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시민 케인>을 안 볼 수 있죠?"
"그러는 당신은 <사운드 오브 뮤직> 봤어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브래드 피트, 마고 로비가 나눈 대화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브래드 피트는 <사운드 오브 뮤직>을 본 적이 없고, 마고 로비도 <시민 케인>을 안 봤다며 놀림을 당했다. '고전'이나 '명작'이라는 수식을 단 채 오래도록 칭송되는 영화들은 많지만, "그 영화 봤어?"라는 질문에 이들처럼 우물쭈물해 본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영화를 사랑하는 당신에게 묻는다. 혹시 당신에게도 안 봤다기엔 너무 많은 걸 알고 있고, 봤냐고 물으면 고개를 끄덕일 수 없는 영화들이 있는가? 그런 고전 혹은 명작들을 소개하는 '솔아안 시네마'로 안내한다.
* 영화 <양들의 침묵>의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소설 속에만 존재하다가 1991년작 <양들의 침묵>을 통해 처음 스크린에 등장한 '한니발 렉터'는 사이코패스 연쇄 살인마 캐릭터의 전범(典範)이다. 백작 가문의 장남에, 언어와 예술에 관심이 많고 조예도 깊지만 직업은 해부학을 전공한 정신과 의사다. 자신을 찾아오는 환자의 정신세계를 간단히 꿰뚫어 보기도 한다. 동시에 환자의 목숨 역시 쉽게 빼앗고, 인육을 조리해 먹기까지 한다. 식인을 즐기는 살인마 중에서도 한니발이 독보적으로 두려운 캐릭터인 건, 그가 커다란 감정의 동요 없이도 인육을 취하기 위해 사람을 죽인다는 점이다.
러닝타임이 약 2시간인 <양들의 침묵>에서 한니발의 분량이 적단 걸 눈치채기는 쉽지 않다. 사실 이 이야기는 FBI 수습요원 클라리스(조디 포스터)가 상관 크로포트(스콧 글렌)의 명령으로 여성 대상 연쇄 살인 사건을 추적하며, 한니발(안소니 홉킨스)의 조력을 받는다는 내용이다. 그러니까 한니발이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한 인물인 것은 맞지만, 주인공은 클라리스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양들의 침묵>을 거론할 때 안소니 홉킨스의 한니발 렉터가 선사한 어마어마한 충격을 먼저 떠올린다.
그럼 진짜 주인공 클라리스의 이야기를 해 보자. 그는 FBI 아카데미 졸업을 앞둔 정식 요원 지망생이고, 행동과학부로 발령받기를 원한다. 전적 대학, 성적, 학습 태도까지 모든 것이 완벽한 클라리스. 다만 그는 여성이다. <양들의 침묵>에서 안소니 홉킨스가 사이코패스 식인마의 원형을 만들었다면 조디 포스터는 여성 형사 캐릭터의 모범이었다. 그러나 대중에 뇌리에 더 또렷이 각인된 건 전자였듯, 훈련으로 다져진 체구의 남성 요원들이 가득한 FBI 안에서 덩치 작은 클라리스의 모습은 흡사 육식동물 우리 속 한 마리의 초식동물처럼 보인다. 눈길을 사로잡지만 위협적이지는 않은 존재다.
이 같은 구도는 홀로 숲을 달리며 훈련을 하던 클라리스가 크로포트의 부름을 받고 행동과학부로 향하는 대목에서 처음으로 조성된다.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큰 유니폼 차림의 남자들 사이에서, 클라리스는 단지 '보여진다'. 영화는 유독 익스트림 클로즈업을 많이 활용하는데, 극 중의 모든 남성들은 클라리스와 그 너머의 관객들까지 뚫어져라 응시한다. 그것은 곧 권력이다. 하지만 클라리스는 화면에 온 얼굴을 내맡긴 순간에도 정면을 거의 바라보지 않는다.
크로포트가 클라리스를 일명 '버팔로 빌', 체구 큰 여성들만 골라 살해한 후 살점을 벗겨내는 연쇄 살인마 사건에 투입한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여성이라는 점이었다. 크로포트는 한니발에게 통찰력을 빌려줄 것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하자 여성인 클라리스를 보낸 것이다. 이후 크로포트는 희생자 부검을 앞두고 현지 보안관들이 몰려오자 이들을 돌려보내기 위해 클라리스의 성별을 이용한다. "이런 성범죄 이야기는 여자가 없는 데서 하자"라면서. 그 자리에 클라리스가 존재하는 건 FBI 요원이기 때문이었는데, 크로포트의 발언이 뱉어진 순간 그 정체성은 지워진다. 자신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보안관 무리에 둘러싸인 채 크로포트의 말을 듣는 클라리스의 내면에서는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트라우마가 올라온다. 그러나 클라리스는 요원으로서의 정체성을 힘겹게 붙잡으며 보안관들을 임시 부검실 밖으로 내쫓는다.
영화는 클라리스가 단지 크로포트와 FBI 요원들, 남성 보안관들 사이에서만 응시를 당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한니발의 정신과 주치의 칠튼(안소니 힐드)도 클라리스의 첫 등장에 "크로포트가 미인계를 쓰려 한다"라며 이죽대고, 클라리스가 수사에 도움을 얻으려 찾아간 곤충학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수작을 건다.
클라리스가 일생 동안 갇혀 있었을 이 시선의 감옥을 한니발은 단 몇 분의 대화로 간파한다. 그는 클라리스와 '버팔로 빌' 사건을 두고 대화하던 중 탐욕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다. 사람들은 매일 보는 것에 탐욕을 느끼는데, 그 대상 중 하나는 클라리스의 육체라고. 그러면서 한니발은 경찰관이던 아버지의 죽음, 헛간에서 죽임을 당하면서도 도망치지 않는 양들의 비명 앞에서 무력했던 클라리스의 트라우마를 집착적으로 이끌어 낸다. 그 대화는 줄곧 물리적 약자였던 클라리스가 시선의 불편함을 버티며 누군가의 구원자가 되고자 하는 것이 늘 귓전에 맴도는 양들의 비명을 잠재우기 위해서였음을 강조하는 선문답이었다.
또 이는 학대 탓에 자신이 성전환자라고 믿어버린 '버팔로 빌'이 여성으로서의 변신을 꿈꾸며 여성들의 살점을 뜯어 옷을 만들려 한 것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 클라리스는 '버팔로 빌'을 붙잡아 잠재적 피해 여성들을 구하는 것으로 약자로서의 무력감이라는 트라우마를 이기려 했다. '버팔로 빌'은 자신을 거부한 사회로부터 도피할 목적으로 사회적 정체성 중 하나를 바꾸려 했다. 결과는 전혀 다르지만, 클라리스와 '버팔로 빌' 모두 미래로 걸어나갈 수 없게 만드는 과거를 현재에 치유하려 발버둥 치는 가련한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결국 끔찍한 범죄자에 불과한 '버팔로 빌'. 클라리스의 기지와 집념은 끝내 스스로를 연쇄 살인마 앞에 데려다 놓는다. 집 안으로 도망친 '버팔로 빌'은 전기를 끊어 빛을 차단하고, 적외선 카메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클라리스를 응시한다. 이때 카메라의 시점은 '버팔로 빌'의 것인데, 그는 사실 내내 어둠 속에서 양처럼 떨고 있었을 클라리스의 내면을 음미하듯 들여다 본다. 음침한 대치 속에서 '버팔로 빌'이 총알을 장전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클라리스는 방아쇠를 당겨 빛을 쟁취한다. 그저 보여지는 존재였던 클라리스가 스스로 볼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난 순간이다. 그래서, 누군가를 구원한 클라리스의 머릿속 양들의 비명은 멈췄을까? '양들의 침묵'을 확신할 수는 없지만, 성충이 된 나방처럼 그는 분명 성장했다.
칼럼니스트 라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