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시간의 흐름을 따라 진행된다. 러닝타임이 두 시간이라고 했을 경우, 시작할 시점과 끝날 시점에 시계를 확인하면 딱 두 시간이 흘러가 있다. 누구에게나 그렇다. 시간이 모두에게 공통된 약속 체계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수 백 년의 역사를 다루든 단 하루의 이야기를 다루든 그 체계는 변하지 않는다.
영화의 기본 체계를 비틀고 부수는 영화
물론 시간의 속성상 체감하는 영역은 누구에게나 다를 수 있다. 그래도 객관적인 시간 원칙은 고정돼 있다. 그건 영화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과거와 미래, 현재가 혼재되어 진행되는 영화라도 결국은 직선적 시간 흐름에 종속되어 사람의 감각과 인식 체계를 자극한다. 삶에서도 그러하듯 영화에서도 시간을 물리적으로 거스르거나 엉키게 할 수 없는 것이다.
뭐 이런 하나 마나 한 얘기를 하고 있나 싶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하나 마나 한 얘기이기 때문에 문득 깨닫게 되는 이 평범한 사실이 약간 의심스럽거나 신비로울 때도 있다. 영화는 평면의 반사체에 투영된 빛과 어둠, 소리와 색조의 혼합물이다. 정확히 말해 허상이고 인공이다. 만져지지도 냄새 맡지도 못한다. 오로지 청각과 시각에 복속한다. 최근의 3D, 4D 영상도 이러한 기본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청각과 시각은 인간뿐 아니라 모든 동물에게도 기본 감각이다. 생존의 밑바탕이자 자신과 타인, 혹은 다른 것과 목표물을 판단하는 물리적 전제 조건이다. 영화는 그것을 구체화한 이미지와 소리를 통해 마치 실재인 양 현혹시키는 ‘가짜 이야기’이다. 이 역시 새삼스러울 것 없는 얘기지만, 나로선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를 볼 때마다 항상 되씹게 되는 문제이다. 요컨대, 저 가짜들은 얼마나 가짜인 채로 나로 현혹하거나 혹은 사로잡는가, 하는 것. 영화는 얼마나 많은 가공과 조작과 편집과 재배치로 극적 구성을 꾸미게 되는가. 그리하여 무슨 목적으로 현실의 역상 혹은 비틀린 상을 스스로 까발려 다른 세계를 꿈꾸게 만드는가, 하는 상념들. 내게 데이비드 린치는 영화라는 것의 허위(?)를 고발하는 감독이라 여겨진다.
<로스트 하이웨이>는 1997년에 한국에서도 개봉했다. 한 한적한 마을의 기묘한 스토리를 불가사의한 영상에 담았던 <블루 벨벳>(1992) 이후 5년 만의 극장용 영화였다. (그 사이에 TV 시리즈로 인기를 끌었던 <트윈 픽스>를 극장용으로 제작해 개봉하기도 했다.) 이전 작품들에 홀리다시피 했었기에 냉큼 보러 갔었다. 어둡고 음산하고 기괴하고 몽롱하고 요란하고 관능적이고 어딘가 유치하고 어딘가 심오하다,는 식의 막연한 형용사를 총동원해도 될 만한 작품이었다. 영화를 본 지인들끼리 격론을 벌인 기억도 있다. 누군가는 영화의 스토리 줄기를 완벽하게 파악했다고 자랑하듯 떠벌이기도 했다. 나는 그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지만 토를 달진 않았다. 그저 보고 들리는 것들이 내 안에서 총합되어 또 다른 기괴한 괴물 하나가 내 심상에 각인된 것 이상의 판단을 하고 싶지 않았던 까닭이다.
존재해도 종잡을 수 없는 스토리
영화 자체가 가지고 있는 물성을 제거하고 줄거리만 나열하자면, 그저 뒤죽박죽 엉성하게 풀어내 B급 누아르나 치정극 정도의 내용밖에 안 나온다. 몇 개의 단서들을 가지고 이야기를 꿰맞춰 두 개의 전혀 다른 듯한 스토리가 커다란 얼개 안에서 희미하게 만난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럴 경우 정말 만들다 만 엉터리 영화에 지나지 않게 된다. (박찬욱 감독도 “재탕 삼탕 우려먹으며 폼만 잡는다”는 식으로 대차게 비판한 적 있다) 누아르라 치면 히치콕 발톱의 때에도 못 미치고 치정극이라 치면 트뤼포나 애드리안 라인의 영화를 보라고 권하고 싶을 정도다. 사실 내 생각에 데이비드 린치는 히치콕이나 트뤼포 등에 아무 관심도 없어 보인다. 그가 만들어낸 영화들은 그들이 만들어낸 영상 미학의 정반대 편이거나 아예 다른 지점에서 영화를 해부하는 데 골몰하는 듯하다. 그래도 살짝 내용 소개를 하겠다.
<로스트 하이웨이>를 구성하는 주요 소품은 자동차, 권총, 그리고 카메라이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전화기가 포함될 수도 있다. 색소폰 연주자인 프레드(빌 풀먼)와 아내 르네(패트리샤 아퀘트)가 살고 있는 집에 수상한 전화가 걸려와 정제 불명의 인물이 “딕 로렌트는 죽었다”라는 말로 초반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배경엔 린치 특유의 들릴락 말락한 소음 같은 게 나지막이 깔려 있다. 모든 게 수상하고 모호하고 찜찜하다. 그리고 소포로 날아온 비디오테이프. 데크에 꽂았더니 프레드 집 내부가 찍혀 있고, 느닷없이 피투성이 시체가 등장한다. 프레드와 르네의 관계는 꽤 소원해 보이고 성교 중에도 피차 다른 상념에 몰두하는 듯하다.
경찰이 등장하고 살인범으로 몰린 프레드가 감옥에 갇혀 두통과 불면에 시달린다. 그러다 갑자기 감옥 안의 인물이 바뀐다. 젊은 자동차 정비공 피트(발타자 게티)다. 그는 자신이 왜 감옥에 있는지 모른다. 간수도 경찰도 당황한다. 감옥에서 풀려난 피트는 다시 정비소에서 일하게 되는데, 그의 정비 실력을 높게 산 폭력조직 두목 에디가 웬 금발 미인을 데리고 나타난다. 앨리스(패트리샤 아퀘트 1인 2역)라는 이 여인이 대뜸 피트를 유혹하고, 밀회를 즐기던 둘은 에디의 보복을 피해 도주를 꿈꾼다. 대략 이런 스토리다.
영화를 통해, 현실을 향해 총을 쏘는 영화
폭주하는 자동차와 포르노 필름(에디는 불법 포르노 제조업자다), 느닷없는 총질과 폭력 등이 난사하듯 펼쳐지는데 앞서 말했듯 맥락은 일관되지도 명확하지도 않다. 프레드가 피트고 앨리스가 르네고 딕 로렌트가 에디이고 하는 정체성 문제 역시 보기 나름, 쪼개서 갖다 붙이기 나름이다. 그런데 그 모든 누더기 같은 것들이 총체적인 힘을 발휘한다. 흔히 데이비드 린치의 작품을 얘기하면서 인용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떠올리는 건 클리셰에 가깝다.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를 듯하면서도 뭔가 보이지 않는 유리 막대기나 유리 헝겊 같은 것으로 전체의 상을 혼합하고 뒤집는, 일그러진 데칼코마니의 느낌. 그런데 그 한가운데가 뻥 뚫려 있다. 누군가 쏜 총탄에 구멍이 나고 균열된 유리창에 비친 또 다른 누군가의 얼굴 같달까.
데이비드 린치가 영화라는 것 자체에 대해 총을 쏘는 자라는 느낌을 받은 건 차기작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를 통해서였다. 훨씬 더 복잡하게 꼬이고, 동성애와 할리우드 스타 시스템에 대한 현실적인 비판마저 가미된 작품인데, 단순 풍자를 넘어 사람 사이의 관계와 거기 얽힌 욕망과 질투와 음모 등을 비현실 혹은 무의식의 표피를 떠내어 현실적인 영상에 얹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비틀린 영상 체계는 여러 겹으로 현실의 표면을 굴절시킨다. 시간의 직선적 궤도가 뒤틀리며 공간 위상마저 변화한 상황에서 더 깊숙한 내면의 꿈같은 풍경을 표면에 끌어올린 게 <인랜드 엠파이어>(2006)였다. 그 작품을 보면서 3시간이 30분이 될 수도, 3일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실감했었다.
카메라란 무엇인가,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 나 아닌, 혹은 때로는 나 자신마저 끌어당겨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그것들을 조합해 현실에 존재할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문명의 도구. 내가 나의 움직임을 영상을 통해 확인하고, 누군가가 그것을 보고, 또 누군가 그것으로 자신을 실현하거나 해체하는 데 쓰이는, 때론 소중하고 때론 폭력적인 시각적 포용과 살상의 매개체. 영화란 그것을 통해 시간의 한 틈에 구멍을 내거나, 있던 걸 사라지게 하거나, 없던 걸 가공해 내는 작업이 아니던가. 그것을 구경하는 사람들은 과연 같은 자리에서 같은 시간에 같은 이미지와 소리를 체험하면서도 똑같은 것을 봤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근본적인 의구심.
허구를 현실로 끌어오는 일, 믿을 만한가
영화를 보면서 어떤 총구 앞에 놓인 듯한 심정을 느끼는 건 스릴감과 공포, 또는 불안, 때로는 현실에서 느끼기 힘든 희열을 다 포함한 상태일 것이다. 그것을 얻기 위해 사람들은 영화를 본다. 또는 그것들을 잊거나 통제하기 위해 영화를 발판 삼기도 한다. 허상의 표면에 떠오른 어떤 이들의 말과 행동을 보면서 몸과 마음을 자극받는 행위. 그런데 그것은 또 얼마나 많은 허구를 현실에 끌어오는 일이 될까.
둘이 공모해 사람을 죽여놓고 같이 도망가기로 한 앨리스가 피를 흘리며 공황에 빠진 피트에게 총을 겨누며 묻는다.
“날 못 믿겠어?”
믿어도 결국 파국이고, 안 믿어도 결국 저것은 가짜일 것. 그것이 영화라는 이름의 위대하고도 허망한 빛의 작란 아니겠는가.
강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