴진 것은 경비실 장면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어요. 거의 5분에서 7분 정도 롱테이크로 찍은 게 많거든요. 동선을 정해놓고 카메라의 움직임을 최소화한 거죠. 그런 장면들이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많아지다 보니 아무래도 안정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나 싶어요.

아, 저는 촬영감독이 중간이 바뀌었거나, 아니면 촬영 도중 각성했나 이렇게 생각했거든요(웃음).

촬영감독은 바뀌지 않았습니다(웃음). 스물여덟 살 어린 친구인데, 정말 힘들게 촬영을 한 겁니다.

고속촬영이라고 하죠. 영화에 슬로우 장면이 참 많이 등장해요. 특히 복서가 복희를 바라볼 때나 생각할 때는 어김없이 슬로우가 나옵니다. 한두 번이었어도 효과는 충분했을 거 같다는 생각도 들던데 굳이 여러 번 사용한 이유가 있을까요?

복서가 복희를 식당에서 처음 봤을 때랑 오토바이 둘이 탈 때 슬로우 장면이 나오죠. 좋아하는 감정을 좀 더 살려주고 싶어서 인위적으로 썼어요. 사실 더 많았는데 나중에 보니 너무 간지러워서 덜어냈습니다. 축구선수 시절을 회상하는 장면에서는 변별력을 주고 싶어서 슬로우 장면을 썼죠. 원래 스포츠 씬들은 박진감이 나야 하는데 저예산영화라 사람을 많이 쓸 수 없는 제약이 있잖아요. 그래서 효과적으로 등장인물을 최소화하고 인물에 다가가는데, 정속으로 하면 화면도 흔들리고 부담이 될 거 같아서 그럴 때 사용한 거죠. 슬로우 장면이 그럴 때 정서적으로 도움이 되는 거 같아요. 영화 뒷부분에 병원 씬이나 복희가 담배를 피우는 장면에서 슬로우를 쓴 것도 정서적으로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낭만적 공장> 스틸컷. 사진 제공=영화사 오원

사랑에 빠진 건 유부녀인 줄 몰랐을 때입니다. 물론 그 사실을 확인했어도 마음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지만요. 그래서 질문입니다. 복서와 복희는 해피엔딩을 맞았을까요?

저도 궁금해요(웃음). 어떻게 보면 그렇게 하고 헤어졌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죠. 서로 가진 상처를 보면서 위로와 위안을 받고, 안쓰러움으로 좋아하면서 마침내 거기까지 왔지만 말이에요. 물론 마음속은 해피엔딩이겠죠(웃음)? 그런데 거기서 다시 끝내고 헤어졌다고 해도 둘 사이에 아쉬움 같은 감정은 남아있지 않을 거 같아요. 나중에라도 기분 좋게 추억할 수 있는 관계였지 않을까요?

이제 감독님 이야기를 좀 여쭤볼게요. 영화감독의 꿈은 언제부터 꾸셨나요?

경성대 연극영화과를 나왔어요. 연극영화과를 간 걸 보면 영화를 하고 싶어서 들어간 거겠죠? 학교가 부산에 있으니, 영화 작업을 하려면 서울에 와야 하고, 그런데 집은 또 인천이고. 어려움이 많았어요. 대학 졸업할 즈음에 IMF가 터졌는데, 그때 영화진흥위원회의 지원을 받아서 <우주꽃사슴>이라는 단편을 찍었어요. 판타지 영화였는데 평도 좋았고, 다수 영화제에 초청도 좀 받았죠. 그런데 결국 제작비가 모자라서 빚을 좀 졌어요. 그러면서 아, 영화를 왜 한 거지 하며 후회도 많이 했습니다. 그렇게 공장 경비 일을 하게 되었고요.

그렇게 영화를 접으시려고 했던 건가요?

영화 일에 대한 후회도 있었고요. 어머니께서 소개해준 공장으로 가는 것도 처음에는 안 간다고 버텼는데, 그래도 빚은 갚아야 하니…. 당시 경비 일이 연봉이 꽤 되더라고요. 보너스도 따로 줬고요. 거기서 책을 많이 읽었어요. 소설부터 시작해서 그간 못 읽었던 책들을 다 읽었죠. 3교대라 밤에는 여유가 있었거든요. 거기서 일 년 반 정도 있으니 또 왜 내려왔나 하고 후회가 되더라고요(웃음). 다시 영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상경했습니다.

<낭만적 공장> 스틸컷. 사진 제공=영화사 오원

절치부심의 시간을 보내셨네요.

그렇게 와서 잠깐 단편 작업도 했고요. <색즉시공 2>(감독 윤태윤, 2007) 연출부로 들어갔어요. 그런데 영화가 좀 밀리면서 쉬게 되었죠. 광고하는 선배가 중국에서 일을 한번 해보자고 해서 갔습니다. 원래 3~4개월 일정으로 갔는데 일 년 반을 살았네요.

‘일 년 반의 감독님’이라고 불러야겠어요(웃음).

그렇네요(웃음). 그렇게 귀국해서 안권태 감독님을 무작정 찾아갔어요. 당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영화를 만들고 계셨는데, 동문이라 부탁을 드렸던 거죠. 다행히 조감독 세컨으로 일하게 되었는데, 영화가 중간에 감독이 바뀌었습니다. 한 70~80% 정도 촬영이 된 상태에서 곽경택 감독님으로 교체되면서 저도 잘렸어요(웃음). 아, 이제는 더 늦으면 안 되겠다 싶어서 그때부터 열심히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죠.

<낭만적 공장> 스틸컷. 사진 제공=영화사 오원

데뷔까지 10년이 훨씬 넘게 걸린 거 같아요.

그렇죠. 경비 일 한다고 시골로 내려라면서 그렇게 된 거 같아요(웃음). 만약에 연출부로 영화판에 계속 남아있었으면 조금 달라졌을 거 같긴 하지만요. 빚 갚자고 하면서 뭔가 꼬였나 봐요.

데뷔도 쉽지 않았을 거 같아요.

어우, 우여곡절이 너무 많죠(웃음). 영화사에서 시나리오가 재미있다고 배우들을 붙여줬어요. 오정세, 조은지 배우도 하겠다고 했으니 굉장히 좋은 조건이었죠. 하지만 저예산이어서 역시나 바투 찍었어요. 돌아보니, 그때 경험이 <낭만적 공장> 촬영에 굉장히 큰 도움이 되었네요. <션샤인 러브>는 첫 편집본 러닝타임이 한 시간 반이 나오더라고요. 더 자를 것도 없었고요. 최종 편집본이 84분이었으니 뭐 말 다 한 거죠. 그때 학습이 된 거 같아요. 저예산영화는 일정을 어떻게 진행해야 한다는.

진정으로 ‘긍정왕’이십니다.

물론 정신은 하나도 없었죠. 개봉도 밀리고 별의별 일들이 다 일어나더라고요. 상처도 좀 받았죠. 그래도 그때 인연으로 영화사에서 이번 두 번째 영화까지 하게 되었네요.

긴긴 시간을 시나리오만 쓰신 건 아닐 테고요. 다큐멘터리 작업도 하셨죠?

보통 시나리오를 쓰면 6개월에서 1년은 걸리고요, 이게 영화사에 들어가면 수정하면서 또 1년 정도가 가요. 그러니까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요. 좀비물로 썼던 시나리오는 다행히 좋은 값에 팔아서 도움이 되었고요. 그러다가 인천에서 도시재생과 관련된 일을 친구들이 하고 있었는데, 그걸 보고 아, 이거 찍으면 재미있겠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다큐멘터리 작업을 한 거죠. 놀면 뭐 하나 싶어서요(웃음). 2년 정도 인천을 돌아다니면서 새로운 공간을 많이 발견했는데, <낭만적 공장>에서도 잘 활용했습니다.

<낭만적 공장> 스틸컷. 사진 제공=영화사 오원

언젠가 궁극적으로 꼭 찍어보고 싶은 영화가 있다면요?

예전에는 되게 많았어요. 그런데 요즘은 뭐 꼭 이런 영화를 찍어야겠다는 건 없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좋은 이야기가 있으면 하는 거죠. 그것이 형식적으로 클 수도, 작을 수도 있는 거고요. 내가 잘 할 수 있고, 잘하는 이야기를 발굴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차기작은 뭐로 준비 중이세요?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어요. 방금 말씀드린 인천에 대한 도시 다큐멘터리를 2021년에 찍었거든요. 그때 만났던 건축가들과 계속 만났어요. 이걸 전국적으로 확장할 계획이에요. 전국의 도시재생과 관련된 이야기를 영상으로 남기는 거죠.

쏠쏠한 프로젝트가 될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네. 전국을 도니 많이 도움이 됩니다(웃음). 또 <요나>(가제)라는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데 잘 안 풀려요. 성경에 나오는 고래 이야기에서 아이디어를 떠올렸는데요, 철거업자 남자와 사진작가 여자가 만나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고래 설화다 보니, 여자주인공 이름을 요나로 지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제목은 그렇게 잡았고요. 두 남녀가 우연히 울산 가는 기차를 같이 타면서 이야기가 시작되죠.

<비포 선라이즈>(감독 리처드 링클레이터, 1996) 같은 멜로영화는 아닐 거 같은데요.

멜로입니다(웃음).

<낭만적 공장> 스틸컷. 사진 제공=영화사 오원

마지막으로 <낭만적 관객>을 볼 관객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낭만적 공장> 편집본을 본 한 감독님이 시사회에 오셔서 영화를 보고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영화는 극장에서 봐야 한다”라고요. 인물의 움직임, 감정, 떨림 같은 것들이 작은 모니터에서 봤을 때보다 훨씬 증폭되기 때문이죠. 보통 영화표를 사서 극장에서 볼 영화, IPTV에서 볼 영화로 나누는데요, 독립영화나 작은 영화도 극장에서 봐야한다, 그래야 더욱 감정적인 부분을 느낄 수 있다는 말씀을 해주셔서 참 감사했어요. 저 역시 그 생각에 동의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낭만적 공장>을 꼭 극장에서 봐주세요!


윤상민 씨네플레이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