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지인과 세태에 관해 대화하다 이런 말이 나왔다.
“요즘엔 골짜기가 없다.”
곱씹어볼 만한 말이었다. 세상의 모든 정보는 물론, 개인 신상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생각이나 욕망마저 알고리즘화되어 툭 하면 만방에 공개되는 세상. 굳이 몰라도 될 것들을 알게 되고, 굳이 알리지 않아도 될 개인사를 남들이 알게 되는 세상. 골짜기란 자신만의 서늘한 그늘을 뜻하는 말일 거다. 그곳에선 세상의 소란이나 온갖 뉴스들을 걸러낸 채 온전히 자기 자신만의 생활 방식대로 살 수 있을지 모른다. 소위 ‘자연인’에 관한 TV프로그램이 여러 채널에서 비슷한 형태로 방영되는 것도 그런 맥락일 테다. 하지만, 질러 말하자면, ‘자연인’에게도 온전한 자연은 이제 없다.
골짜기가 사라진 시대
자연이라는 것마저 모종의 규칙과 법률 등 인위에 의해 통제되는 세상이다. 심산유곡에 갇혀 유아독존하는 삶이 불가능해진 지는 이미 오래다. 지인이 말한 ‘골짜기’는 일종의 은유로 받아들여진다. 한 개인이 온전한 자신의 생각과 신념 혹은 가치관에 따라 다른 누구와도 똑같지만은 않은 삶을 영위하는 시공. 타인에 대한 침해나 불편을 유발하지 않는다면 그보다 단정하고 말끔한 세계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다시 질러 말하자면, 이제 그런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인’이라. 그들의 의지와 노력에 기꺼이 공감하면서도 문득 안쓰럽게 여겨지는 것도 그 탓일 거다. 도망치고 달아나고 숨고 가려도 그들의 삶은 이미 전파를 통해 만방에 알려진다. 그러면서 일종의 트렌드나 자본주의 사회의 콘텐츠로 잡아 먹힌다. 세상 어느 골짜기나 외딴 섬에도 랜선이 파고드는 세계이다. 60여 년 전에 만들어진 영화 <로니 브레이브>를 보며 지금이 외려 또렷해 보이는 사정도 그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로니 브레이브>. 1962년에 만들어진 흑백영화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스파르타쿠스>에서 주연을 맡았던 커크 더글라스와 각본을 쓴 달톤 트럼보가 참여하고 데이비드 밀러가 감독한 작품이다. 제나 로우랜즈와 월터 매튜 등 당대의 명배우들이 출연하는데, 딱히 명작이라거나 히트작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하다. 밋밋한 스토리와 다소 엉성한 설정이 큰 단점이라 할 수 있으나, 전체적인 흐름은 의외로 탄탄하다. 이상한, 모순된 평가인가? 존 번즈 역의 커크 더글라스와 그가 타고 다니는(때론, 끌고 다니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애마 위스키에게만 집중해도 107분이 전혀 지겹지 않기에 하는 소리다. 고전 영화 특유의, 툭툭 내뱉는 듯하지만, 두께가 만만치 않은 풍자와 유머가 숨어 있는 대사도 쫄깃(?)하다. 내겐 좋은 영화였다.
카우보이여, 비행기에 놀라지 말라
흔히 ‘잭’이라 불리는 주인공 번즈는 시대착오적인 괴짜다. 카우보이 차림을 하고 말을 타고 다니면서 그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삶을 산다. 한국전 참전 이력이 있고 밥 먹듯 사고 치는 군인 출신이라는 사실만 경찰의 신원조회 장면에서 드러날 뿐이다. 흰 갈기가 멋들어진 야생마 위스키를 길들이는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나무와 풀과 흙 천지인 평원에 말을 세워 놓고 한가롭게 누워있는 첫 장면만 보면 그냥 평범한 서부영화로 여겨진다. 그런데 문득, 하늘에 비행기가 지나간다. 상영 영화의 정보조차 쉽게 알 수 없던 개봉 당시로선 황당한 장면이었을 것이다. 비행기가 하늘 저편으로 날아가자 잭이 위스키에게 말한다. “우리도 뜨자.”
위스키는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상태다. 안장을 얹으려고 하면 도리질을 치고 자꾸 앞발을 들어 신경질을 부린다. 잭이 능글맞게 위스키를 달랜다. 결국 안장을 얹는 데 성공하고 카우보이 모자를 쓴 채 길을 떠난다. 흥미로운 건 어딘가 도착하거나 휴식을 취할 땐 위스키의 앞발에 족쇄를 채운다는 점이다. 그 족쇄가 결국 세상이 잭에게 채운 족쇄임을 깨닫게 되는 건 어렵지 않다. 잭은 100년 전의 생활 방식을 고수하고자 하나, 결국 그도 당대의 기계문명, 통제와 규율이 점조직으로 일상화한 세계에 묶여 있는 것이다.
잭은 친구 폴의 아내 제리(제나 로우랜즈)를 찾아간다. 폴은 멕시코인들의 밀입국을 방치했다는 죄목으로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다. 잭은 폴을 탈출시키려 일부러 폭력 사건을 일으켜 감옥엘 간다. 폴과 재회한 잭은 탈옥을 제안하나 폴은 거절한다. 아내와 아이의 미래를 걱정해서다. 잭은 폴에게 말한다. “너 많이 변했구나.” 폴의 전사(前史)는 잘 알 수 없다. 하지만 잭과 비슷하게 반문명적인 신념을 가지고 있었을 법하다. 그랬던 폴이 가정의 행복과 더 안온한 미래를 위해 일탈을 자제한다. 잭은 홀로 탈옥하고 집요한 보안관 모리(월터 매튜)가 잭을 추적한다. 그렇게 시작된 도주극이 이 영화의 핵심 줄거리다.
문명과 야생의 황당한 대치
잭은 위스키와 함께 험준한 산악을 배회한다. 말도 연기(?)하느라 엄청 고생했겠다 싶을 정도로 생동감 넘치는 장면들이 압권이다. 보안관 모리와 경찰들은 산악에서 지프가 고장나고 통신이 마비되는 등 애를 먹는다. 야생과 문명의 마찰 혹은 충돌이 건조하고 유머러스하게 표현되는데, 인물들의 실소가 의외로 묵직하게 치고 들어온다. 꼭 당시의, 그리고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일로만 여겨지지 않는 탓이다. 스마트폰이나 컴퓨터가 고장 나면 속수무책이 돼버리는 지금 사람들과 그들이 뭐가 다른가 싶은 거다.
협곡와 숲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잭과 위스키를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경찰들이 사방에서 출동하고 심지어 공군에 요청해 헬리콥터까지 띄우지만, 요령부득이다. 말 탄 카우보이와 헬리콥터가 같은 프레임에 잡히는 장면은 여러모로 흥미롭다. 하늘에 뜬 기계문명의 상징과 장총 한 자루 말고는 야생 그대로인 존재들이 대치하는 모습. 승부(?)는 의외로 싱겁게 끝나지만, 그 또한 의미심장하다. 엄청난 거액을 들여 제작된 헬리콥터가 거의 비무장 상태인 사람 한 명과 말 한 마리에 의해 공황을 겪는 상황. 세상은 때로 개미 한 마리에 의해서도 무너진다, 고 썼던 누군가의 시도 떠올랐다. 무전으로 상황 보고를 접한 공군 장교는 “그게 얼마짜리인데!!”란 고함만 반복한다. 승무원의 안전 여부는 아예 뒷전이다. 그 장면의 함의는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너무 낯익어서 씁쓸한 웃음이 터졌다고만 말하겠다.
영화는 결국 비극(잭 입장에서)으로 끝난다. 결코 해피엔딩이 될 수 없는 영화였다는 건 지나친 속단일까. 거대한 세계의 통제권 안에서 혼자 버티고 저항하며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고수하는 사람은 언제나 패배자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실상도, 허구도 대개 그러하다. 그들은 자신이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고 있다는 걸 스스로도 안다. 알기 때문에 더 싸우려 하고 일탈하려 하고, 그럼으로써 자신만의 고유한 철학과 신념을 실천하려 든다. 마지막 장면에서 빗길에 대형 트럭(이 트럭의 정체를 알고 보면 더 어이없고 웃기고 아이러니하다)에 치어 눈을 감는 잭의 표정에서 오묘한 슬픔과 비애뿐 아니라, 모종의 환희마저 느껴지는 건 그 때문일 것이다. 그는 결국 실패했지만, 그를 죽이고 포획한, 그리고 쓰러진 채 신음하는 위스키마저 총 한 방으로 죽여버리는 경찰 역시 승자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연은 사과하지 않는다”라고 H.D. 소로는 말한 적 있다. 인간은 아무리 용을 써 문명을 발달시켜도 끝끝내 자연에게 이길 수 없다. 그저 자연의 한 조각으로써 스스로 자연이 되기 전까지 인간은 여전히 인간 자신에게도 과오와 오만의 굴레일 뿐이다.
먼 나라, 먼 옛날의 얘기가 아니다
1962년이면 미국에서 뉴에이지나 러다이트 등 반문명 운동이 막 활개치기 시작하던 무렵이다. 향후 히피 무브먼트로 이어지게 된다. 영화는 당시의 시대적 흐름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아주 먼 나라의 오래된 얘기가 아니다. 외려 오래되었기에 더 적나라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여전히 극복되기는커녕 지금도 더 악화되고 있는 인간의 존재 양태에 대한 또다른 비전이 순진하게나마 제시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말을 타자. 아니 스스로 말이 되어 달리자, 라고 혼자 되뇌어본다. 헬기여, 나타나라. 그리고 나를 쏴라. 아무리 죽여도 죽지 않는 자연을 내 속에서 꺼내 놓을 테니. 바람아 불어라. 헬기여 날아라. 그래도 말은 달리고 또 달릴 뿐, 좌고우면 하지 않는다.
PS. 이 영화의 원제는 <Lonely Are The Brave>, ‘용감한 자는 외롭다’ 정도로 풀이될 제목이다. <로니 브레이브>라는 제목은 대관절 누구 머리에서 나온 건지, 한국 영화 수입 업계의 기발한(?) 제목 변형은 예나 지금이나 참으로 괴랄하다.
강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