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기기는 나날이 발전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이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마음을 실어 나르는 수단이 변화했을 뿐. 멈칫거리는 커서에서는 망설이는 사람의 마음을 엿볼 수 있고, 입력창에 썼다, 지웠다 하는 텍스트는 미처 닿지 못할 속마음을 대변한다. 그런 속마음을 녹인 연출이 대중화되고 있는데, '스크린 라이프' 기법이다.
디지털로 푸는 서사, '스크린 라이프'
‘스크린 라이프’ 기법은 영화 <서치>의 흥행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스크린 라이프는 디지털 기기의 스크린 화면으로 러닝타임을 꽉 채운 영화를 일컫는다. 스크린 라이프 영화는 주로 1인칭 시점으로 재현되며, 관객들은 자신이 마치 핸드폰이나 노트북, 심지어는 CCTV 화면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스크린 라이프는 파운드 푸티지와도 유사하다고도 볼 수 있다. 파운드 푸티지는 페이크 다큐멘터리의 하위 장르로, 마치 1인칭 캠코더로 촬영한 것 같은 영상물을 일컫는다. 마치 현장에서 촬영되어, 다듬어지지 않은 듯한 날것의 촬영분과 같은 컨셉이 특징이다.
파운드 푸티지처럼, 스크린 라이프 역시 호러 장르의 영화에 빈번하게 차용되고 있지만, 점차 로맨틱 코미디 등 새로운 장르로 확장되는 모양새다. 그래서 스크린 라이프 형식을 차용한 작품들을 소개한다.
스크린 라이프의 시작, <언프렌디드: 친구삭제>(Unfriended, 2015)
<나이트 워치>, <원티드> 등을 연출한 티무르 베크맘베토브. 그는 동료 프로듀서와 스카이프를 하다가 동료가 실수로 스카이프의 화면 공유 기능을 끄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동료가 페북 메시지를 보내고, 아마존에서 물건을 주문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면서, “컴퓨터로 연결된 우리의 삶이 담긴 영화를 누군가는 만들어야 한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티무르 베크맘베토브는 디지털 기기의 스크린만으로 구성된 영화를 ‘스크린 라이프’라고 부르며, 이 형식의 영화를 꾸준히 제작하고자 했다. <언프렌디드: 친구삭제>는 티무르 베크맘베토브가 제작자로 참여한 첫 스크린 라이프 영화다.
<언프렌디드: 친구삭제>는 노트북의 스카이프 영상 통화 화면만으로 구성된 호러 영화다. 영화는 자살한 친구의 아이디가 스카이프 채팅방에 등장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2014년 작품인 이 영화에서는 한창 페이스북이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때, 페이스북이 주요한 공간적 배경(?)으로 등장해 현실성을 배가한다. 그 시절의 OS를 엿볼 수 있는 것도 덤.
<서치>(Searching, 2018), <서치 2>(Missing, 2023)
티무르 베크맘베토브의 스크린 라이프 기법은 영화 <서치>의 흥행으로 정점을 맞이했다. 영화 <서치>는 <언프렌디드: 친구삭제>와 3년의 갭만큼이나 진일보한 디지털 기술을 오롯이 담아냈다. <서치> 시리즈는 더욱 발전한 애플의 동기화 기능은 물론, 라이브 방송, 페이스타임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사용하며 러닝타임을 가득 채운다.
<서치>, <서치 2>가 <언프렌디드: 친구삭제>에 비해 더욱 좋은 평가를 받았던 건 단지 더욱 밀도 높아진 화면 구성 때문만은 아니다. ‘스크린 라이프’ 기법은 <서치> 시리즈에서 더욱 발전해, 영화는 배우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도 감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을 구현하기에 이른다. 애지중지하던 동영상을 휴지통으로 옮긴다거나, 차마 마주하고 싶지 않은 사실 앞에서는 멈칫하는 마우스 커서라거나. 스크린 라이프는 <서치> 시리즈를 통해 디지털 세대의 문법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영화 언어로써 도약했다.
<프로필>(Profile, 2018)
영화 <프로필>은 테러 단체 ISIS의 온라인망에 잠입한 영국인 기자의 이야기를 다룬 스릴러다. 티무르 베크맘베토브는 <프로필>의 감독과 각본, 제작을 맡았다. 영화 <프로필>은 2018년 제68회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으며, 파노라마 부문에서 관객상을 수상했다.
2014년 경, 유럽의 수많은 젊은 사람들이 ISIS에 합류하기 위해 시리아로 향했다. ISIS는 대원을 모집하기 위해 SNS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들의 조직에는 ‘미디어 팀’이 있었는데, ISIS 합류를 선동하는 영상과 이미지 등을 온라인에 게시하는 것이 주 임무였다. 이 대목에서, 티무르 베크맘베토브 감독이 영화 <프로필>에서 이 이야기를 스크린 라이프 형식으로 다루고자 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디지털 버전, <R#J>(2021)
2021년 선댄스영화제에서 최초로 공개된 영화 <R#J>. 영화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현대판 버전을 표방한다. <R#J>는 스크린 라이프 기법과 멜로의 만남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 영화 역시 티무르 베크맘베토브가 제작자로 참여했다.
스크린 라이프 기법의 영화 작업은 전통적인 촬영감독의 역할, 편집감독의 역할 등을 재구성한다. 스크린 라이프 영화의 편집감독은 촬영 시작부터 적극적으로 영화 작업에 참여한다.
<R#J>의 편집을 맡은 람 응우옌은 「포브스」와의 인터뷰에서 그럼에도, (스크린 라이프 영화 역시) 영화 제작과 스토리텔링의 기본은 여전히 적용된다고 밝혔다. 결국, 영화가 어떤 형식을 따르건 간에, 이야기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것. <R#J>가 400년도 더 된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야기를 차용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화면 위에 얹은 K-로맨틱 코미디! <롱디>(2023)
‘장거리 연애’를 뜻하는 ‘롱디’. 물리적으로 가깝지 않은 두 사람의 연애를 보여주기에는 스크린 라이프만큼 적합한 방법이 없다.
<롱디>는 한국 영화 최초로 100% 스크린 라이프 형식을 선보이는 작품이다. 실제 촬영 역시, 아이폰과 고프로 등으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롱디>의 주연 배우 장동윤, 박유나는 직접 카메라를 들고 열연했다.
<롱디>는 티무르 베크맘베토브가 설립한 제작사 바젤레브스가 참여했다. 티무르 베크맘베토브는 “한국 관객은 IT 기기의 활용도가 높고 새로운 것에 대한 수용성이 높아서 스크린 라이프 형식을 가장 잘 받아들이고 선도할 수 있는 관객들이라고 생각한다”라고 한국에서 <롱디>를 제작한 이유를 밝혔다.
<롱디>는 5월 10일 개봉했다.
씨네플레이 김지연 기자