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반 고흐 타살설’이란 게 존재한다. 언제부터 운위되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아마 여러 과학적, 의학적 검증 기술이 발달한 이후였지 않을까 싶다. 이 가설은 빈센트 반 고흐가 스스로 자신의 배에 총을 쏘지 않았을 거라는 데에서 출발한다.
왜 배에다 총을 쐈을까?
처음엔 일종의 음모론 취급을 받았다. ‘20세기 미술을 혁명적 바꾼 위대한 예술가의 자살’이라는 신화에 흠집을 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미술을 통해 권력과 부를 움켜쥔 자들에겐 일종의 신성모독처럼 여겨졌을 수도 있다. 예술가의 자살은 예나 지금이나 대중에게 아주 잘 먹히는 ‘떡밥’이다. 생활고 및 세상의 몰이해에 시달리다 혼자만의 우주를 창조하곤 스스로 세상을 뜬 자의 이야기는 그럴듯하게 팔아먹을 수 있는 스토리이기 때문이다. 그건 남겨진 예술 작품에 덧씌워지는 후광과도 같다. 그렇게 포장된 예술은 때로 한 국가를 먹여 살릴 정도의 문화적 자산이 된다. 네덜란드 국가 총 수익 2위가 반 고흐를 기반으로 한 문화 사업인 것으로 알고 있다.
반 고흐가 정말 자살했는지 아닌지 진실 규명은 이제 와 부질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당시 정황을 살펴보면 의문점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타살설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던 시절, 고흐가 마지막 80일을 보낸 프랑스 북부 오베르쉬와즈를 방문한 적 있다. 10여 년 전이다. 이후 두 차례 더 방문했었다. 고흐가 살던(그리고 마지막으로 눈 감았던) 작은방에서 나와 장미가 흐드러진 언덕을 한동안 오르다 보면 고흐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진(실제론 '나무뿌리들'이 마지막 작품) ‘까마귀가 나는 밀밭’의 배경이 된 벌판이 나온다. 지금은 강낭콩을 심고 있었으나 그림에 나오는 각도와 완만하게 펼쳐진 구릉 등은 여전했다. 숙소에서 적어도 30여 분은 걸리는 거리다. 고흐는 거기서 총을 쏘고(혹은 맞고) 집까지 걸어 내려와 30시간을 앓다가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첫 번째 의문 지점이다.
자살하고자 마음먹은 사람이 총을 배에다 쏜다는 사실이 미심쩍다. 아무리 총기 다루는 솜씨가 미숙하더라도, (아니 그럴수록) 배에다 총구를 들이밀 가능성은 희박하다. 관자놀이에 총구를 대거나 아예 입에 물고 방아쇠를 당기면 한방에 끝날 일이다. 물론 주저하거나 공황에 빠져 얼렁뚱땅 처리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그래도 석연치 않은 건 사실이다.
카메라, 고흐의 진심 좇아가다
또 하나. 총상을 입고 나서 어떻게, 또는 왜 그 먼 거리를 헐떡거리며 걸어 내려왔느냐 하는 점. 자살하고자 작정한 사람의 마음을 정확히 헤아리긴 힘들지만, 출혈이 심한 상처를 입고 그만큼 걸어왔다는 건 분명 살고자 하는 의지의 발현이었을 것이다. 총상을 입고선 문득 생각이 바뀌어 잠재되어 있던 생존욕구가 절실해졌을 거라는 가정도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러기엔 실제로 걸어본 그 언덕길은 총상을 입은 자로선 그리 호락호락한 거리가 아니었다. 그 길을 따라 걸으며 계속 의문스러웠던 지점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고흐를 쏜 총은 발견되지 않았다. 나머지는 각자 판단에 맡기겠다.
줄리안 슈나벨의 <고흐, 영원의 문에서>(2018)는 바로 그러한 사실에 근거해 만들어졌다. 줄리안 슈나벨은 실제로 신표현주의 계열의 그림을 주로 그리는 화가이기도 하다. 그는 미국 그래피티 아티스트로 27세 짧은 생을 마감한 '검은 피카소' 장 미셸 바스키아의 일생을 영화 <바스키아>(1996)로 만든 바 있다. 1980년대 미국 미술계에 대한 독특하고 과감한 풍자가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같은 미술가로서 미술가의 전기 영화를 만든다는 건 감독 스스로도 각별한 일이었을 것이다. 고흐 전기 영화는 이전에도 여러 편 제작되었고, 지금도 다양한 방식으로 다뤄지고 있지만, 슈나벨의 <고흐, 영원의 문에서>는 그중 고흐의 ‘진심’을 가장 명료하고 잔잔하게 훑은 영화라 여겨진다.
이 영화는 고흐가 파리를 떠나 프랑스 남부 아를에 정착하는 시기부터 죽을 때까지를 다룬다. 고갱을 아를로 불러들이고, 숱한 다툼 끝에 고갱이 아를을 떠나자 자신의 귀를 자르고, 정신병원에 갇히고, 마지막 안식처인 오베르쉬와즈에 정착한 다음, 70여 편의 그림을 미친 듯이 그리다가 결국 동생 테오의 품에서 죽는다는 내용.
영화는 긴 설명을 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시종일관 흔들리고 어떤 대사들은 마치 겹으로 메아리를 넣듯 돌림노래로 반복되기도 한다. 색을 여러 번 중첩시키는 고흐의 붓질을 재현한 건지도 모른다. 잘 모르는 타인과 대화할 때는 불어로 말하지만, 친한 지인들과는 영어로 대화하는 것 역시 안팎이 불안하게 나뉜 고흐의 심정을 반영한 거라 얘기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자주 초점이 흐려지는 영상. 불안정한 심리와 꿈과 현실, 자연과 실체 사이의 모호한 경계를 넘나들던 고흐의 의식이 그렇게 드러난다. 마치 영원으로 나아가는 입구인 양 존재는 흐려졌다 맑아졌다 반복한다. 이곳은 꿈 속인가, 아니면 자연의 환각인가.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고,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영화 곳곳에 고흐의 붓 터치를 생생하게 살려내는 장면이 많다. 그림 그리는 장면뿐 아니라, 영상의 모든 톤이 고흐의 화풍이 지닌 강렬하고도 고요한, 꿈틀거리면서도 정체된 묘한 이중성을 닮아있다. 거기에 잔잔하게 시공을 점묘하는 듯한 피아노 연주가 꿈결처럼 나부낀다. 어떤 극적인 움직임도 없으면서 배면의 격정이 막 타오르기 직전의 불꽃처럼 아스라이 묻어난다. 윌렘 데포의 주름진 얼굴은 고흐와 너무 닮았다 싶다가도 그저 어느 노쇠하고 찌든 범부의 속살처럼 적나라하고 애달파 보인다. 고흐는 대단한 사람도 훌륭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저 그림에 미친 사람이었고, 세상에 지친 사람이었고, 자연에 홀린 사람이었을 뿐이다. 아울러 그는 남다르게 사물을 봤고, 자신에 대한 지난한 탐구에 사로잡혔을 뿐 아니라, 자연의 무감하고도 냉정한 계시에 영혼의 불빛을 정면으로 투사하고자 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를 당대 사람들은 불쌍하게 여기거나 미치광이 취급하거나 어딘가 모자라거나 유달리 예민하고 뒤틀린 사람이라 여겼다. 모두가 맞을 수도, 모두가 틀린 판단일 수 있다. 영화는 그 어떤 평가도 추앙도 비판도 하지 않는다. 그저 보여주고 들려주고 어떤 흔적들을 제시할 뿐이다. 영화 후반에 고흐는 불현듯 복통을 호소하며 휘청거린다. 언덕에서 총을 맞은 이후다. 동네엔 총을 갖고 장난질하는 부잣집 불량배가 있다. 불량배가 자신의 친구와 함께 그림 그리는 고흐를 훼방한다. 카우보이처럼 권총을 들고선 횡포를 부리고 고흐가 쓰러진다. 불량배들이 고흐의 그림과 화구들을 땅에 묻고 권총을 강에 내던지는 장면이 나온다. 모든 게 단속적으로 대사 없이 처리된다. 그러곤 고흐의 침상.
의사 가셰 박사가 사정을 묻는다. 그러나 고흐는 대답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고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다. 불량배들을 감싸거나 자신의 행동을 감추려는 의도일까. 그 역시 알 수 없다. 그는 조용히 죽어간다. 그리고 문득 아무것도 없는 노란색 평면이 화면을 채운다. 사실의 실체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 자살했건 누군가 쏜 총에 맞았건, 그게 핵심은 아니라는 듯 노란색은 현기증 날 정도로 몽롱하고, 가차 없이 중립적이기도 하다. 자살이냐 타살이냐 하는 사실 관계는 한 사람의 개인사에서 중요한 시사점을 가질 수밖에 없다. 영화는 단지 사실에 근거해 극화한 단서들만 던질 뿐, 그 어떤 확증도 내비치지 않고 끝난다. 노란색 에필로그 화면 위로 고갱의 내레이션이 흐른다. 그중 한 마디.
“나는 성령이고, 나는 제정신이다.”
빛에 타버린 메마른 해바라기
노란색은 고흐가 열정적으로 탐닉했던 색깔이다. 노란색에서 주황색, 보라색이 나오고 다시 노란색으로 돌아간다. 그는 자신이 그렸던 그림처럼 해바라기 같은 사람이었다. 스스로 “빛을 그린다”고 말할 정도로 빛을 좇아 자연의 궁극적 실체를 자신의 붓끝으로 뚫고 들어가고자 했다. 영화 초반에 고흐가 숲과 벌판을 헤매는 장면이 있다. 벌판에 드러누워 자신의 얼굴에 흙을 끼얹기도 하며 방황하는 장면. 문득 빛을 완전히 빼앗겼거나, 너무 강렬한 빛에 참살당한 듯 광활하기만 한 해바라기 밭이 나온다. 모두 풀 죽어 있다. 노란색은 일절 없고 하나같이 거무튀튀한 갈색으로 메말라 있다. 그 사이를 고흐가 걷는다. 먼 곳의 지평선은 끝도 없다. 그곳이 영원인가. 고흐는 총에 맞기 전에 이미 그 영원 속으로 걸어 들어가 자연과 일체 되어 버렸던 건 아닐까. 해바라기가 문득, 깡마르고 길쭉한 고흐의 몸뚱이 같다. 진짜 '성령'은 흔히 제정신도 제 형태도 아닌 것처럼 여겨지기 마련이니까.
강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