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연의 도전은 멈추지 않는다. 올해 <일타 스캔들>의 남행선이 전도연이란 배우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배우였는지를 새삼 되새겨준 작품이라면, <길복순>은 전도연의 파워에 대해서 곱씹어보게 해준 작품이다. 전도연은 데뷔 초 TV 드라마에서 얼굴을 막 비추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풋풋하고 통통 튀는 귀여운 면모를 지닌 캐릭터를 자주 연기하던 배우였다. 그리고 한국 멜로 영화 역사를 새로 쓴 <접속>부터 시작해서 2023년 넷플릭스 비영어권 영화 순위 1위에 오른 <길복순>에 이르기까지, 놀라운 도전과 성장을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다.
<길복순>이 공개되고 그는 많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액션 연기에 대한 부담을 언급하곤 했지만, 사실 부담보다는 새로운 연기에 대한 갈망이 더 컸을 것 같다고 여겨진다. 도전과 성장에는 나이 제한이 없다는 걸 일깨워준 전도연 배우의 지난 필모그래피를 통해서 길복순의 뿌리, 전도연의 도전의 시간을 되짚어보자. 많은 사람들이 언급하는 전도연의 대표작 외에 다소 언급되지 못한 작품들 위주로 선정해서 다뤄보려 한다.
킬러의 시작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변성현 감독이 전도연에게 액션 연기를 맡겨보고 싶어지게 만들었던 작품이 바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이다. 이 영화에서 전도연은 샌드타이거상어 문신을 한 무시무시한 캐릭터 연희를 연기했다. 무술 기반의 본격적인 액션이 등장하는 영화는 아니었지만 살상 무기를 손에 들고 온몸에 피칠갑을 하면서 보는 이를 압도하게 만드는 존재감만은 오롯이 전도연만이 가능한 연기의 일부였다. 그리고 사실 그녀는 <협녀, 칼의 기억>에서 50 대 1로 싸우는 액션신을 찍은 적도 있다. 상대방과의 맨몸 격투가 <길복순>에서만큼 빈번하게 등장하는 건 물론 아니었다. 전도연은 이런 일련의 작품 선택에 대해서 드라마만 가능한 배우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대중의 선입견을 깨는 작업을 계속 해나가는 중이라고 이야기한 적 있다. 변화와 도전에 대한 배우 자신의 열망은 <백두산>에서의 놀라운 특별출연 장면 하나 만으로도 강하게 느껴진다. <길복순>의 서늘한 눈동자는 그냥 어디선가 갑자기 튀어나온 게 아니었다.
아무것도 아닌 삶
<인간실격>
<인간실격>의 이부정이란 캐릭터는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 채 어딘가로 표류하는 듯한 일상을 살고 있는 여자다. 숨이 붙어 있다고는 하지만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는 무거운 죄의식을 안고 “결국 아무것도 못될 것 같다”는 절망까지 짊어진 채로 가라앉는 중이다. 이부정이란 인물의 삶이 끝내 실낱 같은 구원의 손길을 붙잡는 순간이 드라마에 담겨 있다. 이는 전도연만이 보여줄 수 있는 섬세하고 밀도 높은 연기로 부정의 삶에 생기를 불어넣어 준 덕분이다. <인간실격>의 캐스팅 소식이 처음 전해졌을 때 사람들은 과연 전도연과 류준열 배우의 물리적인 나이 차이가 어떻게 시너지를 일으킬 수 있을지 궁금했다. 과거에도 그랬다. 전도연이 연기하는 인물들은 상대 배우와의 나이 차이에 대해 크게 의식하지 못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가장 최근엔 <일타 스캔들>의 정경호와도 그랬고, <무뢰한>의 김남길, <남과 여>의 공유와의 사이에서도 전도연은 끝내 ‘사랑’과 ‘긍정’의 기운을 시청자와 관객들에게 선사했다.
멜로의 여왕
<너는 내 운명>
<길복순>의 첫 장면이 흥미로운 건 전도연과 황정민 두 배우가 각각 검과 도끼를 들고 죽일 듯이 달려들어 싸우는 모습과 두 배우가 함께 출연했던 <너는 내 운명>의 장면들이 오버랩됐기 때문이다. 전도연은 어느 인터뷰에서 “<너는 내 운명>에서 죽고 못 사이였던 둘이 이번에는 죽이는 사이로 등장했다”고 언급하기도.
전도연에게는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황정민에게는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이 작품은 개봉 당시에도 성공을 자신할 수 없던 지고지순한 멜로 영화의 스토리를 지니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다방 종업원과 노총각의 인물 설정, 불치병 때문에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두 사람의 관계가 공감을 이끌어내기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전도연은 작품에서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복잡 미묘한 사랑의 감정을 누구보다 잘 표현해냈다. <무뢰한>에서 단란주점을 운영하는 혜경이 삶의 밑바닥 문턱에서 “나 김혜경이야”를 외치던 장면도 떠오른다. <협녀, 칼의 기억>에서 대의와 사사로운 마음 사이에서 무너지는 설랑의 눈빛이나 <남과 여>에서 아픈 아이에게 맹목적으로 집착하는 엄마지만 사랑 앞에서 무너지는 모습, 혹은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숙부인도 전도연이었기 때문에 관객과 시청자를 설득시킬 수 있었다. 이렇듯, 전도연의 작품 중에서 사랑을 매개로 엮을 수 있는 작품과 관계는 꽤 많았고 그녀의 전공 분야라고 할 수도 있다.
전도연은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생일>에서 함께 연기한 적 있는 설경구 배우와 <길복순>에서 재회한다. 극중 차민규 대표와 길복순은 복잡한 감정으로 얽혀 있다. 길복순은 삶의 끔찍하고 비참한 순간에 차민규와 만나지만 두 사람은 애증 이상의 관계다. 시청자와 관객이 모르는 그녀만의 세월이 있었을 것이고 그렇기에 딸 재영(김시아)과 함께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도전의 시작
<해피 엔드>
전도연의 작품 활동은 언제나 도전이었다. 이창동 감독의 <밀양>으로 칸영화제 최고의 영예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던 그녀가 차기작으로 의외의 선택을 한 적 있다. 그녀가 선택한 이윤기 감독의 <멋진 하루>의 희수는 어쩌면 ‘칸의 여왕’ 이후를 기대하던 관객들의 기대를 배반하는 선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전도연은 임상수 감독의 <하녀>에 출연했을 때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안주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 적 있다. 다소 선정적일 수 있는 수위 높은 노출 장면은 물론 작품 안에서는 등장할 만한 이유와 목적이 분명했지만 배우의 입장에서는 더 많은 것을 고려해야 하는 장면이다.
전도연이 결혼과 출산 이후 선택했던 <하녀>만큼 어려웠던 도전의 시작점은 바로 <해피엔드>였다. 정지우 감독의 <해피엔드>는 결혼생활에 권태를 느낀 여자가 과거의 연인을 끊어내지 못하고 갈등하는 불륜을 소재로 한 영화였다. 영화의 시작 장면에서부터 전도연의 파격적인 노출 연기가 등장한다. 당시 전도연은 TV 드라마에 이어 <접속>과 <약속>으로 영화계 입성에 성공한 배우였고 TV에서 사랑받았던 출연작 대부분이 통통 튀는 신세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SBS <사랑의 향기>의 혜진, KBS2 <젊은이의 양지>의 종희, MBC <별은 내 가슴에>의 순애를 연기하던 전도연이 갑자기 파격적인 노출 연기를 선보인다고 하니 당시 영화계도 깜짝 놀랐다. <해피엔드>가 언론에 첫 공개되던 시사회장에서는 모두가 너무 놀라서 숨소리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파격적인 도전이라고 해서 단지 노출 수위가 쟁점은 아니다. 배우가 그 인물의 내면을 얼마나 잘 전달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 배우 전도연의 선택은 언제나 후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선택이었다.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딸과의 소통을 원하는 엄마, 직장 생활을 딸에게 철저하게 숨겨야 하는 복잡한 마음의 엄마, 자신을 킬러의 세계로 이끈 남자의 마음을 애써 너무 잘 알지만 애써 부정하고 밀어내야만 하는 여자로서의 모습이 바로 <길복순>에서 전도연이 멋지게 그려낸 결과다.
김현수 영화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