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디네는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다. 베니스에서 차로 1시간 거리에 있고, 지리적으로는 이태리 최북단으로 슬로베니아와 인접해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인구 10만이 채 되지 않는 이 작은 도시에서 아시아 영화를 중심으로 하는 ‘우디네 극동 영화제’(Udine Far East Film Festival)가 열린다. 우디네 극동 영화제(이하 ‘우디네’)는 올해로 벌써 25주년을 맞았다. 유럽에 있는 메이저 영화제들보다 작은 규모인 것은 명백하지만 우디네가 우리에게 더 특별한 것은 영화제가 자랑하는 한국영화에 대한 각별한 애정 때문이다. 우디네는 매년 8편에서 10편 정도의 컨템포러리 한국영화를 상영하고 그것과는 별개로 한국 감독 회고전을 갖는다. 올해는 코리안 뉴웨이브의 기수, 장선우 감독의 회고전을 진행하며 총 3편의 영화, <경마장 가는 길>(1991), <너에게 나를 보낸다>(1994), <거짓말>(2000)을 상영한다.
장선우 감독은 한국영화사에서 여러 가지 전환점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첫째로 그는 군부독재 시대가 끝나고 표현의 자유를 획득한 한국영화에서 광주 민주화 운동(<꽃잎>)과 독재 정권의 탄압(<너에게 나를 보낸다>) 등 (이전 시대에서 금지되었던) 이슈를 거의 처음으로 재현했던 감독이다. 코리안 뉴웨이브를 상징하는 또 다른 감독, 박광수가 한국사회의 계급 문제와 시스템(<칠수와 만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에 주력했다면 장선우는 역사적 사건 혹은 트라우마를 캐릭터를 통해 형상화하는 경향으로 주목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는 당시에는 드물었던 ‘서울대’ 출신의 영화감독으로 이전의 도제 시스템으로 탄생된 감독들과는 완전히 차별적인 정체성을 가진 인물이었다. 따라서 그의 작품들 역시 지식인 캐릭터의 ‘한심한’ 딜레마를 풍자하거나 (<경마장 가는 길> <너에게 나를 보낸다>), 그들의 사회적 불능 상태를 자기 비판적인 시선으로 그린다. 그의 작품들 중 이번 회고전에서도 공개되는 <경마장 가는 길>은 그의 자아 비판이 더욱 더 신랄하게 발현되는 작품이다.
영화의 두 주인공은 프랑스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엘리트들(캐릭터들은 이름이 아닌 이니셜로 지칭된다)이다. R(문성근)은 귀국하자마자 집이 아닌, 함께 유학생활을 했던 J(강수연)를 찾아간다. R보다 먼저 귀국한 J는 발표한 논문이 인정받으며 학계에서도 주목을 받는 인물로 성장한 상태다. 공항에 도착한 R을 반갑게 맞는 J의 모습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예상과는 반대로 지식인의 대화가 아닌, ‘수컷과 암컷’의 대화로 빼곡히 채워진다. R은 끊임 없이 J에게 잠자리를 요구하고, J는 끊임없이 거절하거나 피해가는 지리멸렬하고도 천박한 실랑이가 러닝타임 138분 동안 계속된다. 하일지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경마장 가는 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적인 자아 비판이다. 장선우는 ‘유학생 출신의 박사’라는 대한민국 최고의 식자층을 통해 이들의 모순과 위선을 드러낸다. 듣고 있자면 낯뜨겁고 한심하기 짝이 없지만 그럼에도 왠지 통쾌한 기분이 드는 것은 이 영화가 그들을 바라보는 가차없는 시선 때문이다.
장선우의 필모그래피 중 아마도 가장 ‘고상한’ 영화인 듯한 <화엄경>(1993) 이후로 그는 뭔가 가볍고, 재미있는 작품을 해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장정일의 소설을 영화화한 <너에게 나를 보낸다>는 그런 의미에서 장선우의 ‘쉬어 가는 프로젝트’ 인 듯 보이지만 그럼에도 영화는 <경마장 가는 길> 만큼이나 쉽지 않은 알레고리와 다시금 반복되는 지식층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풍자가 팽배하다.
어느 날 표절 작가로 낙인 찍힌 대필 작가, ‘나’(문성근)는 같은 꿈을 꾸었다는 이유로 갑자기 집으로 찾아온 ‘선경’(정선경)과 마주하게 된다. 둘은 만난 첫날부터 동거를 하게 되고, ‘나’는 이후로 선경에게 점점 더 빠져들게 된다. 은행에 다니는 ‘나’의 친구(여균동)는 첫사랑에 실패한 이후로 성불능이 된 남자다. ‘나’와 친구는 틈만 나면 단골 바에서 만나 음담패설을 나눈다.
선경은 내가 대필이 아닌 나만의 글을 써야 한다고 밤낮으로 부르짖지만 ‘나’는 더 이상 글을 쓸 수가 없다. 결국 ‘나’는 배우가 된 선경의 운전수로 살아가게 된다. 나의 친구는 ‘나’와 선경, 그리고 그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을 출판해 작가로 등단한다.
영화 속 캐릭터, ‘세상에서 엉덩이가 가장 예쁜 여자’로 유명세를 얻은 정선경 배우의 스타덤과 함께 영화는 서울에서만 38여만 명의 관객을 모으며 기록적인 흥행을 달성했다. 코미디적인 요소가 강해졌지만 그럼에도 영화는 <경마장 가는 길>보다 더 다양하고 더 치졸한 상황들로 지식인들의 역설을 재현한다.
또 다른 상영작, 이번 영화제에서 마스터 클래스와 함께 진행되는 <거짓말>은 대한민국을 흔들어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문제작’이자 화제작이었다. “미성년자와의 변태적인 성관계와 가학 행위를 여과없이 묘사해 사회 통념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등급보류 판정을 받았던 이 영화는 그해 베니스 영화제에서 초청을 받으며 간신히 대중에게 공개될 수 있었다. 장정일의 또 다른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를 영화화한 <거짓말>은 38세의 회사원 J와 18세 고등학생 Y의 가학적인 성관계를 그린다. 물론, 이 뿐이라면 <거짓말>의 존재이유는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선 두개의 작품에서처럼, 장선우 감독의 영화에서의 ‘섹스’는 전면에 드러나지만 서브텍스트(subtext)일 뿐이다. 그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늘 섹스가 아닌 섹스 중에 일어나는 대사나 도중에 응시하는 다른 어떤 물체다. 다시 말해, 그에게 섹스는 영화의 주제가 아닌, 재현의 도식에 더 가깝다. 예컨대 <너에게 나를 보낸다>에서처럼 <거짓말>에서도 남자와 여자의 권력관계가 바뀌는 순간은 남자가 여자에게 성적으로 종속되면서부터다. 따라서 장선우에게 ‘성’의 묘사는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표현하기 위해 필요한 전달책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해석은 복잡, 파격적인 장선우 감독의 일련의 ‘문제작’들을 읽을 수 있는 수천만 가지 접근들 중 지극히 미미한 하나의 접근일 뿐이다.
그가 지식인들의 모순을 꼬집었던 것 만큼 그의 문제작들을 향한 대중의 반응 역시 늘 모순적이었다. 장선우가 천착하는 직설적인 주제와 소재로 언론과 대중은 (위에 나열한) 그의 영화를 때로는 ‘부도덕'하고 '도색적’이라고 비판했지만 이 영화들은 모두 흥행에서 성공했다. 그런 의미에서 장선우는 대중의 모순을 자신의 영화로 먼저 전시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개봉 23주년을 맞는 <거짓말>을 이태리의 관객들은 어떻게 바라 볼지 더욱 더 기대가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김효정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